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범 칼럼] 나는 왜 시사 칼럼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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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 나는 왜 시사 칼럼을 쓰는가?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8.3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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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럼니스트(Columnist)다. 일간신문 사회부장 시절부터, 시대현상을 논평하고 여론형성에 기여할 시사칼럼을 썼다. 언론의 책무와 언론인의 숙명을 생각하며 당대의 사회적 초점을 정리, 꾸준히 의견을 밝혀온 것이다.

나는 부산시정 매체를 제작할 때도, 일간지의 고정 필진으로, 잡지의 권말칼럼으로, 시사 칼럼을 썼다. 주제를 선정하고 논점을 제기하며 의견을 말하는 데 별다른 제한은 없었다. 그저 그 시기의 키워드에 집중하며 ‘논평의 자유’를 한껏 즐겼다. 그건, 내가 당대의 현실에 참여하는 수단이었고.

당연히, 나는 칼럼에 나의 가치관을 반영했다. 한국사회의 병리(病理)며, 지역사회의 가치에 대한 인식·주장이다. 그것이 일상적 삶 내지 현실과 맞닿은 사회비평일 것이라고 믿었다. 최근의 이슈를 주제 삼는 관점 칼럼 또는 개인의견 칼럼 영역이다.

원래 칼럼은 특정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쓰는 것이다. 논쟁과 사고(思考)를 촉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는 자기주장을 고집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의 공정성을 놓치지 않되, 열정과 신념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칼럼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 속에 논쟁과 논조를 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시사칼럼을 쓸 때면, 뼈를 깎는 노력과 혼을 쏟아붓는 열정을 다했다. 나는 논리나 주장을 숙성시키지 않은 채 칼럼을 쓴 적이 없다. 언론인의 본분 아래, 당대의 권력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 적도 없고, 그들과의 비판적 거리 두기도 잊지 않았다. 그 칼럼들은 나의 최선의 산물이다.

특히 <시빅뉴스>에 ‘차용범 칼럼’을 쓴 지난 1년 6개월, 나는 언론인의 책임 앞에 분발했다. 내가 감당해야 할 환경 탓이었을까. 특히 언론은 현대 민주국가에 꼭 필요한 사회체제라는 믿음, 언론인의 책임은 사회현상을 정확하게 감시·비판하는 것이라는 전통에 충실하려 애썼다.

그 결과, 칼럼 주제가 정치 분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앞선 칼럼들이 우리 사회의 일상적 병리를 분석·비평하며 부산 지역사회의 현안을 주제 삼았다면, 최근 칼럼은 ‘언론의 자유’며 ‘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현실 의제에 몰입하더라는 것이다.

글쓴이가 ‘시빅뉴스’에 게재한 ‘차용범 칼럼’은 주제의 집중현상이 뚜렷했다. 당대의 이슈에 주목한 결과, 그 분야의 이슈가 그만큼 쏟아졌던 것이다(사진; 칼럼 목록 일부).
글쓴이가 ‘시빅뉴스’에 게재한 ‘차용범 칼럼’은 주제의 집중현상이 뚜렷했다. 당대의 이슈에 주목한 결과, 그 분야의 이슈가 그만큼 쏟아졌던 것이다(사진; 칼럼 목록 일부).

최근 칼럼 주제 정치·언론 집중... 의도했던 바 아냐

1. 내가 이 기간, '시빅뉴스'에 게재한 칼럼은 모두 23편이다. 자주 다룬 주제는 정치 분야, 13편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대로 무너지는가?-‘표현의 자유’의 억압과 ‘공약성 쿠데타’의 징후 앞에서-”, “문재인 정부는 왜 실패했나-대통령 탄핵·사퇴 공세 앞에서-”, “원로들의 고언(苦言)이 쏟아지는 사회”, “한국 민주주의는 건강한가?; ‘민주주의의 위기신호’ 앞에서”, “민정수석 조국의 비재(非才)와 불민(不敏)”, “대통령의 신념, 책임윤리의 역습”....

다음, 언론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언론개혁 논란, 조지 오웰의 경고”, “권력은 진실 앞에 결코 강할 수 없고, 언론은 진실 앞에 결코 약할 수 없다”, “한국언론, 권력으로부터 ‘성찰’·‘개혁’ 요구받다”, “한국언론과 '조국 보도’, 공정성, 진영논리, To be or Not to be”, “진실보도와 국익보도, 그리고 언론-권력의 갈등”,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행정의 장막을 걷어라” 등 7편이다.

