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범 칼럼] 이 시대의 ‘이대남’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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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 이 시대의 ‘이대남’을 기억하며
  • CIVIC뉴스 칼럼니스트 차용범
  • 승인 2021.05.0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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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권력은 참패했다. 국민은 권력의 광기와 폭정을 분노투표로 엄중하게 심판했다. 서울시장·부산시장 보선 결과, 그건 정치적 해일(海溢)이라 할 만하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대남(20대 남성)’의 유례없는 쏠림현상이다. ‘이대남’은 야당 서울시장 후보에게 72.5%(여당 22.2%)의 몰표를 던지며, 권력을 확실하게 비토(veto)했다. ‘이대남 현상’, 시대를 대변하는 역사적 상징어다.

그래서인가? 권력은 보선 참패를 ‘언론 탓’ ‘검찰 탓’에, ‘청년 탓’으로 돌린다. 국민은 권력의 ‘내 탓’에 바탕한 반성·쇄신을 기대하나, 권력은 특유의 ‘남 탓’을 앞세우며 오만·독선을 고집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질책을 엄중히 받아들인다”면서도, 그 질책에 부응할 어떠한 반성이며 정책 전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여당의 새 대표와 원내대표 역시 ‘언론개혁’, ‘검찰개혁’을 공언하지 않나.

사진)서울시장 보선에서, 야당 오세훈 후보는 여당 박영선 후보에게 25개 구에서 25:0으로 완승했다. 역사에 없는 정치적 해일이다(그림; 구글 이미지).
서울시장 보선에서, 야당 오세훈 후보는 여당 박영선 후보에게 25개 구에서 25:0으로 완승했다. 역사에 없는 정치적 해일이다(그림: 구글 이미지).
서울시장 보선에서 20대 남성(이대남)은 야당 후보에게 72.5% 몰표를 던지며, 권력을 확실하게 비토했다(그림; 구글 이미지).
서울시장 보선에서, 20대 남성(이대남)은 야당 후보에게 72.5% 몰표를 던지며, 권력을 확실하게 비토했다(그림: 구글 이미지).

보선 참패는 청년 탓이다? ‘20대 보수화’ 프레임이다. 권력을 지지하다 1년 만에 비토한 것, 그 거대한 민심 이반을 한낱 편 가르기식 갈등으로 치환한 ‘진보’의 단골 수사(修辭)다.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아서···” 같은 천박한 인식을 보라. ‘진보’의 미명 아래 드러난 권력의 무능·위선과 공정·정의에의 배신을 보면, 젊은 층의 반(反)진보 현상은 당연하기도 하리.

대선 전 보선을 겨눈 권력의 ‘쇼’는 끝났다. 그 투표의 참혹한 결과에도 그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선거 전 ‘쇼’ 역시 ‘쇼’일 뿐, 선거 후 독선·오만에 기댄 ‘마이웨이’는 꾸준할 것이다. 그럴수록, 젊은 층은 더 분노해야 한다. ‘좋은 권력을 도모할 수는 없어도 나쁜 권력을 심판할 수는 있다’, 그건 유권자가 두루 기억할 확실한 명제다.


1. 국민들은 왜, 분노투표로 권력을 응징했나?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권력의 오만·독선에 뿌리한 무능·실정(失政) 때문이다. 대통령은 취임 때의 약속에서 두루 실패했다. 그는 ‘과거와의 전쟁’에 매달리며 국민통합을 포기했다. ‘문로남불’ 진영논리에 탐닉하며 평등-공정-정의의 가치를 외면했다. 실정(失政)을 거듭하며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이즘의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 지지도 29%, 특히 10·20대는 21%다(한국갤럽).

난세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존재이유며 권력의 책임윤리를 묻는다. 이즘의 국가적 혼란은 권력의 무능·실정과 무책임·부도덕 탓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선택적 신념-도덕-정의와 함께 ‘그들만의 나라’를 추구하는 분열의 정치, 절대권력에의 집요한 의지와 민주주의 훼손까지. 권력은 ‘권력의 패러독스’에 중독, 공감능력과 자기절제를 상실했다.

대통령이 말한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과 ‘기회의 평등-과정의 공정-결과의 정의’는 실패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 특권과 반칙의 세상은 이미 일상적 적폐다. 그 권력은 국민의 신뢰를 잃고, 나라의 혼란을 자초한다. 나라의 초라함과 국민의 불행은 또 어떤가. 이 정부의 집권 4년은 광기와 폭정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허민).


