[차용범 칼럼]언론의 자유, 언론개혁 논란, 조지 오웰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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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언론의 자유, 언론개혁 논란, 조지 오웰의 경고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5.1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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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사람들이 듣기 싫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

“자유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If liberty means anything at all, it means the right to tell people what they do not want to hear). ‘행동하는 자유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직설적 자유론이다. 정치우화 <동물농장>의 서문 ‘언론의 자유’에서 따온 문장이다. 그 자유론, 영국 런던의 BBC 건물 외벽에 새겨져 있다. 오웰의 자유론(벽)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고-.

BBC, 세계적 명성의 공영방송이다. 저널리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 공정보도의 대명사다. "우리는 편들지 않는다(We don’t take a side), BBC의 캐치프레이즈는 오늘도 선명하다. 오웰, 현장을 중시한 기자요, 진실에 충실한 작가였다. ‘정치적 글쓰기’로 독특한 위치를 구축하며, 언론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일찌감치 ‘빅브라더’의 등장을 예견하며, 감시·통제의 디스토피아(dystopia: 역유토피아)를 경고했다. 억압에 저항한 자유인, 사유와 행동을 일치시킨 지성인..., 그에 대한 평가는 날로 새롭다.

BBC와 오웰은 저널리즘의 철학·가치를 공유하는 동반관계다. 저널리즘의 의무는 진실 추구라는 것, 저널리즘은 우선 시민에게 충실해야 하며, 그 본질은 검증의 규율에 있다는 것을, 함께 증언하고 다짐했다. 그만큼 저널리즘을 통한 그의 주장은 언제나 거침없고 비유는 명쾌했다. 최근 BBC앞 오웰을 찾은 박보균 대기자(중앙일보)의 현장 인상도 그러하다. “오웰은 지나가는 BBC 기자에게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라고 시위하는 듯하다”는 것이다(중앙선데이).

오웰의 인간억압 체제-정보 왜곡·통제 신랄한 경고

올해 조지 오웰의 70주기를 맞아 그의 '언론의 자유'에의 직설, 정보 왜곡·통제에의 경고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사진; 조지 오웰 '1984년' 국내판 표지 캡처).
올해 조지 오웰의 70주기를 맞아 그의 '언론의 자유'에의 직설, 정보 왜곡·통제에의 경고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사진: 조지 오웰 '1984년' 국내판 표지 캡처).

올해, 오웰의 70주기다. 세계인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다. 그의 삶과 시대를 조명하며 작품세계를 되새기는 역작(국내 번역본)도 줄을 잇고 있다. 그의 자유로운 정신과 입체적 초상을 그려내며, 그의 발자취와 생애를 다룬 독특한 평전들이 있다. <동물농장>, <1984년> 같은 ‘영원한 고전’ 역시 인기몰이 중이다. tvN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는 <동물농장>을 함께 읽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에 모두, 깊게 공감했고-.

<동물농장>(1945), 20세기 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다. 오웰은 이 짧은 소설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풍자하며 사회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 소설, ‘정치풍자와 해학의 결정체’라고들 하지만, 그 권력과 인간본성에의 풍자는 섬뜩하다. 그는 소설의 서문 ‘언론의 자유’에서, 식자층의 자기검열 풍토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언론자유의 가치를 직설적으로 역설했다. <동물농장>의 출판을 네 번이나 거절당하며 절망까지 느낀 경험의 결실이다.

<1984년>(1949), 출간 당시 미래세계를 담은 소설이다. 사회 전반을 통제·감시하는 지배권력·사회체계를 말하는 ‘빅 브러더’, 그 독재자가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독재권력이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하고, 권력자의 정보 왜곡·통제가 얼마나 정교한지 등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 지금 ‘빅 브러더’란 말이 오가는 것을 보면, <1984년>은 정말 ‘지나간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인 듯도 하다.

오웰의 언론자유 직설 때, 미국의 숙의 끝 언론자유 추구

오웰이 유럽에서 체험 속의 언론자유를 말할 때, 미국 사회는 숙의(熟議) 끝의 언론자유를 추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정부가 언론검열을 자행하고, 언론의 집중화·상업화의 폐해가 드러나던 때다. 오웰이 권력자의 정보 왜곡·통제를 경고할 때, 미국 저명인사 13인은 건국의 기본정신, 그 ‘언론의 자유’를 견지할 방안을 찾으며 ‘언론자유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빛나는 결실,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1947)이다.

