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톺아보기 ②]언론의 진솔한 사과, 언론의 신뢰 높인다
상태바
[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톺아보기 ②]언론의 진솔한 사과, 언론의 신뢰 높인다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5.25 0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 추구다”-저널리즘의 기본가치를 실천적으로 제시한 명저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빌 코바치 등, 2000), 그  핵심원칙이다. 저널리즘은 그 누구보다 시민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 저널리즘의 본질은 검증의 규율(discipline of verification)에 있다는 것, 이 원칙들은 격변하는 저널리즘 환경 속에서 그 종사자 누구나 다짐해야 할 불변의 가치이다.

시민(공중)에게 진실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곧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진실에의 접근권). 초기 저널리즘 이래 현대 언론까지, 진실성-정확성에의 약속을 늘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론이 도저히 포기하지 못할 원칙, 그 정확성-정확성을 유지하기 위한 검증의 규율이 있다.

“절대로 조작하지 말라”, 그 묵중한 슬로건 아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덧붙이지 말라, 독자·시청자를 속이지 말라, (취재)방법·동기에 관해 가능한 한 투명하라, 겸허하라 등을 강조한다. “언론의 신뢰상실시대... 언론의 도덕성을 높여야 한다”, 이 부분은 결국 오늘 언론 종사자가 일상적으로 되짚어야 할 언론윤리의 핵심 영역이다.

2. 이즘 한국 언론의 ‘사과’ 2건이 눈에 띈다. 언론이 진실성-정확성을 결여한 보도를 자기검증을 통해 사과한 부분, 언론의 신뢰를 회복할 노력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다. 한겨레 1면의 ‘윤석열 접대 의혹 보도' 사과와, 채널A의 ’신라젠 사건 취재 중 취재윤리 위반‘ 사과가 그것이다.

물론, 두 언론사는 ‘사과’를 해야 할 입장이긴 했다. 한겨레는 보도에 등장한 공인으로부터 허위보도 제소를 당한 처지였다. 채널A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재승인 심사조건에 따라 취재윤리 위반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언론 종사경험이 있는 이들은 공감할 터다. 언론이 자기 기사의 진실성-정확성 문제로 1면 또는 메인뉴스를 통해 사과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한겨레 5월 22일자 1면, '윤석열 의혹 보도' 사과기사(사진; 신문 캡처).
한겨레 5월 22일자 1면, '윤석열 의혹 보도' 사과기사(사진: 한겨레 캡처).

⥁한겨레는 5월 22일 1면과 2면을 통해 장문의 사과문을 실었다. 지난 해 10월 조국 일가 수사 국면에서 보도한 ‘윤석열 검찰총장 별장접대 의혹’ 보도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보도를 한 점에 대해 독자와 윤석열 총장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 사과는 보도 이후 7개월여 만이다. 한겨레는 이 기사에서 관련 보고서에 없는 단어를 기사와 제목에서 수 차례 사용했다(‘조작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결국 진실성-정확성을 유지하지 못했음을 사과한 것이다.

⥁채널A는 5월 22일 '뉴스A' 클로징 멘트를 통해, “최근 불거진 검언유착 의혹과 관련한 기자의 부적절한 취재행위를 확인했다”면서 시청자에게 사과했다. 방송은 이번 건 진상보고서는 모두 53쪽 분량이라며, 5월 25일 자사 홈페이지에 전문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채널A는 “조사 결과 우리 기자가 검찰 고위 관계자와의 친분관계를 과시하며 이를 취재에 이용하려 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이는 명백한 잘못이고 채널A 윤리강령과 기자준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사과했다.

채널A, '뉴스A'의 '취재기자 언론윤리 위반' 사과 보도(사진; 뉴스 화면 캡처).
채널A, '뉴스A'의 '취재기자 언론윤리 위반' 사과 보도(사진: 채널A 뉴스 화면 캡처).

3. 세계 권위지들도 더러 언론보도 과정에서 진실성-정확성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한 결과 ‘사과’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사과의 결과는 참 좋았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WP)의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는 그 단적인 사례이다.

198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WP의 ‘지미의 세계’ 보도는 미국언론 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다.  WP의 젊은 여기자 재닛 쿠크는 8세짜리 미약중독자의 삶을 다룬 현장르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짧은 기사는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시장·경찰국장이 ‘지미 구하기’에 나섰다. WP의 전설적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가 ‘진실 찾기’에 나섰다. 그 기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고, 쿠크에게 진실 증명을 요구한 것이다.

그 기사는 완전한 조작이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튿날, 쿠크는 상을 반납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현직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냈던 탐사보도의 명가 WP의 명성에도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WP는 이 위기를 이겨내고 독자의 굳건한 신뢰를 회복했다. 스스로 ‘조작기사’를 찾아내고, 그 사실을 1면 Top 기사로 알리며 진정성 있게 사과한 것이다.

