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⑫]기자의 타락, 언론윤리의 실종, 저널리즘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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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 ⑫]기자의 타락, 언론윤리의 실종, 저널리즘의 붕괴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20.08.0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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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자들이 끝없이 타락하고 있다. 그저 직업윤리를 잊고 언론의 품격을 잃는 일탈을 넘어, 저널리즘의 기본을 잃고 진영논리·왜곡보도에 탐닉(耽溺)하며 저널리즘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다. 저널리즘이 무너진 언론 환경에서, 기자는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한국 언론의 위기는 날로 급박하다. 언론환경의 격변에 따른 산업적 위기를 넘어, 언론지형의 급변에 따른 언론소비 형태의 변화까지, 그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지 오래다. 그 뿐인가. 한국 언론은 최근 권력의 언론자유 침해책동에 시나브로 시달리며, 내부-외부-권력의 ‘삼각파도’에 휩쓸린 국면이다.

기자들이 언론윤리를 망각하며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다. 스스로 저널리즘의 기본을 배반하며 언론의 존립바탕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 기자들이, 언론의 존립바탕이라 할 진실·공정을 추구하지 못한다? 민주국가의 존립을 위한 권력감시·여론형성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 그런 언론,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기레기’, 저널리즘의 수준을 떨어뜨리며 기자의 전문성이 취약한 사람·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기레기’가 유행한지도 오래, 이젠 ‘기더기(기레기+구더기)’라는 속어도 생겨났다. 언론의 바탕 위에서 언론을 욕보이는 그 ‘기레기’들이, 우리를 참 슬프게 한다.

기자의 관청자료 무단 촬영·출력, 그건 범법행위

1. 조선일보 기자가 서울시청 간부 방에 무단침입, 자료를 촬영하다 적발됐다. 서울시는 그를 건조물 침입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서울시청 기자단은 조선일보를 제명했다. 기자단 속에선, 그 기자가 기자단의 명예와 신뢰·품위를 자주 손상시켰으며, 한편으론 서울시가 그 사례를 이유로 기자취재를 제한해선 안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국민).

벌써 20여년전 일이다. 국민일보 기자가 검사실 PC에서 수사기록을 무단출력하다 구속됐다. 죄명은 건조물 침입+절도미수. 언론계 반응은 착잡 자체였다. ‘취재방법에 다소 문제’, ‘단 국민 알 권리 충족 위해 기자본분에 충실하려 한 충정’.... 기자가 곧 풀려나긴 했다. 신문윤리실천요강은 관련 취재준칙을 두고 있다.

“기자는... 문서, 자료, 컴퓨터 등 전자정보를 소유자 승인 없이 검색하거나 반출해서는 안된다. 다만 공익을 위해 부득이한 경우 예외로 정당화될 수 있다.“ 기자는 이 언론윤리를 넘어, 법을 어긴 것이다. 문제는 이 기자가 명문대 언론학과를 졸업하며 언론윤리를 익히지 못했고, 입사 후에도 실제 상황에의 적용기준을 배운 바 없었다는 것이다.

기자의 취재원 통화 녹취, 그 기만적 취재의 윤리문제

2. 최근 폭발적 이슈, ‘채널A 기자 검언유착 의혹’ 사건도 그렇다. 이 의혹의 진실은 따로 따지더라도, 이 기자는 최근 수년간 취재원과의 대화·전화통화를 거의 녹음했다. 사건 수사과정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그 녹취파일 얘기다. 요즘 젊은 기자 중에는 녹음을 습관 삼은 기자가 꽤 있다곤 하나, 역시, 개운챦다. 기만적 취재 문제 때문이다.

최근 탐사보도나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이 늘어나며 은폐적 취재행위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만적 행위의 윤리문제는 어떻게 하나. 공익의 이름으로 언론의 인권유린을 방치할 수 있나. 사회생활의 기본규칙 위배, 인간적 존재에의 부정, 신뢰에의 배반..., 이건 법의 책임을 논하기에 앞서, 윤리의 면에서 따져야 할 문제다.

