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발렌베리는 삼성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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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발렌베리는 삼성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까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19.12.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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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편집주간

Esse Non Videri.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군의 특수부대나 비밀정보기관의 모토가 아니다. 스웨덴 최대 기업 발렌베리(Wallenberg) 그룹을 이끄는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방식이다. 경영방식만 보고 발렌베리 가문이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에다 탐욕스럽고 음험한 집안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는 거대기업집단이다. 발렌베리 그룹 아래 100여 개 기업이 있다. 한국 소비자들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기업들이다.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가전기업 일렉트로룩스, 북유럽 최대 발전설비 엔지니어링회사 ABB, 자동차를 생산했던 방위사업체 사브, 덤프트럭 버스 등을 생산하는 중장비업체 스카니아, 세계적인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 스웨덴 최대은행 SEB, 국적 항공사 스칸디나비아항공(SAS) 등이다. 발렌베리 그룹 종사자는 스웨덴 노동자의 30%를 차지한다. 한국으로 치면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을 합친 규모라고 보면 될 듯하다.

스웨덴 GDP의 3분의 1 차지하면서도 국민 사랑 독차지하는 발렌베리 그룹

스웨덴을 쥐락펴락 하는 기업집단이다 보니 스웨덴 국민들의 반감과 눈총을 살 만도 한 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스웨덴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스웨덴 국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발렌베리 그룹의 그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인데 어떻게 국민기업 칭송을 받게 된 걸까.

발렌베리 그룹은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인 1856년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에 의해 태동했다. 그가 해군 장교로 제대한 뒤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을 창업한 것이 시작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창업자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래 현재까지 5대에 걸쳐 자손들이 경영권을 이어가는 전형적인 세습기업이다.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 졸업, 해군 장교 복무 등 조건 통과해야 발렌베리 후계자 돼

발렌베리 그룹이 5대째 대대손손 경영권을 이어가면서도 존경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CEO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을 정해놓고 있다. 첫째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라. 둘째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학을 졸업하라. 셋째 해외 유학을 마쳐라. 넷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라 등이다.

이런 기본 요구조건을 충족한 뒤에도 후손들은 뉴욕 런던 등 세계적 금융 중심지에 진출해 실무경험을 쌓고 국제경제의 흐름을 익혀야 한다. 최소 10년 이상 검증과정을 거쳐 후손 중에서 발렌베리 그룹의 후계자가 선정된다.

발렌베리 그룹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은행인 SEB 두 개 회사를 축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5대 후계자인 마르쿠스 발렌베리(63) SEB 회장과 사촌인 야콥 발렌베리(63) 인베스터AB 회장 역시 CEO가 되기 위한 혹독한 검증을 통과했다. 그룹 경영의 축을 둘로 나눈 것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란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발렌베리의 가훈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

발렌베리 가문의 핏속에 흐르는 전통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어릴 때부터 특권보다는 의무를 가르친다. 남들 앞에 부를 과시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 한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가문의 모토가 그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에 있던 유대인 수 만 명의 목숨을 구해 ‘스웨덴판 쉰들러’로 불리는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다. 1912년 태어난 라울 발렌베리는 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있으면서 유대인 2만 명에게 스웨덴 비자를 발급해 나치로부터 구해냈다.

나치는 발렌베리가 눈엣가시였지만 막강한 발렌베리 가문 출신인데다 외교관 신분이어서 어쩌지를 못했다. 2차대전 종전 무렵인 1945년 초 발렌베리는 소련군에 체포된 뒤 실종됐다. 소련은 오랜 기간 발뺌을 하다가 1957년에야 발렌베리가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의해 살해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업을 키우고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기업이 사회에 진정한 선한 기여를 하는 것’이라는 스웨덴 격언이 있다. 발렌베리 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발렌베리 그룹의 전체 수익은 발렌베리 재단으로 일단 들어온다. 이 중 20%는 재단 내부에 투자되지만 80%는 각종 과학연구나 교육사업에 다시 지출되는 선순환구조를 갖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이를 ‘랑스강넬릭트(Landsgagneligt)’라고 부른다. ‘스웨덴을 위한 향상’이라는 말이다.

발렌베리 가문 사람들의 삶은 검소하고 소박하다. 각자 재직하는 기업과 재단에서 급료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다. 재단의 돈에 누구도 손을 댈 수가 없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최대 기업이지만 이 가문의 사람들이 세계 1000대 부자는 물론 스웨덴 100대 부자 명단에 들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 더 팩트 이선화 기자, 더 팩트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 더 팩트 이선화 기자, 더 팩트 제공).

