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⑩]‘훌륭한 사망기사’, 그건 '좋은 사회' 이끄는 언론의 ‘감시자’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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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⑩]‘훌륭한 사망기사’, 그건 '좋은 사회' 이끄는 언론의 ‘감시자’ 역할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7.1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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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어느 역사, 어느 문화에서나, 늘 비슷한 뉴스를 교환해 왔다. 그건 뉴스가 갖는 신비한 일관성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적 충동을 충족시키는 그 일관성이다. 언론의 기본가치를 모색한 명저 <저널리즘의 기본요소>(The Elements of Journalism, 2000) 역시, 뉴스 and/or 저널리즘의 성격을 현장형으로 요약한다.

진실을 추구하라,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다하라, 중요한 것을 흥미롭고 적절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라.... 언론의 사명은 권력감시다. 이른바 언론의 전통적 ‘감시견(watchdog)’ 기능이다. ‘중요한 것의 흥미롭게 전달하기’, 역시 외면 못할 기능이다. 뉴욕타임즈(NYT) CEO 마크 톰슨은 최근 급변하는 시대 속 미디어의 끊임없는 변신을 촉구한다. “이성적 뉴스 뿐 아니라 감성적 부분도 제공해야 한다”고-.

최근 죽음을 전한 보도기사 몇 건을 보며, 언론의 본질적 기능을 되새긴다. 영화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스스로 작성한 부음기사, NYT의 코로나 사망자 사망기사 ‘10만명(One Hundred Thousand)', ’6·25 전쟁 영웅‘ 백선엽과 ’서울시장‘ 박원순의 사망기사를 본다. 그들을 둘러싼 순간의, 또는 끝없는 논쟁을 본다.

이준웅 교수(서울대, 언론정보학)의 최근 미디어 특강(‘부고와 사망기사’)은 ‘사망기사 쓰기’의 좋은 길잡이다. 부고(訃告)와 사망기사는 다르다, 부고는 유력인사의 죽음을 알리는 공시(公示)요, 사망기사는 의미 있는 삶의 궤적을 말하는 서사(敍事)다, 부고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사망기사는 ‘내(기자)가’ 써야 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쓸까” 그 '눈' 의식하며 더 좋은 삶 살기

1. 먼저 이준웅 교수의 사망기사론.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 특강 ‘부고와 사망기사’ 얘기다. 죽음을 대하는 저널리즘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가.

-사망기사를 쓰려면 무엇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잔잔하지만 중요한 기록을 이야기로 풀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공유하려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사망기사를 잘 쓰려면 해당 인물이 사망하기 전 평소에 쓰고 있어야 한다. 한 예로 2011년 NYT가 게재한 헐리우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망 기사, 그것은 2005년 사망한 멜 구소가 쓴 기사였다.

-NYT에는 기자들이 특정인물의 사망기사를 먼저 써놓고 저장해두는 관행이 있다. 좋은 사망기사, 무엇보다 일단 읽을 만해야 한다, 의미 있는 사실들을 나열해야 한다. 인격을 묘사하며, 그 구체적인 삶의 함의를 얘기해야 한다. 특정 인물에 대한 추적, 역사적 자료의 수집, 관련자 인터뷰도 필요하다.

-훌륭한 사망 기사는 그 자체로 '감시자'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고, 누군가 나의 사망기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사회의 여러 인물이 그 눈을 의식해 더 좋은 삶을 살려고 할 것이다. “누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다.

-이 교수는 2년여 전, ‘제대로 쓴 사망기사를 보고 싶다’는 칼럼을 썼다. 그 한 구절, “당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둔 정치부 기자 앞에서 뻔뻔스럽게 정치적 신조를 뒤집는 행동을 하기 어렵다. (...) 꼼꼼하게 관찰하고 맹렬하게 쓰는 자들 앞에서 ‘이야기가 안 되는 삶’을 살기 어렵다.”

모리코네의 ‘셀프 부고’ 화제... 부고는 누구나 쓸 수 있다...