2. ‘이대남’은 왜, 해일처럼 권력을 비토했나? 근본적 요인은 '공정성'의 훼손이다. 권력을 쥔 진보좌파는 말로만 공정을 외치며 행동은 ‘우리 편’ 정치에 침몰했다. ‘법의 지배’를 악용한 민주주의 파괴, ‘선출된 권력’의 입법농단, 서울·부산 권력형 성범죄 사건 뒤의 위선 역시 ‘우리 편’ 정치의 귀결이다. 그건 ‘이대남’이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정치행태다.

언론은 분석한다. ‘이대남 현상’을 그들의 보수화나 야당 지지 확대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이 정부 4년 동안 불거진 온갖 불공정에 반발하며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켜 달라’고 외치는 호소라는 것이다. 그들은 민족·민중 같은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은 실용주의·합리주의 세대라는 것, 편 가르기 속의 ‘내로남불’에 침몰한 권력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586 정치계급과 평범한 청년 자유주의의 충돌’-평범한 청년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개인의 자유며 공정한 기회, 법 앞의 평등을 외면하는 권력을 용인하기 어려웠다. '민주화운동 세대'는 권력을 장악한 지난 수년 동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과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쏟아냈다. 그 속에서 청년들은 공정규칙을 훼손·방치하는 권력의 타락을 직시했다. 청년들은 586의 ‘내로남불’ 행태를 강하게 응징한 것이다(장훈).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역시 “(국가의 존립근거라 할)공정·정의의 가치를 앞장서서 파괴해 온 권력의 행태가 젊은 세대의 분노를 키운 것”이라며, “20대는 경쟁의 결과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되, 경쟁의 출발·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되는 것에는 강하게 반발한다”고 분석한다. 입시와 병역에서 조국·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특혜의혹,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따른 ‘그들만의 잔치’, 그런 사례 아니겠나.

오죽하면 미국 <NYT>는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전하며, '내로남불'이라는 속어를 썼겠나. 신문은 “한국 국민은 문재인 정부와 진보진영의 위선적 행태에 냉소를 표출했다”면서, “한국에서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naeronambul)’이란 표현을 쓴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세계 속 단어다.


3. ‘이대남’은 또, 무엇을 걱정했나? ‘이대남’은 공정성 훼손에의 분노와 함께, 청년 정책의 실패와 무능을 한탄했다. 권력의 독선·무능 끝에 청년세대의 생존기반을 무너뜨렸다는 인식이다. 젊은 층의 미래 관심사가 뭐겠나? 교육, 취업, 결혼, 주택 마련···, 정부는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청년층의 시각으론, 취업, 결혼, 집 장만까지, 제대로 이룰 수 있는 게 없다.

정부가 밀어붙인 최저임금 상승과 정규직 전환의 결과는 뭔가? 청년 일자리 소멸과 ‘그들만의 잔치’다. 일자리 정책의 성과는 뭔가? 세금으로 만든 노년층 공공 일자리다. 코로나19 속 청년들의 일상은 어떤가? 유례없는 취업난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고립감, 그건 절망이다. 한때 ‘다이내믹 코리아’를 연호하던 한국 경제의 침몰, ‘잃어버린 세대’에의 위기···, 그들이 느끼는 패닉상황이다.

‘대통령 앞에서 울어버린 청년’-엄창환(오른쪽)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가 청와대 초청 간담회에서 "정권이 바뀌었는데 청년정책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엄 대표의 발언을 듣는 문재인 대통령(사진; 구글 이미지).
‘대통령 앞에서 울어버린 청년’-엄창환(오른쪽)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가 청와대 초청 간담회에서 "정권이 바뀌었는데 청년정책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엄 대표의 발언을 듣는 문재인 대통령(사진: 구글 이미지).

실상, 권력은 과연 미래세대를 걱정했나? 지난 4년 권력이 집중한 것은 적폐청산, 일제잔재 처리, 검찰개혁 같은 ‘과거’다. 4차 산업혁명, 일자리, 한국판 뉴딜계획···, 한때 떠들던 그 ‘미래’는 어디로 갔나? 그 권력의 독선·위선과 무능·무책임에, 공정을 무너뜨린 결과가 ‘오늘’이다. 지난 4년여 분별없이 쌓아온 그 엄청난 국가부채는 또 누구에게 떠맡길 참인가.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58% 이상은 울분 상태에 있다. 그 주요인은 정치정당의 부도덕·부패, 정부의 비리·은폐, 언론의 침묵·편파보도 등이다(서울대 유명순 교수팀). 20대의 우울감은 전문가 상담권고 기준을 웃돌고 환자 수는 60대를 추월했다(유니언센터).