그 언론사상사의 고전은 미국 언론체제의 굳건한 작동원리다.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지 않는 원칙, 언론의 자율적 규제와 질 제고, 공중의 상호비판과 전문성 제고 같은 원칙들은 오늘도 두루 통한다. 접근의 전제는 명료하다. 언론의 근본적 문제들이 보다 많은 법이나 정부 조치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정부-언론-공중에 의해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가’를 원칙 형식으로 권고하며, 정부의 ‘조치’를 권고하는 대신, 정부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있다.

‘자유롭고...’, 권력의 ‘언론통제’ 획책 시대 한국 언론에도 유용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의 통찰이 담긴 지적과 제안은 오늘 한국 언론상황에도 분명 유용하다. 한국은 언론의 자유를 선언한 민주국가다. 그 자유를 ‘민주국가의 존립·발전을 위한 기초’로 인정하는 나라다. 한국 언론체제는 정녕 어떻게 구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언론사상의 4이론 중 ‘권위주의’나 ‘공산주의’ 이론을 추종할 순 없다. ‘자유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책임주의’(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를 마지노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은 ‘공중’의 역할까지 통찰한다. “우리는 (공중의)반란을 선호하지 않는다. 자유언론을 주려는 언론에의 반란은 오히려 지금 누리는 것보다 더 적은 자유로 귀결될 수 있다”고.... 언론-정부 관계의 존재원칙 보기, 언론에의 정부개입 막기, 언론·공중 차원의 정부조치 읽기..., 이런 면에서 ‘자유롭고...’는 우리에게 유용한 지표일 터다. 우리 사회에선 자주, ‘언론개혁’의 미명 아래 ‘반란’을 꾀하고 있는 시대이니-.

최근 두 종편채널의 조건부 재승인 과정을 보라. TV조선, “공적 책임 중점심사사항 한 번 더 과락하면 재승인 거부”다. 채널A, “공정보도 위반 진상조사 결과 중대문제 드러나면 재승인 취소”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두 종편에 엄격한 재승인 조건을 붙였다는 것이다(정철운). 문제는 재승인 논의의 핵심조건, ‘방송의 공적 책임’ 및 ‘공정성’ 논란이다. 방통위는 종편의 ‘공정성’을 들어 언제라도 재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방통위? 방송·통신 융합에 대응헤 출범한 대통령 직속 행정기구다. 재승인 심사에의 논란은 많다. 그 ‘공정성’, 과연 방송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심사항목인가? 여당추천 3인-야당추천 2인의 그 심사는 객관적일 것인가? 이번 심사에서도 그 ‘공적 책임’ 점수, 같은 항목·기준에, 심사위원에 따라 격차가 2배를 넘었다지 않나(금준경). 재승인 취소를 주장한 여당추천 위원의 말, “막말·편파방송의 중심”은 과연 공정한 판단인가?

공정성? 한국언론이 정파성에 매몰, 저널리즘적 위기를 겪고 있긴 하다. 언론사가 정파적 입장에서 보도 대상·사실을 선택적으로 포함·배제하는 관행 때문이다. 그럼, 언론-정파-단체가 ‘모두 공유할 현실인식’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언론의 이상적 모습이 꼭 ‘중립성’인가? 그렇지도 않다. 다양성은 민주주의 사회·언론의 중요한 덕목 아닌가. 어차피 정파성 문제가 있다면, 정파적인 다수 언론이 다른 목소리를 내며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정부·시민사회 비판언론 존폐 책동? 그건 언론에의 ‘반란’

더러 기억하는가? 한국언론학회가 노무현 정부 방송위원회의 의뢰로 연구한 ‘대통령 탄핵 관련 TV내용 분석’을. 한국 TV방송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관련 정보·견해를 공정하게 보도했는가? 연구결과는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였다. TV방송 모두, 공정성 관련 자율규정을 외면, 절제적 편향에서 일탈적 편향-파괴적 편향까지, 지독한 편향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방송들, 오늘도 건재하다.