2. "나, 엔니오 모리코네는 죽었다(I, Ennio Morricone, am dead).” 이탈리아 출신 영화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는 자신의 부음을 스스로 썼다. 한쪽짜리 편지다. “언제나 가까웠던 친구들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모든 분들께 제 사망 소식을 전합니다. 모든 분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커다란 사랑을 담아서 작별 인사를 보냅니다....”(NYT·로이터).

모리코네는 세계적 작곡가·지휘자다. 55년간 약 500여 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만든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와 함께 '할리우드 3대 영화음악 거장'으로 꼽히고 있다. <황야의 무법자> <미션> <시네마 천국> 같은 테마음악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인을 사로잡아왔다. 지난 7월 5일 별세, 향년 93세.

엔니오 모리코네, 그 세계적 명성만큼 그의 죽음을 알리며 삶을 평하는 기사는 넘쳐났다(사진;
엔니오 모리코네, 그 세계적 명성만큼 그의 죽음을 알리며 삶을 평하는 기사는 넘쳐났다(사진: CNN 온라인판 캡처).

그 사망기사, 세계 언론에 넘쳐났다. 그럴 터인데도, 모리코네가 셀프 부고장을 쓴 이유, “여러분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고는 누구나, 당사자도, 쓸 수 있다. 부고는 그저,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나 행위인 것이다.

모리코네는 죽음에 이르러 셀프 부고장을 썼다. 부고는 누구나, 당사자도 쓸 수 있는 것이다(사진: 로이터통신 홈피 캡처).
모리코네는 죽음에 이르러 셀프 부고장을 썼다. 부고는 누구나, 당사자도 쓸 수 있는 것이다(사진: 로이터통신 홈피 캡처).

NYT의 ‘10만 명 죽음’... 집념이 빚어낸 기념비적 기사

3. ‘10만 명의 죽음...헤아릴 수 없는 손실': “미국은 코로나 발병의 끔찍한 이정표에 도달했다. 각 수치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100000명의 생명 중 하나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지난 5월 24일(일요판) 뉴욕타임스가 1면에 게재한 전면 사망기사다.

NYT는 코로나 사망자 10만명에 붙여, 그들 10만명의 삶의 요약한 특별 사망기사를 1면부터 4개면에 걸쳐 게재했다(사진; NYT PDF판 캡처).
NYT는 코로나 사망자 10만 명에 붙여, 그들 10만 명의 삶의 요약한 특별 사망기사 ‘10만 명의 죽음...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1면부터 4개면에 걸쳐 게재했다(사진: NYT 홈피 캡처).

“잘 웃는 증조 할머니. 매리언 크루저, 85세, 커클랜드, 위시”, “게슈타포에서 56명의 가족을 구하다. 로미 콘, 91세, 뉴욕”, “독서, 특히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다. 페기 레이크스트로, 72세, 미테슨, 일리노이”-. 단순히 죽은 사람 이름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1줄로 요약했다. 이 기사, 종이신문 1면에만 쓴 것이 아니다. 모두 4개 면이다.

이 사망기사, 코로나로 사망한 10만 명의 ‘스토리’를 실었다. 누구에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친구, 자식이었을 그들, 그 삶을 요약한 것이다. NYT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전국 지역신문의 부고기사-사망기사-유료부고와 페이스북 페이지를 다 뒤졌다. 편집·제작에 21명의 기자, 편집자, SW엔지니어, 학생기자가 힘을 합쳤다.

NYT는 코로나 사망자 10만명의 '스토리'를 찾으며, 그 '귀중한 사람'들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사를 제작했다(사진; NYT 인터넷판 캡처).
NYT는 코로나 사망자 10만 명의 '스토리'를 찾으며, 그 '귀중한 사람'들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사를 제작했다(사진: NYT 인터넷판 캡처).

NYT는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말한다. “10만 명은 적지 않은 숫자다. 이것을 그래프나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했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스토리’만 게재하고 싶었다”고. 이들 사망자의 스토리, 그들이 사망자 대시보드에 나오는 한 숫자가 아니라 귀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One Hundred Thousand'는 NYT의 집념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사다(손재권).