언론윤리 측면에서, 기만적 취재의 허용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그 때문이다. 은폐적 취재의 남용은 결국 시민의 분노를 사며, 언론자유에의 사회적 기반을 허무는 행위다. 기자, 좀 분발하라. 정상적 취재방법으로도, 열정과 집념으로 이룬 훌륭한 보도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결국, 언론윤리의 중요성이다. 기자의 취재보도행위는 끊임없는 직업윤리의 반영·결정 과정이다. 기자는 현장에서 숱한 윤리문제와 직면한다. 이해의 상충, 명예훼손, 프라이버시 침해, 편파왜곡 보도, 비정상적 취재방식.... 일부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의 독립성․자율성 차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언론의 존립기반을 약화시키고, 타율적 개입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채널A 기자 검언유착 의혹’ 오보, ‘편향보도’의 전형

3. 최근 정국과 언론계를 달구고 있는 KBS·MBC의 '채널A기자 검언유착 의혹 오보‘사례를 보라. KBS는 “채널A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공모 정황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기자와 검사장 측이 녹취록을 공개하며 기사내용을 정면 반박했다. KBS는 하루만에, “기사 일부에서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단정적으로 표현했다”며 오보임을 인정하고 사과방송을 했다. KBS 공영노조는 "정권의 나팔수, 굴욕적 셀프 항복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이 보도는 ‘제3자의 허위정보에 의한 것’이라는 검찰고발도 뒤따랐다. KBS 오보내용은 검언유착 사건 수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허위사실을 보도해 여론을 조작, 수사개입을 시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KBS가 ‘제3의 인물’이 말한 허위내용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내보냈다? ‘검언유착’ 프레임이 채널A에서 KBS로 옮겨붙은 모양새다.

KBS의 ‘채널A 기자 검언유착 의혹’ 보도는 진실추구 대신 외부 입김에 기운 불공정 편향보도의 한 전형이다(사진; KBS의 오보 사과방송 장면, KBS 화면 캡처).
KBS의 ‘채널A 기자 검언유착 의혹’ 보도는 진실추구 대신 외부 입김에 기운 불공정 편향보도의 한 전형이다(사진; KBS의 오보 사과방송 장면, KBS 화면 캡처).

우선 KBS가 1보를 하루만에 ‘오보’로 인정하고 사과한 부분. 그 오보의 발생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이 보도, 전개과정을 보면, 저널리즘의 기본을 외면한, ‘불공정 보도’ 영역의 ‘편향보도’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 보도, 진실을 추구하거나 검증에 천착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저, 어떤 이유에서건 저널리즘적 취재보다 외부의 입김에 기울고 만 ‘기레기’적 보도다.

진실·공정 추구할 검증, 저널리즘과 ‘픽션’의 차이

4. 저널리즘의 기본은 무엇인가? <저널리즘의 기본요소(The Elements of Journalism,빌 코바치·탐 로젠스틸, 2000>는 그 기본요소 9가지를 취재현장의 논리로 말한다.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추구다, 저널리즘은 그 누구보다 시민에게 충실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검증의 규율(discipline of verification)에 있다, 저널리즘 종사자는 취재대상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기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실의 올바른 포착”이다.  언론은 초기 저널리즘 이래로, 늘 진실성·정확성의 원칙을 중시했다. 오죽하면 그 뜨거웠던 황색 저널리즘 시대에, 뉴욕 헤럴드(NY Herald)의 랜돌프 허스트는 ‘뉴욕에서 가장 진실한 신문’, 뉴욕 선;(NY Sun)의 조셉 퓰리처는 ‘정확성, 정확성, 정확성’을 모토로 내세웠겠나.

진실성·공정성의 키는, 검증의 규율에 있다. BC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수스 전쟁> 서문에서 ‘기사 작성법’ 같은 룰을 제시했다. “나는 자신의 일방적 인상에 이끌려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묘사한 사건이나 목격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가능한 한 철저히 점검하며 사건의 현장에도 직접 가 보았다...” 이 검증의 규율, 저널리즘과 오락, 선전, 픽션과의 차이이다. 그 핵심개념은 ‘절대로 조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 언론 역사에도 검증의 규율은 찬란하다. ‘한국 최초의 현장탐사 기사’ 김동성의 “나는 민영환의 혈죽(血竹)을 직접 보았다"를 보라. 그는 미국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소년 시절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언론인이 되려 결심했다.

기자 천성을 타고났던가. 16세 때인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붉은 대나무가 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직접 확인하려 혼자 개성에서 서울 현장까지 찾아갔다. 현장 검증 끝에, ‘민영환 자택 혈죽 탐방기’를 썼다.