법인세 85% 내는 대신 경영권 인정받은 ‘살트셰바덴협약’ 정신이 스웨덴 경제 살려

발렌베리 그룹의 독특한 경영방침은 발렌베리 가문의 독특한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1938년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스웨덴은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스웨덴경영자연합(SAF)과 노총에 해당하는 스웨덴노동조합(LO), 그리고 정부 3자 간에 ‘노사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협상이 이뤄진 휴양지 지명을 딴 ‘살트셰바덴협약(Saltsjobaden Agreement)이다. 핵심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해 오너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다. 오너에게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보장하는 대신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한다는 합의다. ’차등의결권 제도‘는 오너 일가의 주식에 한해 일반 주식의 최대 1000배(현재는 최대 10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살트셰바덴협약이 모든 기업에 강제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 기업이 선택할 수 있다. 북유럽으로 확산된 이 제도는 스웨덴 상장 기업의 55%, 핀란드 상장기업의 36%, 덴마크 상장기업의 33%가 실시하고 있다. ‘황금주’라고 불리는 차등의결권 제도 덕분에 발렌베리 오너 일가는 지주회사의 지분을 5.3%만 갖고도 21.5%의 의결권을 행사하면서 경영권을 5대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살트셰바덴협약 덕분에 스웨덴은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뤄졌고, 최고 85%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세금으로 노동자와 빈곤층의 사회보장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사회복지와 경제성장’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스웨덴이 북유럽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이자 보편적 복지의 롤모델이 된 데에는 노사정 대타협인 ‘살트셰바덴협약’ 덕이 크다.

17년째 이어진 삼성과 발렌베리 그룹의 인연이 삼성 지배구조에 영향 미칠까

발렌베리 그룹을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발렌베리와 삼성의 관계 때문이다. 최근 발렌베리 가문의 5대 후계자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이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와 함께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 기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발렌베리 회장과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오랜 친분과 만남이었다.

발렌베리와 삼성 양가의 인연은 200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상무였던 이재용과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인 이학수를 대동하고 발렌베리 그룹을 방문한다. 덴마크를 방문지로 선택한 것도, 발렌베리 그룹의 마르쿠스 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을 만난 것도, 특히 이재용과 이학수를 대동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재계에선 ‘삼성이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발렌베리의 지배구조와 기업 운영방식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말이 오갔다.

창업주 이병철에서 이건희로, 다시 이재용으로 가업 승계를 해야 하는 게 삼성으로선 최대 과제였다. 당시는 삼성에스디에스(SDS)·에버랜드 지분을 이재용에게 편법으로 넘긴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삼성으로선 발렌베리가 5대째 가업승계를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같은 해 삼성경제연구소가 연구원들을 스웨덴에 장기간 파견해 발렌베리그룹의 경영과 지배구조를 스터디한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삼성이 발렌베리의 기업지배구조와 경영방식, 후계자 지명원칙, 기업의 사회공헌 등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거나 할 계획이라고 공식적이거나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다만 삼성의 움직임을 보건대 발렌베리의 가업 승계를 부러워하고 있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할 뿐이다.

삼성이 발렌베리를 롤모델로 삼는 데 대해 대한민국 국민 어느 누구도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이 그럴 조건을 갖추고 있느냐는 따져 봐야 할 부분이다. 삼성이 5대에 걸쳐 가업을 승계한 발렌베리의 경영권 상속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정작 눈여겨 봐야 할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방침과 사회적인 책임, 노사관계 등의 핵심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발렌베리 5대 가업 승계만 보지 말고 사회환원 노사협력 등 기업가 정신 봐야

발렌베리가 법인세를 85%나 납부하고도 남은 수익금의 80%를 다시 과학기술과 교육 등의 분야에 사회 환원하고 있는 것. 자손들에게 어릴 때부터 특권보다는 의무를 가르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도록 하는 것. 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국가를 위해 해군 장교 복무를 마치도록 하는 것. 100여 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지만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국가산업 생태계를 위해 투자하는 것. 노동자 대표를 이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노조를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 등.

삼성그룹의 3대 세습경영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발렌베리 그룹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을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노조 파괴공작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삼성의 전·현직 임원들이 무더기 실형 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발렌베리 그룹의 기업 문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며,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증거인멸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상태다. 이들 사안들 모두가 경영권 승계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역시 발렌베리의 투명한 가업 승계와는 딴판이다.

글로벌기업 삼성에 노조파괴 뇌물공여 분식회계 편법증여 같은 검은 수식어 사라져야

삼성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삼성그룹의 부가가치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안팎이고, 주식시장 비중은 약 30%에 달한다. 삼성이 과거 전자와 반도체에 과감하게 투자하지 않았다면 현재 세계 10위권의 대한민국의 경제가 가능했겠느냐는 생각도 무리한 가정은 아니다.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어하는 회사 1순위가 삼성전자이고, 삼성그룹이라는 것만 봐도 삼성의 현주소를 알 만하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부터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삼성의 로고와 가전제품은 국민적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삼성이 한국경제에 기여한 성과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삼성은 변해야 한다. 삼성은 더는 밀가루와 설탕을 만들어 팔던 회사가 아니다. 글로벌 기업이고 다국적 기업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첨단기업이다.

최첨단 글로벌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노조 파괴공작, 뇌물공여, 분식회계, 증거인멸, 편법증여 같은 용어가 삼성의 수식어가 되지 않도록 환골탈태해야 한다. 발렌베리 그룹의 5대에 걸친 가업 승계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과 자기절제, ‘스웨덴을 위한 향상’에 담긴 국가에 대한 헌신과 책임을 되새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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