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⑨]언론보도의 징벌적 배상? 권력의 ‘언론통제’와 언론의 'To be or No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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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⑨]언론보도의 징벌적 배상? 권력의 ‘언론통제’와 언론의 'To be or Not to be'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7.12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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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련을 맞고 있다. 정부·여당은 예상대로, 민주주의 규범을 뛰어넘는 ‘언론개혁’ 공세를 퍼붓고 있다. 대통령은 시나브로 ‘언론개혁’을 주문하고, 정부·여당은 그 목표에 역량을 집결하고 있다. 모처럼 언론 3단체가 함께 방어전에 나섰으나 그 역량은 그리 미덥지 못하다. 언론은 그 논리 없는 완력 앞에서도, 적전분열 속 전전긍긍이다.

우선, 최근 여권 국회의원들의 ‘언론개혁’ 열의는 뜨겁다. ‘언론개혁’을 총선공약으로 내세운 이들을 선두로, 개인(가족)비리 보도에 격분한 의원도 합세했다. 여당은 ‘가짜뉴스’ 규제방안의 하나로, 언론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입법안을 제출했다. 언론계의 대응? 언론3단체가 함께, 법안반대 의견서를 제출했다.

최근 언론보도에 징벌적 배상을 물리는 법 개정안 제출을 둘러싸고,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 보호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사진; 관련 책자 표지 일부).
최근 언론보도에 징벌적 배상을 물리는 법 개정안 제출을 둘러싸고,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 보호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사진; 관련 책자 표지 일부).

여당 개정안, “언론 악의적 보도에 손해액 3배 배상”

1. 최근 언론계 이슈, 언론보도 피해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리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이다. 대표 발의자는 정청래 의원이다. 언론의 악의적 보도로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법원은 손해액의 3배 범위 안에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악의적 보도’의 정의를 본다. ‘허위사실을 인지하고도, 피해자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왜곡보도를 하는 경우’다. 불법행위의 구성요건을 정한 중요 문맥이다.

정 의원은 언론판결 흐름도 관찰했다. 최근 10년간 언론관련 민사 1심판결 중 원고승소율은 49.31%, 상소심의 원심판결 유지비율은 88.37%라는 것, 손해배상 청구의 원고승소율은 39.74%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해석한다, 허위왜곡 보도의 피해자가 제대로 된 배상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뉴스1).

언론3단체 의견, “보도 ‘피해’는 소수 ‘공인’ 영역”

2. 한국신문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한국기자협회(언론3단체)는 이 개정안을 즉각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했다.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훼손, 언론활동을 위축시키는 과잉규제라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언론보도에 적용하는 것은 민·형사상 책임을 같이 지우는 우리 법률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부당한 규제다. 우리나라는 악의적 보도에 대해 형사적 처벌을 하고 있다, 민사적으로 처벌적 배상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과잉규제다.

⥁이 제도, 성격상 언론에 적용할 여지가 없다. 언론보도 피해자는 그 특성상 불특정 다수의 약자들이 아닌, 소수 특정인, 곧 공인의 명예훼손 형태가 대부분이다.

⥁미국 대법원도 이 제도가 언론의 위축효과(chilling effect)를 유발, 민주사회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인의 공적업무에 관한 사안에서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가 입증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공인에 대한 언론의 명예훼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 언론3단체, 모처럼 언론 현안에 함께 대응, 개정안의 위헌성과 법리의 취약성을 잘 짚었다. 주장의 근거며 대안 제시에 소홀한 부분 있는 듯 하지만-.

“공직자 부정부패는 언론인 무책임보다 심각... 언론기능 절실”

3. 먼저, 언론의 자유-인격권 보호를 다룬 법 체계. 헌법은 “언론 출판이 타인의 명예-권리를 침해한 때 피해자는 그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형법은 ‘명예에 관한 죄’ 규정을, 민법은 불법행위에 관한 일반규정을 두고 있다. ‘민·형사상 책임을 같이 지우는’ 법체계다.

명예훼손의 성립 법리는 형법·민법이 같다.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특별규정(위법성 조각사유)도 두고 있다. ‘진실한 사실을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보도했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중재법 역시 형법·민법 법리 그대로다. 법의 목적대로 인격권 침해 부분은 구체적이다. 먼저, 언론의 자유와 독립,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선언한 뒤, 언론피해 구제원칙을 규정했다. 구제유형은 정정보도 청구, 중재, 손해배상 등이다.

