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보도와 국익보도, 그리고 언론-권력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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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도와 국익보도, 그리고 언론-권력의 갈등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19.08.26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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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권력(정부)과 늘 갈등관계인가? 언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그럴 것이다. 민주사회 언론의 존재의의는 권력의 권리남용을 감시·비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 컬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은 저서 ‘신문과 정부의 갈등’에서 단언한다. “기자와 관리는 ‘뉴스’(사건)를 보는 눈이 서로 같을 경우가 드물다”고-. 그는 오랜 현업경험에서 터득한 논리를 들며, 언론의 기능에 대한 관리들의 올바른 인식과 폭넓은 이해를 촉구한다.

언론-권력의 갈등관계는 어떻게 봐야 하나? 민주사회라면, 그 갈등관계를 규율하는 분명한 룰이 있다. 권력은 언론․출판 영역의 어떤 표현을 두고 가치 없다거나 유해하다는 주장으로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표현이 더러 해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시정기능은 사상의 경쟁체제에 의존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언론이 종종 상업적 폐해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국가권력의 남용에 따른 폐해보다 덜하다는 경구도 있다.

 

“국익 앞에서도 보도범위 판단은 결국 언론의 문제”

언론-권력의 갈등을 규율하는 ‘룰’은 어떻게 자리잡았나? 그 뿌리는 미국의 국방부 비밀문서(펜타곤 페이퍼) 보도사건이다. 뉴욕타임즈(NYT)가 그 문서의 존재 및 의미를 특종보도했을 때, 정부가 ‘보도중지’를 강요하며 강경대응하면서 부터다. 이 보도, ‘알 권리’ 대 ‘국가기밀’’의 전형적 갈등구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서냉전 체제가 절정을 이룰 때였으니, 정부가 ‘간첩죄’를 내세운 명분은 그럴 듯 했다.

대법원의 판결을 명쾌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증명 없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 국익을 위한 기밀보호는 신문의 의무이지만, 그 보도범위의 판단은 결국 신문 스스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른 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다.

영화 '더 포스트'(2018,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는 언론과 권력의 갈등, 그 귀결을 극적으로 증언한다(사진; 영화 '더 포스터' 포스터 일부, 영화 홈페이지).
영화 '더 포스트'(2018,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는 언론과 권력의 갈등, 그 귀결을 극적으로 증언한다(사진; 영화 '더 포스터' 포스터 일부, 영화 홈페이지).

영화 ‘더 포스트’(The Post)-세상을 속인 왼벽한 거짓말 세상을 바꾼 위대한 폭로’(2018.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언론과 권력의 갈등, 그 귀결을 극적으로 증언한다. 펜타곤 페이퍼의 주요내용을 폭로한 특종은 NYT가 한 발 앞섰지만, 워싱턴포스트(WP)가 NYT 편에 서서 그 후속기사를 게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WP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발행인에게 말한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 결국 WP는 숱한 위협을 무릅쓰고 보도를 강행한다.

WP는 정부와의 소송에서 승소한다. 대법원 판결의 문맥은 묵중하다. “이 나라의 건국이념에 따르면, 언론은 자유를 보장받고 민주주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언론이 섬기는 것은 국민이지 국민의 통치자가 아니다(The press was to serve the governed, not the governors.)”.

우리의 ‘룰’은 어떤가? 민주체제의 틀을 그대로 수용한다. 언론자유의 헌법상 우월적 지위를 보장하며, 그 규제 조건을 엄격히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판시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기초이기 때문에 특히 ‘우월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취재의 자유와 기밀보호의 충돌을 다룬 법원 판결도 그렇다, “군사비밀 누출이라 하더라도 ‘저명 언론사의 공적 판단과정’을 거쳐 공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 ‘진실’ 대신 ‘국익’ 강요? 불온한 접근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 언론-권력의 갈등은 정상적 궤를 잃고 있다. 최근 ‘권력’이 촉발시킨 ‘애국언론’ 논쟁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한일 갈등에 대한 보도를 둘러싸고, ‘권력’이 ‘매국적’이라고 비난한다? 그 ‘권력’이 앞장서서, ‘국익’과 ‘이적(利敵)’의 이분법적 선동에 몰두한다? 그건 언론의 공정성·객관성에 대한 비평·논쟁이 아닌, 논조에 대한 이념적 논란일 따름이다. 권력을 감시·비판해야 할 언론에, ‘진실보도’ 대신 ‘국익보도’의 잣대를 강요한다? 이건 언론자유의 근본을 해칠 불온한 접근이다.