백선엽-박원순의 사망기사, ‘삶의 함의’ 담은 냉정한 기록들

4. ⥀“[단독]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별세…향년 100세”-조선일보의 단독보도다. ‘6·25 영웅’ 백선엽 별세 1시간여 뒤 나온 사망기사다. ‘6.25 전투서 백척간두의 조국 구한 영웅/‘32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라/역대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장 존경한 한국 군인’ 같은 중간제목에, 좋아하는 고사성어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끝으로 장례사항까지 다룬 2800자 분량이다. 기자는 미리 사망기사를 써왔음이 분명하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당시 육군 1사단장(왼쪽)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한 뒤 프랭크 밀번 미군 1군단장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6·25전쟁 영웅' 백선엽 당시 육군 1사단장(왼쪽)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한 뒤 프랭크 밀번 미군 1군단장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시민운동 ‘도덕성’에 상처 남기고 간 박원순” 한국일보의 박원순 사망기사다. ‘추행 의혹' ‘시민사회 기둥’ 과거를 부정한 셈/진보-여성운동 진영 분리 변곡점 될 수도/극단적 선택, 사회에 나쁜 메시지 목소리“, 부제도 만만찮다. 그의 죽음은 큰 충격과 숙제를 남겼다는 것, 그의 비극적 선택을 두고 한국사회 내부 갈등도 분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극단적 선택이 존중 받거나 양해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극단적 선택은 정당한 '책임'을 질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할 뿐더러, 그가 가졌던 정치·사회적 위상에 비춰봐도 온당치 않은 마무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사망기사이면서, 죽은 이의 삶을 냉정하게 평가한, 참 서늘한 기사다. 기자의 곧은 기자정신과 전문적 역량을 읽는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서(사진; 구글 무료이미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서(사진: 구글 무료이미지).

⥀그래서일까. 백선엽·박원순의 삶에 대한 평가는 참 대조적이다. 한쪽은 성공적 삶을 산 자의 ‘빛(추모)’ 지향적(백선엽), 한쪽은 실패한 삶을 마친 자의 ‘어둠(분노)’ 지향적(박원순)이다. 두 사람에 대한 정권의 대응은 극과 극, 언론들의 논조 역시 양 갈레 결이지만, 두 죽음을 보는 일반의 반응을 보라.

백선엽에 대한 국민들의 자발적 추모행렬, 박원순 사후의 사회적 논란들은 대비해 보라. 그저 정권의 의지며, 몇몇의 강압적 목소리로 한 삶의 평가가 자리잡을 순 없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갖는 함의, 그건 ‘사회적 감시’의 결실이다. 일단 언론은 제 몫을 했다. 언론은 그들의 ‘삶의 함의’를 냉엄하게 짚었고, 이후 사태전개 역시 그 우려와 전망대로이니.

‘나의 사망기사’? 자기 삶 논평하기 쉽지 않다...

5. ‘나의 사망기사’-커뮤니케이션북스의 대형기획 시리즈 <한국의 저널리스트>를 펴낼 때의 한 포맷이다. 언론인 저자로 하여금, 자기 책의 머리 부분에 ‘나의 사망기사’를 게재토록 한 것이다. 이 시리즈가 의도한 사망 기사는 장엄함과 엄숙함이 아니라 유머와 위트가 담긴 내용이다. 자신의 언론인 생활을 돌아보며 향후 활동계획까지도 담을 수 있는 기사형식을 취하되, 의외의 스토리와 반전을 기대한 것이다.

우선, 일본 언론원로 와타나베 츠네오의 사례. “까마귀 몰아내려다 떨어져 죽다”-와타나베 츠네오/1926년5월30일, 도쿄 출생. 요미우리신문사 사장, 주필-. “고인은 야생조 애호가다. 그는 야생조의 천적인 까마귀를 몰아내기 위해(...)인간과 다른 동식물에게는 해가 되지 않도록 하면서 까마귀만을 퇴치하는 마지막 수단을 궁리했다. (...)고인은 자택 정원 큰 벚나무에 10m짜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독을 넣은 마요네즈를 가득 넣은 바구니를(...). 그는 사다리 정상에서 다리를 헛딛었고 그 바람에 둔부를 짛어 뇌내출혈. 사고 이후 1시간 후에 사망했다.”