NYT는 제이슨 블레어 사건 같은 신뢰의 상실 위기를 진정성 있는 검증과 사과로 극복, 예전 이상의 명성을 구축했다(사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13가, 'NYT의 상징' 사옥 전면, 구글 무료이미지).
NYT는 제이슨 블레어 사건 같은 신뢰의 상실 위기를 진정성 있는 검증과 사과로 극복, 예전 이상의 명성을 구축했다. 사진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13가, 'NYT의 상징' 사옥 전면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세계 최고’의 신문 뉴욕타임즈(NYT) 역시 조작·날조 기사와 표절 기사로 역사에 길이 남을 재난을 치렀다. ‘제이슨 블레어 사건’이다. 젊은 기자 블레어는 기사를 조작·날조하는 그릇된 행로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승승장구했다. 편집국 주요부서까지 진출하며 스타 기질을 보이다 2003년 끝내 기사 조작·표절 사실이 들통 났다. NYT의 신뢰도에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NYT 역시 이 재난을 진정성 있는 검증과 사과로 대처했다. 아서 슐즈버거 발행인과 하월 레인즈 편집인이 앞장 섰다. 신문의 1면과 4개면에 장문의 사과문과 조사결과를 게재했다. 후속조치도 잇따랐다. 앨런 시걸 편집국 부국장을 위원장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 사태발생 배경과 조직운영의 문제점, 향후 대책을 담은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의 제목은 ‘왜 우리의 저널리즘은 실패했나.’ 이후 NYT는 예전의 명성을 회복했나?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는 평가다.  

4. 한국 언론은 이즘 ‘상상 그 이상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 위기,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언론환경의 격변에 따른 전통매체의 산업적 위기를 넘어, 언론지형의 급변에 따른 언론소비 형태의 변화까지, 한국언론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지 오래다.

우선, 종이신문의 구독률은 한 자리 숫자로 급락했다(한국언론재단, 2019년 언론수용자 조사). 종이신문의 구독률·이용률이 급락하고 있는 것은 포털 뉴스와 스마트폰의 영향 때문이다. 단, 다양한 수단으로 종이신문 기사를 읽는 결합열독률은 무려 88.7%, 여전히 신문은 매스컴의 주축적 매체 형태임을 증명한다. 로저 피들러의 ‘미디어 변형론’(mediamorphosis) 그대로다. 

방송 분야의 위기 역시 구조적이다. 최근 “KBS·MBC 광고매출 추락, 바닥이 없다” 기사가 심상찮다. 지상파 방송사 광고매출은 해마다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KBS·MBC 광고는 종편 등장 이후 계속 하락세다. 그동안 지상파 광고총량제 규제완화와 ‘꼼수 중간광고’ 도입에도 흐름은 같다. 곧 지상파 방송사 광고매출 규모가 종편에 역전당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미디어오늘, 금준경).

5. 이른 바, Smart Media시대다. 그 세계적 조류 속에서 세계 속 신문의 혁신 노력은 눈부시다. 우선 Digital First시대의 생존전략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일단, 구독료 매출이 광고수익을 넘어섰다. 한국의 기존 관념대로라면, 구독료 대 광고료 비율은 2~3 대 7~8 정도. 세계신문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 신문의 종이신문+디지털신문의 ‘구독’ 매출은 2018년 920억 달러(102조)로 870억 달러(97조원)를 기록한 광고를 추월했다. 구독이 광고를 추월한 것은 100년 만에 처음이며,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신문의 혁신은 그저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결국 신문의 위기를 뚫을 돌파구는 ‘최고의 저널리즘‘을 구현하는데 있다는 공통인식이 있다. 미국 NYT와 영국 가디언 같은 전통적 권위지들이 ‘최고의 저널리즘’을 토대로 구독모델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게 참 반갑다. 세계신문협회(WAN-IFRA) 주최 ‘세계뉴스미디어총회(WNMC) 2019’ 소식이다(동아일보, 강경석).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1821년 창간한 세계적 신문이지만 최근 수백억 원의 적자를 보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2015년부터 캐서린 바이너 편집국장 주도로, “가디언을 아이디어와 이벤트의 발상지로”를 추구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2018년도에 20년 만에 흑자를 기록했다. 디지털 콘텐츠 무료 서비스를 유지하면서도 ‘후원 모델’이라는 방식으로 성공했다.

가디언은 지난 수년 동안 독자에게 가디언의 가치와 목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고, 독자와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가디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품질 콘텐츠(기사)를 모두에게 개방했고, 이를 전제로 구독모델을 활용했다. 2022년까지 200만 명의 후원자를 모집할 야심찬 목표다.