이 부분, “그(조국)의 페북 글은 논리적 허점 많고 감정적 선동에 몰두할 뿐”이라는 진보학자의 표현, “정권에 충성하면 ‘애국’, 정당한 비판을 하면 ‘이적’인가”라는 야당의 반박이 있다. 이건 권력-언론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권력이 국익 판단을 독점하려는 오만일 따름이다. 이 논란은 권력이 주도하고 일부 시민단체가 확산하는 모양새다. 신문의 논조를 들어 ‘국론분열’을 들먹이며 폐간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이념적 논란은 참 불순하다.

그럼 ‘국익보도’인가, ‘진실보도’인가? 일본의 진보적 권위지 ‘아사히신문’은 최근 한일갈등에 붙여 대형 통사설을 게재했다. 제목은 '일본과 한국을 생각한다-차세대에 넘겨줄 호혜관계 유지를'. 사설은 “일본은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한국은 위안부 합의를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과거 반성에 소극적인 아베를 나무라며 (종래 고노·나오토 담화에 걸맞는)한반도 관련 역사인식을 다시 밝힐 것을 촉구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정부)의 ‘국익’에 맞는가?

영국 공영방송 BBC의 ‘포클랜드 전쟁’ 보도를 보라. BBC는 이 보도에서 ‘애국적 보도’에 침몰하지 않았다. 전쟁 내내 ‘보도의 객관성’을 중시하며 팩트 전달 위주 보도에 천착했다. 대처 수상은 당시, BBC가 ‘이적 행위’를 한다고 화를 내며 국유화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보도는 (권력의)‘국익’에 맞는가? 아마도, 오늘, 우리 권력 앞에서, 아사히의 사설, BBC의 보도가 있다면, 그들 역시 ‘이적’·‘매국’ 논란 앞에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언론의 길? 본질의 원칙·기본에 충실한 ‘진실보도’

언론이 가야 할 길? 논란의 여지도 없다. 언론은 언론으로 존재하는 한 그 본질의 원칙과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정권유지를 위해 ‘국익’, 또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통제해 온 역사를 재현할 순 없다. ‘국익보도’는 ‘진실보도’에 바탕할 때만 ‘국익’의 가치를 갖는 것, 그것이 언론의 역할이고 올바른 민주주의로 가는 실크로드다(박종인, 국익과 진실보도).

이제 우리 권력도 언론의 존재가치를 좀 이해했으면 좋겠다. 현안에의 인식이 다양할수록 언론의 공론형성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 언론은 정부를 비판하며 국익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이런 평범한 이치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한 ‘권력’, 그는 ‘적법’, ‘법절차’를 강조하는 그 형법학자다운 명분을 넘어, 언론자유의 헌법적 작동원리도 좀 깨우쳤으면 좋겠다. 그의 확증편향적 논리는 언론에의 건전한 인식도 아닐뿐더러, 언론자유의 영역을 침해하는 불의(不義)에 가깝다.

오늘도 권력은 법무장관 후보자의 진실을 찾기 위한 보도를 '수구언론의 가짜뉴스'로 매질한다. 그 권력에 전할 바는 역사  속의 명언·경구가 아니다. 그저, 언론의 자유는 그를 선구적으로 인정한 서구의 역사가 말하듯, 언론에게는 특권이 아니라 사명이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보다 확실한 것은, 권력이 언론을 매질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시들 것이며, 언론이 권력을 매질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꽃피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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