<한국의...> 시리즈를 펴내며 여럿이 ‘나의 사망기사’를 썼다. 안병찬(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당시)은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에서, ‘눈사람 되다’라는 제목으로. “현역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안병찬 박사가 ⥁⥁⥁⥁년 생일날 몽골-알티이산맥 최고봉인 몽하으리한울(해발 4382m) 8부 능선을 넘은 직후 조난하여 불귀의 몸이 되었다(...) 그의 최후 모습은 극적이었다. 눈사람(雪人)이 되어 서 있었다”는 내용이다.

박래부(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는 <분노 없는 시대, 기자의 실존>에서 ‘고향 바닷가 쪽으로 사라지다’를 썼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어려서부터 보았던 황량하고 원초적인 그 갯벌풍경을 자주 보고 싶어 했다.(...) 그는 퇴직 후에도 간혹 언론계의 새로운 지형에 쓸쓸해했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사치와 자유를 누렸고 또한 가족을 사랑했으니, 이 생에 대해 큰 여한을 없었을 것이다.”

글쓴이도 한 때, 이 포맷을 활용한 기획연재를 꿈꾼 적이 있다. 먼저 부산에서 테이프를 자를 분, 권오현 대선배(전 부산일보 사장)를 떠올렸다. 그는 ‘언론인’으로 성공한, 그러나 그저 몇 마디로 평하고 논하기 어려운 시대적 거인(Great Man)이다. 부산일보 사장 재임 때,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있는가”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모두, 제 책무에 걸맞는 자리값·이름값을 다하는지 준엄하게 물어온 직장선배요, 사적으론 결혼식 주례를 맡아 삶의 지표를 일러주신 인생선배이시다.

그러나, 권 대선배께도 이 기획은 너무 무거웠을까. 그는 몇 번 연필을 들어볼 생각을 하면서도 끝내 원고는 주지 않았다. 글쓴 이 역시, <...저널리스트> 비슷한 자서기록을 출간하며, 이 시리즈의 포맷을 두루 원용했다. 그러나, ‘나의 사망기사’는 아예 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특히 자기 삶을 논하고 평한다? 이건 차마 숨 막힐 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 삶’ 평하는 언론으로, 우리 사회 분명 나아질 것

우리는 늘 '진실의 시간'에 직면한다. 한 원로 언론인은 박원순의 죽음에, 고사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을 얘기했다. ‘하늘의 그물망은 성기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더러는 한 망자의 두둔·미화에 바쁘고, 더러는 진영논리에 빠져 ‘2차 가해’를 거듭하며, 더러는 침묵을 선택하지만,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 직전 남긴 유언 같은 말이 있다. “중국에는 '관 뚜껑을 덮고 (그 사람의 시비와 공과를) 평가한다'(盖棺定論)는 옛말이 있다. 나는 아직 관 뚜껑을 덮지 않았지만 금방이다. 어쨌든 공과를 평가하겠지..." 그 '천하의 마오쩌둥'도 죽는 순간 그 ‘삶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렇다, 그 ‘삶의 함의’, 누가 기록하고 평가할 것인가. 역시 ‘좋은 사망기사’는 언론의 역할을 다할 중요영역이다. NYT와 백선엽·박원순의 사망기사에서, ‘타인의 삶을 저울질’하는 기자의 역할-언론의 감시기능을 절감한다. 언론, 늘 사람의 삶을 감시하며 그 함의를 써야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냉정한 ‘감시자’임이 틀림없다. ‘좋은 사망기사’의 힘으로, 우리 사회는 보다 나아질 것이 분명하다. 한국 언론, ‘사망기사’에 보다 각별한 사명감을 느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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