그 밖에, 현충일을 맞아 “호국 영웅을 기억하라”, 한일갈등 국면의 “일본은 우방인가?”, 탈원전 논란 속의 “탈원전’ 이슈 세종이라면” 같은 주제에, 최근 코로나 19 국면에서 “팬데믹의 경고, After Corona의 선택, 해양도시 부산의 오만”을 썼다. 칼럼의 내용과 주장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 제목에서 두루 간취(看取)할 수 있는 바이니.

그 주제의 특정분야 집중현상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대략 4주에 한 편꼴로 칼럼을 쓰며 당대의 이슈에 주목한 결과, 그 기간 중 그 분야의 이슈가 그만큼 쏟아졌을 뿐이다.

내가 자유민주주의 한껏 누렸다면 정치·언론 무관할 글 썼을 것

2.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주제의 집중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자유인’ 조지 오웰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현장을 중시한 기자요 진실에 충실한 작가, 일찌감치 ‘빅 브라더’의 등장을 예견하며 감시·통제의 디스토피아(dystopia: 역유토피아)를 경고했던 오웰. 그의 집념과 통찰력은 나를 응원하는 에너지로 작용했다. 올해, 그의 70주기를 맞으며, 그의 언론자유론에 기댄 칼럼(“언론의 자유, 언론개혁 논란, 조지 오웰의 경고”)을 쓴 것도 그 때문이다.

글쓴이는 칼럼의 주제 집중을 의식하며 조지 오웰의 집념에 많은 에너지를 받았다. 뚜렷한 목적의식과 글을 쓰는 방식에서다(사진; 오웰, 구글 무료 이미지).
글쓴이는 칼럼의 주제 집중을 의식하며 조지 오웰의 집념에 많은 에너지를 받았다. 뚜렷한 목적의식과 글을 쓰는 방식에서다(사진: 오웰, 구글 무료 이미지).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논하며, 오웰과 함께 미국의 매체비평가 닐 포스트먼을 스쳐 지날 순 없다. 그는 대표작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뉴미디어 시대를 내다 본 예언적 메시지를 남겼으며, 그 예언은 오늘 한국 사회에도 대단히 유용하다. 그는 책을 출간하며, 디스토피아를 그린 두 소설, 조지 오웰의 <1984년>과 영국의 천재적 지성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비교했다.

두 소설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오웰은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 한 반면, 헉슬리는 정보과잉에 따른 수동적-이기적 존재로의 전락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의 은폐를 두려워하고, 헉슬리는 진실이 압도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지금은 고도정보화 시대, 오웰의 산업사회적 관점보다 헉슬리의 매체혁명적 관점이 보다 시의적절하다.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이 신간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호들>에서 주목한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 역시 오웰적 관점을 관통하되, 헉슬리적 관점에 가깝다. 나는 런시먼의 깊은 우려 역시 칼럼의 주제로 삼은 바 있다(“한국 민주주의는 이대로 무너지는가?-‘표현의 자유’의 억압과 ‘공약성 쿠데타’의 징후 앞에서-”).

매체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대표작 '죽도록 즐기기'에서, 뉴미디어 시대를 내다 본 예언적 메시지를 남겼다. 정보과잉에 따라, 대중은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며 진실이 압도당하는 상황이다(사진; 책자 표지).
매체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대표작 '죽도록 즐기기'에서, 뉴미디어 시대를 내다 본 예언적 메시지를 남겼다. 정보과잉에 따라, 대중은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며 진실이 압도당하는 상황이다(사진: 책자 표지).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그래도 놓칠 수 없는 가치는 오웰의 저널리즘이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전체주의·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It seems to me nonsense, in a period like our own, to think that one can avoid writing of such subjects).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직설적으로 토로했다(<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김영진). 그 뚜렷한 목적의식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는 글의 소재를 늘 현실의 삶과 사회문제 속에서 선택했다. 영국 일간지 '트리뷴(The Tribune)'에 근무하며 매주 칼럼을 썼다. 때론 세 편이나 네 편이 한꺼번에 실리기도 했다. 그에게는 그만큼 쓸 문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주제의 폭은 넓되, 목표는 뚜렷했다.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까지...(<더 저널리스트>). 오웰은 말했다, “내가 만약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치와 무관한 글을 썼을 것”이라고-. 그의 거침없는 목소리는, 곧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난, 현실에의 비관 대신 미래 기약했다