최근 한 공영방송은 내부 취재정보의 타 언론 유출의혹으로 시끄럽더니, ‘조국 사태’ 관여 피고인을 출연시켜 ‘조국 보도’ 비평까지 진행했다(저널리즘 토크쇼). 이건 공정한가. 한 공영방송 사장은 보도국장 재임 때 조국 지지집회 인원을 “딱 봐도 100만 명”이라고 발언한 극단적 친정부 성향이다. 이건 공정할까. 한 방송 기자들의 항변이 있다, “정권 입맛에 맞는 방송은 공정하고, 정권 입맛에 안맞으면 불공정한가?”

아니, 친정부 방송은 어떤 불공정 행위를 저질러도 괜찮고, 정부비판 방송은 보도·토론의 자유도 갖지 못하나? 진리는 토론 끝에 당당하게 표출하고(죤 밀턴), 언론의 자유에는 생존에 필요한 ‘숨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데(대법원), 방송의 토론조차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생존을 위협하나? 그 ‘조건부 재승인’ 결정에 언론자유 침해 논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행정기구가 언론의 존폐를 결정한다? 그건, 정부가 직접 자유언론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종편의 재승인 취소를 강박한다? 그건 미디어 융합상황 속 공공성의 방향에 대한 고민 없이 일방적 이념만 강조하는(김대호) 언론에의 ‘반란’이다. 정부가 방송의 공정성을 재단, 메인뉴스 시청자수 종편 1위의 보도기능을 없앤다? 코로나 19의 대혼란기에 ‘미스터트롯’으로 국민을 위로하며, '한국인 좋아하는 프로그램' 연속 1위-지상파·종편 예능·음악 프로 시청률 신기록을 쌓고 있는 채널을 없앤다? 과연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언론개혁’ 미명으로 ‘비판언론’ 폐쇄, ‘그런 일’ 일어날 수도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시나브로 ‘언론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4·15총선에서 압승한 여권은 연일 ‘언론개혁'을 거론하고 있다. 공영방송을 포함, (공정성 잃은)언론은 정권의 응원단 노릇을 하고 있다. 권력을 비판하는 대신 (본분에 바쁜) 비판언론을 비판한다. 이 언론개혁은 대부분 비민주적 정책이다. 사회는 날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반면, 이 논의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막강한 ‘권력’은 비판언론을 더 통제하려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상황의 문제는 뚜렷하다. ‘권력’은 권력비판을 사명으로 삼는 그 언론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 한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이념과 진영논리에 빠져 비판언론 옥죄기에 가세하고 있다. “사회적 갈등 사안은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포괄적으로 보도해야 하고, 어떤 의견도 상당 정도 국민지지를 받으면 정당하게 이를 다루어야 하며, 지지 정도가 약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의견은 균형 있게 처리해야 한다....”, 그 BBC의 공정보도규칙도 오직, 남의 얘기다. 그저, ‘듣기 싫은 소리’는 안듣겠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지 말라. 그건 당신에게 달렸다...”

오웰의 <동물농장>이며 <1984년>은 우리에게, ‘흘러간 시대’의 ‘소설’만은 아니다. 그의 언론자유에 대한 직설이며 정보 왜곡·통제에의 경고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는 증언한다. 독일 히틀러의 ‘국가의 정치적 의사와 국민의사의 동질화’가 초래한 비극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국민들은 처절하게 반성했다, “그 때 우리가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더라면...”. 그 역사는 경고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전체주의, 모택동의 광기 속 집단폭력의 참담한 말로를.

우리는 천부적 인권, 그 언론의 자유를 위해 불편한 진실들을 짚어가야 한다. 우리의 언론자유는 국민의 알 권리와 말할 자유-들을 자유를 충족하고 있나? 언론개혁 논의는 그 말할 자유-들을 자유를 추구하고 있나? 오웰의 말대로, “설사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의견도 알려질 기회를 주는가?” 우리는 깨우쳐야 한다, 권력이 언론개혁에 목맨 나라들은 전체주의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우리는 ‘(권력이)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언론을 (권력에 의해) 잃을 수도 있음을.

오웰이 평생 추구한 저널리즘의 목적은 뚜렸했다. 언론의 자유와 진실이 존재하는 사회다. 오웰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진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우리는 오늘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데이비드 런시먼)들을 일상처럼 보고 있다. 오웰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단순하다. 그가 <1984년>을 쓰며 남긴 유언과도 같은 경고대로다. “(감시·통제의 디스토피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지 말라. 그건 당신에게 달렸다(Don’t let it happen. It depends on you)”(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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