언론보도 면책규정은 판례원칙까지 포용했다. “다음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언론은 보도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 언론 보도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 진실한 것이거나, 진실하다고 믿는 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다. 오직 ‘진실한 보도’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은 정당한 사유’를 인정했다.

헌법 등은 언론자유에의 규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반면, 언론의 면책사유를 보다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민주국가의 존립·발전을 위한 기초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 보도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높다. 언론의 적극적 보도활동으로 발생하는 충격․영향이 큰 만큼 명예훼손·사생활권 등 상충적 개념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은 크다. 일반국민 역시 문제 있는 언론보도에 적극 대응하는 추세다. 정치인․공직자도 적극적 대응에 나서고 있고.

그러나 언론의 본질적 기능을 생각할 때, 개인의 명예․인격권 보호를 이유로 언론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할 순 없다. 이게 헌법정신이다. 지난 시절 미국의 찰스 휴즈 대법원장은 수정헌법 초안자 제임스 매디슨의 말을 인용, 현대사회에서의 언론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정부의 비대화 속에서 무책임한 공직자의, 국민의 생명·재산에 대한 위협은 용감한 언론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는 것, 일부 무책임·부도덕한 언론인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남용된다고 해서,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이 위축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익성·진실성 범위 날로 확장... ‘공인’ 명예 낮게 보호 흐름

4. 우리 법체계가 언론보도의 면책사유를 보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공무관련 비밀이 너무 많고 취재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막힘없는 정보유통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정치인·공무원 같은 공인의 명예까지 폭넓게 보호하려 할 때 언론은 무력해지고 언론자유는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럼 언론보도의 공익성-진실성은 어떻게 가리나? 그게 쉽지 않다. 법 운용에 따른 논란이 많다. ‘공공의 이익’, 지금은 ‘공인’개념을 한껏 확장, 공직자(public officer)⇨공적 인물⇨공적 관심사⇨공익(public interest)까지 인정한다. ‘진실성’, 앞서 말한 대로, ‘오직 진실한 사실’을 넘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까지 인정한다.

‘진실’의 폭은 보다 넓다. 표현의 자유에 ‘그 생존에 필요한 숨쉴 공간’을 인정한다. 표현의 전체 맥락을 중시할 뿐 완전히 객관적 진실과 일치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론이 오직 ‘진실’만을 보도하라? 그건 거대한 권력 및 사회에의 감시, 그 고발·의혹 보도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우리가 이 정도 법리를 확보하기는 쉬웠겠나. 언론의 자유는 늘 정치·사회적 저항과 이념적 편견에 직면했다. 특히 권력-언론의 갈등해소 과정에서 공직자의 명예보호를 내세워 언론자유를 가로막는 언론탄압 시도도 잇따랐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세칭 ‘공인’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이 급증, 공인이 쉽게 승소하는 흐름도 있었고(차용범, 공인의 명예훼손에 대한 사법적 논의의 한계, 한국언론학보).

언론 3단체가 말한 언론의 위축효과(chilling effect)도 그렇다. 언론보도에 ‘오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할 때, 언론이 겪는 냉각효과다. 글쓴이도 권력을 상대로 한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건의 소송을 당하며 예의 ‘위축효과’를 절감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은 “보도가 맞으면 검찰이 죽고, 보도가 틀리면 신문이 죽을 것”이며 보도자제를 압박했고. 대법원 판결에서 언론보도가 ‘진실’인 것으로 드러날 때까지, 언론이 겪은 그 위축효과다.

⥀언론자유와 인격권 보호, 두 헌법적 가치의 충돌을 정리한 것은 헌법재판소다. ‘공적 인물의 공적 활동에 관한 신문보도가 명예훼손적 표현을 담고 있는 경우 언론보호와 명예보호의 이익조정 기준’을 제시한 헌재 결정(1999.6.24)이다. 이에 앞서, 명예훼손의 위법성 조각사유 중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사유’를 널리 인정한 대법원 판결(1999.1.26)도 있었고.

그 법리는 명확하다. 공적 인물의 공적 활동에 관한 명예훼손적 표현 때, *공적 인물과 사인(私人), 공적 관심사안과 사적 사안간 심사기준의 차이를 두어야 하고, *공적 인물의 공적 활동 관련 명예훼손적 표현은 그 제한을 더욱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인’의 명예를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인’의 명예를 낮게 보호하는 입장으로 전환한 결정이다(차용범, 공인의 명예훼손에 대한 판결기준의 변화추세, 한국언론학보).

징벌적 배상 앞서, ‘현실적 악의’원칙 도입은 어떤가?