NYT 역시 ‘고품질 저널리즘’을 지향, 2025년까지 유료 구독자 1000만 명을 확보할 목표다. 결국 혁신의 핵심은 최고의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최고의 제품(기사)을 선보이면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게 된다는 것, 스트레이트 기사, 칼럼과 같은 NYT의 전통적 저널리즘 제품이 없다면 독자층을 무턱대고 늘리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인식이 새삼 놀랍다.

6. “세계적 권위지 100년 DNA는 결국 신뢰였다”(조선일보, 오윤희·손진석·이하원). NYT·WP·FT·가디언·르 피가로…, 세계 속 100년 신문의 공통적 성공인자, 그 DNA를 다룬 기사 제목이다. 이 신문들, 양적으로 발행부수를 과시하기보다는 질적으로 명성을 자랑해 온 공통점이 있다.

NYT의 온라인 부문 유료구독자가 350만 명으로 급증했다. 종이신문 구독자 170만 명의 2배다. 2025년까지 디지털 유료 독자 1000만 명을 확보할 목표다. 전통 신문산업의 침체는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4년 이후 미국에서 일간지 100개 이상이 없어졌고, 신문광고 규모도 계속 급감세다. 그 흐름 속에서 돈을 내고 온라인 뉴스를 사 본다? 왜? 사실보도에 충실한 신뢰, 그 명성 때문이다.

유럽의 '100년 신문'들도 대부분 기업 소유다. 하지만 '100년 신문'이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신뢰는 여전하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가 대표적이다. 우파 중산층을 대변하는 르 피가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 노선을 지지하면서도 그의 소통 부족을 매섭게 비판한다. "신문은 권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다. 그래도 지면에는 그의 입김이 나타나지 않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15년 일본 닛케이그룹 소유로 바뀌고도 예전의 권위는 여전하다. 사실에 충실하고 깊이를 추구하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7. 한국 언론의 위기? 그 위기는 언론환경의 격변에 따른 산업적 위기, 언론지형의 급변에 따른 언론소비 형태의 변화 문제만은 아니라고, 나는 본다. 저널리즘 불변의 가치, 그 ‘진실 추구’를 외면하며 진실성-정확성에 게으른 묵은 폐습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얼마 전 칼럼 “한국언론과 '조국 보도’, 공정성, 진영논리, To be or Not to be”에서, 차마 망설였던 도발적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한국언론은 정녕 민주국가의 존립을 위한 기초로서, 사회통합·여론형성에 제 몫을 다하고 있는가. 언론의 존립 바탕이라 할 그 진실·공정을 추구하며 역사의 현장에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는가. 한국언론은 존망을 다툴 위기 앞에서 최선의 대응을 고민하고 있는가를. 한국 언론은 이런 질문 앞에 결코 당당하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하 그 칼럼 일부를 원용한다) 한국언론의 위기, 그 뿌리는 분명하다. 오늘 한국언론은 사회갈등·양극화의 심화에 따른 진영논리와 자사이기주의에 침몰하고 있다. 언론의 존립바탕이라 할 ‘신뢰’를 잃고 사회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오태규, 한국언론의 품격). 한국언론이 진영논리와 자사이기주의에 침몰했다? 언론의 자사이기주의는 참 갋지도 못할 인습이지만, 그 강고한 진영논리는 끝내 언론의 ‘사망선고’를 조롱할 지경에 이르렀다.(...)

뉴스 사회학의 시조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설파했다. “뉴스란 ‘사회적 모든 상황의 반영 아닌 눈에 띄는 측면에 대한 보고”라고-. 언론은 특정한 독자·시청자를 위해 시각·지침을 바꿀 순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저널리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통적 과제가 있다. 정확성·공정성이다. 특히 언론이 공정성을 의심받는 순간, ’언론‘은 이미 ’언론‘일 수 없다. ’공정‘ 없이는 ’정확‘을 담보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한국언론의 위기, 돌파구는 있다. 저널리즘의 경계 안으로 복귀, 공정성을 되찾으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세계뉴스미디어총회 2019’의 결론도 그렇다. “꾸준히 혁신하되, 결국 핵심은 최고의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언론은 무엇보다 저널리즘의 전통적 과제, 공정성·정확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한국언론, 살려 들면 살 것이고, 죽으려 들면 죽을 것이다. 그 선택이 무엇일지, 참 궁금하다....

8. 한국의 두 언론, 모처럼 자기 보도에 자기 검증을 거쳐 자기 사과를 했다. 그 사과가 당면한 고비를 극복하려는 겉만의 ‘몸짓’이었는지, 저널리즘의 본질을 생각한 속깊은 ‘참회’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른 언론의 자기 사과 역시 사과답지 않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다만, 이즘 우리가 되새길 교훈은 분명하다. 언론이 진정성을 갖고 자기의 결함을 찾아가며 속깊은 사과를 했을 때, 그 결과는 참 좋았다는 것, 그래서 우리 언론들도 좀, 그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며 저널리즘의 본질을 되찾는 계기로 삼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