3. 고백했듯, 최근 칼럼의 주요 키워드는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였다. 언론의 자유, 언론 현장에서 느낀 경험적 인식과 ‘언론자유론’을 전공한 논리적 사고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다. 언론과 민주주의, 이즘 내가 절감하는 언론자유에의 위협이며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웰의 표현대로, 자유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오늘이었다면, 나는 정치·언론과 무관한 글을 썼을 것이다.

글쓴이는 현실에의 우려를 직설적으로 말하며 비관보다는 미래에의 희망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사진; 칼럼 게재방식 예시, ‘시빅뉴스’ 캡처).
글쓴이는 현실에의 우려를 직설적으로 말하며 비관보다는 미래에의 희망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사진: 칼럼 게재방식 예시, ‘시빅뉴스’ 캡처).

나의 칼럼들은 끊임없는 사회비판과 함께, 현실에의 우려를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문맥에는 가끔 비관주의로 보일 부분도 있었으리. 그러나, 난, 실상 미래를 기약하며 이런 글을 썼다. 그런 희망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이때 지식과 진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었다. 역시 오웰의 글쓰기 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오늘 민주주의의 위기를 그토록 걱정하며 그 민주주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세계 정치체제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점검할 때, 민주주의의 강건한 저력은 확실하다. 미국 칼럼니스트 그래그 이스터브룩의 신간 <팩트를 알면 두렵지 않다>(It's Better Than It Looks)의 진단 역시 그런 판단과 같은 맥락이다. 실망·절망보다 희망의 의지를 키운다는 것, 인류 역사를 끌어온 동력이기도 하다.

독재자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대체로 민주체제가 독재체제보다 도덕적·경제적 측면에서 두루 우월하다. 민주체제가 독재체제보다 더 생산적인 이유? 민주체제는 전쟁에서도 독재체제를 압도한다. 인간의 본성이며 사회체제의 경쟁력에서, 독재체제는 민주체제의 적수일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최근 여러 칼럼에서 언급했듯)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체제 내지 지도자다.

민주주의 위기 앞에 진실의 힘 나눌 공감 중요

오늘도 한국 민주주의에의 경고음은 끊임이 없다. ‘한국 민주주의’를 탐구해 온 최장집 교수의 경고 역시 뇌성(雷聲) 같다. 대통령의 초권력적 통치, 법의 지배가 위협받는 현실, 시민사회의 구조·성격 변화, 정당의 소외..., 촛불 이후 민주주의의 퇴행을 분석한 그의 시선은, 참 서늘하다(중앙, '최장집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진단').

‘지식인 사회의 전사(戰士)’ 강준만 교수 역시 꼿꼿한 원칙주의자다. 대통령의 취임사 ‘약속’을 그저 ‘의전’으로 깎아내리고, ‘부동산’ 발언을 ‘의전이 현실감각을 못 갖게 만든다“고 비튼다. 그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이며, ’공영방송 경영진 뇌리 지배하는 우선 관심사는 정권안보‘ 같은 촌철살인은 또 얼마나 명징한가(경향, 강준만, ‘청와대 의전·부동산약탈·어용지식인·검찰개혁·대선’을 말하다).

그러나, 권력이 폭주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빚고(이하경), 평등-공정-정의가 정권 차원의 선택일 뿐이며(반기문), 오만한 원리주의가 나라를 망칠지라도(배명복), 그 모두 국민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오웰이 걱정한 '진실의 은폐', 헉슬리가 걱정한 '진실이 압도당하는 상황' 역시, 두루 국민이 함께,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우리는 우선, 우리 사회가 지향할 바를 함께 보며, 그를 위한 진실을 나눠 갖는 데 공감해야 한다. 이쯤에서, 나는 국민의 힘, 특히 젊은이의 곧은 판단과 적극적 참여를 굳게 믿고 있다. 그러잖아도, 국민은 하늘의 무게만큼 자라났고, 자라나고 있다. 그런 기대와 희망 위에, 나는 시사 칼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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