5. 언론자유의 보호 법리에, 아직도 논란은 적지 않다. 진실성·공공성을 누가 입증할 것인가, 그 입증책임이다. 우리, 피고(피고인)에게 입증책임을 지우고 있다. 언론이 그 보도의 공익성·진실성을 입증해야 한다.

⥁미국의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 원칙? 미국 언론은 공인관련 소송에서, 대부분 이 원칙을 적용 받아 승소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정착시킨 판례이론이다. “명예훼손에 따른 (언론의)입증책임을 너무 엄격 적용하면 정부․공직자에 대한 언론 비판활동의 위축을 가져오는 만큼,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은 일반인과 다른 잣대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 바, 입증책임의 전환이다. 공직자의 명예훼손소송에서, 피고에게 ‘현실적 악의’가 있었음을, (원고가)증명되지 않는 한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공직자의 공적 문제에 관한 선의의 표현은 설령 그것이 허위라 하더라도 보호받아야 하며, 원고측이 언론의 ‘현실적 악의’를 분명․확실한 증거로 증명하라는 것이다.

비판 받는 공직자가 비판하는 언론의 ‘현실적 악의’(허위라는 인식+보도과정의 경망스러움)을 증명하기가 그리 쉽겠나. 법리는 분명하게 말한다. 공적 문제에 관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 공무원의 직무사항은 신랄하게 공격할 수 있다, 자유로운 토론에 오류는 불가피하고 그 오류는 토론을 위한 ‘숨 쉴 공간’이다, 그 ‘현실적 악의’ 없는 언론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

⥁한국 법원은 이 법리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징벌적 배상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언론3단체의 지적을 되짚는다. 그 ‘현실적 악의’원칙을 예시하며, 그 제도의 채택을 주장하는 건 또 어떤가? 이 법 개정안 발의자 역시 미국 제도(징벌적 배상제)를 참고할 때, 왜 이 원칙(현실적 악의 원칙)은 간과했을까?.

⥁이번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논란은 벌써 언론계를 나누고 있다. ‘언론탄압’으로 보는 시각과 ‘언론개혁’으로 보는 시각이다. 다수 언론은 이 제도를 부정적으로 보지만,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다.

기존 법 ‘사회소통’ 기능 외면·법 개정?... 불온한 징후

이번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둘러싼 후폭풍은 만만찮을 것이다. 정부·여당이 그동안 추진해 온 ‘가짜뉴스’ 규제방안, 곧 핵심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미 확인했듯, 이번 개정안은 언론자유의 헌법적 가치에 둔감하고, 법적 논리에 취약하다. 그리고, 기존 법체계가 갖는 ‘사회와의 소통’ 기능을 외면하고 바로 법 개정을 노린다는 것, 좀 불온하다. 우린, 필요최소한의 법 아래, 법 적용의 폭과 깊이를 조절하며, 변화하는 시대환경에 능히 적응해 왔다.

이번 법 개정은 민주주의를 직접 위협할 수 있다. ‘가짜뉴스’ 규제에 매달리는 권력의 그 집요함을 보라. 정부의 ‘적극적 언론통제’ 정책 속, ‘가짜뉴스’ 프레임으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보 왜곡·통제의 한 양상일 수 있다.

개정안은 국회의 문턱을 넘을까? 언론탄압’에의 비판이든, 위헌성에의 지적이든, 그건 변수일 수 없다. 정부·여당의 의지에 달렸을 뿐이다. 그 권력들은 권력비판을 사명으로 삼는 언론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조국 보도’며, 추미애·김두관이며, 권력을 감시하는 고발·의혹 보도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법의 지배’, 그 실질적 법치 대신, ‘법에 의한 지배’, 그 형식적 법치를 추구할지 모른다.

그 의지에의 대응, 어려울 것이다. ‘시민단체’는 진영논리에 따라 비판언론 옥죄기에 가세할 것이다. 언론이 권력을 비판하는 대신 비판언론을 비판할 수 있다. 자주 그래왔듯, 언론의 적전분열이다. ‘진보논객’ 손석춘 교수(건국대)가 최근 정부의 언론통제 실상과 언론개혁 운동의 정파성을 작심하고 비판했듯.

한국 언론, 오늘의 시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것인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언론 3단체가 무슨 힘이 있나. 소속 신문-방송-기자들이 두루 ‘협회’ 입장을 따를 것도 아니고. 이제, 말 그대로, ‘To be or Not to be’다. 한국 언론, 함께 살려 들면 살 것이고, 더러는 죽어도 좋다고 들면 함께 죽을 것이다. 그 선택이 무엇일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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