“…민충정공 사저는 안국동에 있었다. 사저 누마루 밑에서 과연 혈죽이 생겨 누마루 천정까지 닿게 자랐다. 방안에 있는 혈죽에 물을 주지 아니한 관계인지 내가 보던 때는 청죽(靑竹)이 아니라 누렇게 죽었다. 그러나 대나무 형체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기적을 나는 목도했다. 보통 상식으로, 근대 과학으로 도저히 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민충정공의 일편단심을 혈죽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상할 수밖에 없다. 고려 말 정몽주의 선죽도 전설의 재판으로 민충정공의 혈죽이 생장했고, 나는 내 눈을 의심치 않는 한 분명히 배관했다.”

저널리즘 본질적 위기는 정파성 따른 거짓·왜곡 보도

5. 다음, 언론의 공정성 문제. 저널리즘의 기본, 정확성·공정성 중 하나다. 생각해 보라, 보도내용이 진실·공정하지 못하다면 누가 그 보도를 신뢰하겠나? 언론윤리 영역에선, 누구나 ‘공정성’임벼 정의의 원칙을 강조한다. 그럼, 진실-공정은 확고부동한 개념인가? 그게 쉽지 않다. 다만, 기자는 기사 작성 때 스스로 물어야 한다, “기자의 책임 앞에 만족한가?

한국 저널리즘의 본질적 위기는 정파성 and/or 진영논리다. 언론이 정파적 입장에서 보도대상을 선택적으로 포함·배제하는 제작관행이다. 언론의 정파성, 그 자체가 나쁜가? 언론의 이상적 모습이 중립성이 아닌 이상, 정파성 자체를 문제 삼을 순 없다(공영방송은 예외다). 어차피 ‘중립성’에 허구가 있다면 정파적 다수 언론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정당하지 못한 정파성’(불공정성)이다. ‘정당한 정파성’은 여러 사회구조며 공공사안에 일관된 입장·태도를 나타낸다. ‘정당하지 못한 정파성’,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거스르는 문제다. 사안을 이해할 기본적 사실·사실관계를, 정파적 경향성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제시(거짓)하거나, 인과관계를 다르게 제시(왜곡)하는 경우다. ‘공정 보도’=편들지 않는 보도, ‘편향 보도’=편드는 보도인 것이다. 공정보도의 세계적 명성 BBC는 선명한 경구를 갖고 있다, “우리는 편들지 않는다(We don't take a side)”

한국 언론의 본질적 위기는 정파성에 기운 편향보도다. ‘편드는 보도’인 것이다. 공정보도의 대명사 BBC는 ‘우리는 편들지 않는다’는 경구를 갖고 있다(BBC 상징 이미지, 구글 무료 이미지).
한국 언론의 본질적 위기는 정파성에 기운 편향보도다. ‘편드는 보도’인 것이다. 공정보도의 대명사 BBC는 ‘우리는 편들지 않는다’는 경구를 갖고 있다(BBC 상징 이미지, 구글 무료 이미지).

정의·공정·윤리 붕괴 앞에 진영논리 탐닉? ‘기레기’로 남겠다?

오늘, 기자의 타락은 어디까지인가. 더러 ‘불공정 보도’를 남발하며 작은 자성도 없다. 연전, 한국사회의 진영논리와 국민갈등을 극대화한 ‘조국 보도’에서, 언론은 더러 언론의 기능을 외면하다 언론의 신뢰를 상실했다. 그래도 그 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친정부·여당 성향을 보여온 매체에서도 노골적 권력 감싸기 보도에 대한 자성은 있었다(차용범, 한국언론과 '조국 보도’, 공정성, 진영논리, To be or Not to be).

지금, 일부 언론은 강고한 진영논리에 탐닉하며, 작은 자성도 없이, 저널리즘의 사멸을 부추기고 있다. 국민갈등의 블랙홀, 그 권력의 폭주와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권력을 감시하며 시민에게 충실할 그 기본을 팽개치며 한없이 타락하는 것이다. 언론이 사멸하면, 기자는 정말 무슨 소용이랴.

기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 한국 사회를 추동해온 한국 언론의 면면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기자, 오늘의 위기 앞에서 정말, 속절없이 무너질 것인가? 저널리즘의 경계 밖에서 진영논리를 대변하며 자멸할 것인가? 기자, ‘기자’로 살면 ‘기자’로 남을 것이고, ‘기레기’로 살면 ‘기레기’로 남을 것이다. 기자, 정녕 그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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