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범 칼럼]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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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19.05.2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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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 그 현대적 의미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다비드, 1787,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이스의 배심재판 결과 사형을 당했다. 그의 죽음, 민주주의 국가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민주주의의 기막힌 역설이다.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다비드, 1787,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이스의 배심재판 결과 사형을 당했다. 그의 죽음, 민주주의 국가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민주주의의 기막힌 역설이다.

“진리는 토론 끝에 당당하게 표출한다”-역사상 언론자유를 위한 최고의 항변서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의 중심개념이다. 존 밀턴(John Milton)은 이 책에서, 거짓과 진리가 ‘사상의 자유시장(open marketplace of ideas)’에서 대결과 경쟁을 벌인다면 필연적으로 진리가 승리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자유나 인권보다 중요한 천부적 인권임을 강조한다. 거짓 의견이라도 시장에서 공개될 기회를 사전 억제하는 것은 진리 확인의 기회를 막기에 악이라는 주장이다.

밀턴은 17C 영국왕정이 ‘출판의 자유’를 철저하게 제한하던 17C 사람이다. 대지주의 딸과 결혼했으나 몇 주만에 결별했다. 당시는 이혼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였다. 밀턴은 깊은 사유 끝에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는 책을 출판했다가 고발당했다. “어떠한 책이나 팸플릿, 신문도 당국의 사전 승인 없이 발행될 수 없다”는 법규를 어긴 것이다.

그는 출판허가제를 극력 반대하며 통박한다, ”무엇보다, 어떤 기준으로 검열관을 뽑는단 말인가?” 그는 주장한다, “온갖 교리 속 진리 역시 자유롭게 존재한다. 진리와 거짓이 서로 맞붙게 하자”면서, “나에게 어떤 자유보다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알고 말하고 주장할 자유를 달라"고-. 밀턴의 주장은 언론의 자유를 주창한 사상최초의 저작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음껏 생각·표현하는 사회

'Hemlock를 마신 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나'-문학평론가 이어령의 이화여대 고별강연 제목이다. 그는 필생의 전공을 넘어, 양자택일의 시대와 싸우며 상상력의 자유를 지켜온 시대의 석학이다. 그는 고별자리에서까지 ‘시대의 석학’다운 주제에 천착했다. Hemlock, 독미나리에서 추출한 독,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마신 그 독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들어, 시대를 초월한 천부적 인권, 그 언론의 자유를 되새기려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고대 아테네에서 특유의 ‘문답법’으로 활발한 사상활동을 펼치다 사형당한 비운의 철학자다. 그를 옭아맨 죄명은 요즘 말로 ‘신성 모독죄’와 ‘청소년 선동죄’ 정도, 그만큼 범죄사실도 뚜렷하지 않다. 그는 죽음을 피할 기회도 많았다. 정치권력의 회유, 배심원의 ‘무죄의견’ 유도, 동료·제자의 도피권유.... 그러나, 이 재판은 결국 소크라테스의 자유론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권리(언론의 자유)를 믿으며 기꺼이 독배를 선택한다. BC 399년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주는 교훈은 위대하다. 민주국가가 한 개인의 의견표현만을 이유로, 그를 사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민주주의의 기막힌 역설이다. 현대 민주국가를 사는 이어령은 되묻는다, “Hemlock는 웃음인가, 눈물인가?”를. 그는 되새긴다, 현대사회는 Hemlock효과의 일률적 흑백논리 대신, 소크라테스 같은 상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해야 하리라고. 그 석학이 강조하는 바는 뚜렷하다. 우리 사회, ‘흑백’이 아닌 ‘그레이 존’을 살려가며 마음껏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자유, 당대 결의에 좌우... 우리, 긴장해야 할 흐름

언론의 자유-기원전부터 소크라테스가 철학으로 믿어왔고, 밀턴이 17C부터 이론적 기반을 주창했던 천부적 인권이다. 오늘날 현대 민주국가가 존립기반의 하나로 삼고 있는 기본적 인권이다. 현대문명의 보루 언론자유의 흐름을 추적하며, 그 시대조류와 맞선 역사를 되새기는 작업은 그리 가볍지 않다. 실상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 역시 언론자유의 경계에서 간단찮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한다, 언론자유의 원칙과 많은 유산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것의 사회적 적용과 타당성 여부, 수용의 정도는 언제나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결의 수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언론자유 침해의 불편한 진실... 관용으로 합의 찾아가야

언론자유에의 세로운 위협, 언론자유 침해의 불편한 진실들은 지금도 선명하다. ‘대한민국 대통령=김정은 수석 대변인’ 논란을 보라. 현장에서 연설을 가로막고, 국가원수 모독죄를 거론하고, 취재기자를 인격적으로 공격한다? 이후 세계 언론계의 논의와 사태 전개는 어떠했나? 언론자유의 몰이해에 바탕한 비문명적 도발의 결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특별법 논란도 그렇다. 이 사건을 부인·비방·왜곡하면 엄히 처벌한다? 이 법안에 대한 학계·시민단체의 우려는 당연하다. 국론분열 방지를 이유로 국가가 국론·진실을 결정하고, 이에 반하는 표현·사상을 처벌한다? 그야말로 이념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남용할 위험이 큰, ‘악마적 시도’일 터이다.

최근 ‘독재자의 후예’·‘남로당의 후예’ 논쟁은 또 어떤가? 한 사건을 보는 눈이 다르면, 그저 ‘◯◯◯의 후예’인가? 정치권은 더러, 자기잣대로 자기신념을 강조하곤 하지만, 역사에의 평가 역시 특정시기의 특정집단이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의견에의 관용을 통해 문명사적 합의를 찾아가는 노력,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다.

맹목적 교리보다 “나, 틀릴 수 있다” 수용적 논쟁 중요

‘관용은 쓰다, 그 열매는 달다’-사상의 자유시장에선 잠시 왜곡·허위가 판칠 수 있어도 결국 진실이 생명력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인간 진보의 역사는 자유 진보의 역사이고, 자유 진보의 역사는 바로 언론자유 진보의 역사이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에서 중세 계몽사상가 볼테르까지, 언론자유의 가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이 계시를 받은 영광스런 진리의 소유자로 자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확실한 것보다는 회의를, 맹목적 교리보다 열린 토론을 선호했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맞을 수 있다는 수용적 논쟁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정신 속에 살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라. 그러나 그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 정신, 한국사회 내부에서 언론자유 위협의 도전이 횡행하는 시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깨우쳐야 할 절실한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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