그 우울, 많은 부분, 권력 책임이다. 결국 청년들은 권력의 무능·부도덕에 따른 현재의 울분과 미래의 걱정을 투표로 응징했다. 참 가슴  아프고도  두려운 미래세대의 분노일  터다.


4. ‘이대남’은 언제까지, 분노해야 하나? 보궐선거를 겨냥한 권력의 ‘쇼’는 끝났다. 되돌아보라. 권력의 무능·위선과 내로남불을 한탄하는 국민 앞에, 권력이 벌인 그 너절한 ‘쇼’들을. 오만·독선의 끝을 달리던 권력의 돌연한 변신이다. 대통령은 이제까지 국가·국민의 운명을 가름할 정책실패 앞에서 한 번도 오류를 인정한 적이 없다. 그가 “분노와 질책을 엄중하게 받아들인다”며 사과하고, ‘서해의 날’ 행사며 ‘상공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여당 수뇌부는 아예, 바짝 엎드렸다. 선대위원장은 “국민의 화가 풀릴 때까지 반성하겠다”며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했다. 당 대표는 “내로남불 자세 혁파”를 다짐했다. 교육부 장관은 1년 이상 깔아뭉개던 조국 전 장관 딸의 입학취소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반성 모드는 진정성 없는 전술적 후퇴였을 뿐이다.

오늘, 권력은 어떤가. 본색 그대로다. “‘막말·오만·폭주’ 장본인이 대표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정권”-한 언론의 직설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과거 조국 사태 때 여러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청와대는 그때마다 ‘그럴 리 없다’며 귀를 닫아버렸다”-여권에 정치적 조언을 해왔던 안병진 경희대 교수의 한탄이다.

여당은 어떤가. 초선의원들은 반성과 사과를 담은 입장문을 냈다⇨그중 2030 의원 5명은, “당의 착각과 오판이 있었다”고 사과했다⇨강성친문(문파)들은 이들을 “배신자”라고 몰아세웠다⇨‘반성과 혁신’ 논의는 ‘조국 사태 성찰’과 ‘친문 후퇴론’ 앞에서 좌초했다. ‘혁신의 대상’이 도리어 ‘혁신의 주체’로 나서는 해괴한 양상이다.

그들은 국민의 비토를 받고도 참패의 원인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적 참패의 원인을 언론-검찰-청년에게 돌릴 정도이니 무슨 말을 더하나. 그렇다. 여당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념과 과거에 갇혀 생각이 끊긴’ 그런 정당(최진석)의 앞날, 과연 얼마나 달라지겠나. 이번 역대급 참패에서 진보 몰락의 전조를 읽는 이도 적지 않다.


5. 그래서, ‘이대남’의 분노는 계속되어야 한다. ‘조국 사태’ 때부터 끓어오른 불공정에의 분노다. 그 분노, 청년 세대의 삶을 위협하는 무능·위선 앞에 날로 폭발력을 키워가고 있다. 그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압승한 야당 역시 권력의 독선·오만, 무능·무책임에 반사이익을 얻었을 뿐, 청년 세대의 분노를 정확히 읽고 대처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에 무심하다.

그럴수록, ‘이대남’의 분노는 ‘현재진행형’을 넘어서야 한다. 권력의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혼란도 깨우쳐야 한다. 오늘, 투명하고 깨끗한 세대, 그 청년층은 더 이상 ‘정치에 무관한 사람(idiote)', 곧 ’얼간이(idiot)일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독선·오만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무능·무책임으로 국민의 존립을 위협하는, 나쁜 정치를 배격해가야 한다.

그 ‘이대남’은 서울만의 현상도 아니다. 최근 20대의 대통령 부정평가는 71.1%, 노인보다 높은 수치다(리얼미터). ‘이대남’은 ‘이대녀’와 함께, 2030세대로 두터워질 것이다. 그들은 과거와 이념에 빠진 5060의 무능과 내로남불 대신, 민주주의에 충실한 정치인, 2030세대가 성실하게 일만 하고도 먹고 살 수 있게 할 유능한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좋은 권력을 도모할 수는 없어도···’의 소극적 명제도 뛰어넘어야 한다. 이젠 나쁜 권력을 심판하는 것을 넘어, 좋은 권력을 분별 있게 도모해가야 한다. 그때까지, 2030의 분노는 쭈욱,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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