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세습 사회와 ‘그 집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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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세습 사회와 ‘그 집 아들’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20.01.2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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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편집주간

염치없는 짓이었다. 문희상 국회의장 아들 얘기다. 거센 비난 여론 속에 마지못해 출마를 포기하긴 했으나, 아버지가 6선을 지낸 지역구를 아들이 물려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는 것은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그가 “아버지의 길을 걷되, ‘아빠 찬스’를 거부하겠다”고 했지만 북 콘서트 하면서 내놓은 자서전 제목은 뻔뻔하게도 ‘그 집 아들’ 이었다. 그 지역구에서는 ‘그 집 아들’이라고만 하면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모양이다. 유권자를 앞뒤 보지 않고 붓 뚜껑을 눌러줄 개나 돼지로 보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이다. 뒤늦게나마 문 의장과 ‘그 집 아들’이 욕심을 거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부모와 가문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벼슬자리를 얻고 봉토를 물려받아 호의호식한 것은 왕조시대, 봉건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뼈대 있는 가문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작위를 물려받기도 했고, 과거에 낙방했더라도 음서제에 따라 벼슬길이 열렸다. 백성을 양반과 상놈으로 가르고, 귀족과 천민으로 나누던 시대였다. 그런데 공정 정의 평등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모 빽으로 정치권력을 세습하겠다는 건 몸은 현대에 있으나 머리는 봉건시대에 젖어있는 이중적 사고에 머물러 있거나 신분제적 특권의식에 절어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왜곡되지 않는 유권자의 권리행사로 선출돼야 할 민의의 대표자나 오로지 개인의 실력과 노력에 의해 합격이 결정되는 대학입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 등은 부모가 마음만 먹으면 제 자식 입에 쑥 집어 넣어줄 수 있는 떡이 아니다. 한정된 자리와 권리를 무임승차 티켓으로 올라타겠다는 것은 누군가의 자리와 권리를 눈 앞에서 빼앗는 약탈이고 범죄행위이다.

대한민국을 지금도 들끓게 하는 조국 사태의 본질 역시 공정과 평등의 문제였다. 총장 표창장과 인턴 증명서, 논문 제1저자 등재 등이 보통의 젊은이에게는 엄두도 못 낼 것들인데 힘 있고 잘난 부모를 둔 누군가의 아들과 딸은 말 한마디나 품앗이로 가능했다는데 박탈감을 느끼고 분노했던 것 아닌가. 더구나 끼리끼리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한 집권세력과 이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패거리들이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한다든가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든가 “제도가 문제이지 모두가 그렇게 했다”든가 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하게 얘기하는 모습에서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은 극심한 배신감과 좌절감, 분노를 느꼈던 것 아닌가. 이런 꼴 보자고 엄동설한에 촛불 들고 정의와 공정을 외치고,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부르짖었던 시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집 아들’은 수많은 ‘그 집 아들들’의 일부분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 집 아들’은 도처에 있고, 무임승차 티켓을 아들, 딸의 손에 슬그머니 쥐어 주려는 부모들도 넘쳐난다. 사유재산을 상속받고 부모의 특별한 DNA를 물려받아 특수한 분야에서 후손이 재능을 보이는 것이야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흑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잠시 잠깐 억울해하면서 약간의 시기와 시샘의 눈길을 보내고 나서는  언젠가 공평한 기회가 올 거라 믿고 죽자사자 이를 악물고 절차탁마할 뿐이었다.

예술이나 운동 등 특수한 분야의 경우 부모의 우월한 피를 이어받아 일찍부터 소질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더라도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치며 공정한 룰에 따라 경쟁을 거쳐 남들보다 뛰어나야 뒷말이 없다. 그리고 규모가 크든 작든 기업이나 음식점의 경우 큰 아들이 물려받건 막내 딸이 하든 그걸 두고 남들이 감놔라 배놔라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가업을 잇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상속세만 제대로 내고, 사업을 잘해 고용을 창출해준다면 금상첨화다. 후손이 뛰어나 사업이 번창하면 그 집 가문이 번성하는 것이고, 자식들이 모자라 망하면 그들이 가진 복이 거기까지이려니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기회가 평등해야 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해야 할 분야에서 누군가 부모의 뒷배를 이용하거나 권력의 힘을 빌어 새치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이 정부가 그렇게 떠들고 있는 도려내야 할 적폐일 것이다. TV 틀면 유명 가수와 배우, 코미디언이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와 연예계로 향한 붉은 카펫을 깔아주는 것은 '아빠 찬스'의 고전적 사례다. 연예기획사에서 피나는 훈련을 거치고도 데뷔에 실패한 뒤 우울증에 빠져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는 걸그룹 지망생과 연기지망생의 좌절과 고통은 부모 잘 둔 이들에게는 먼나라 얘기다.

언제는 ‘아빠 어디가’라고 묻더니 ‘아빠를 부탁해’라면서 부모와 자녀가 손잡고 동반성장을 노린 건 오래됐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나의 외사친’ ‘우리 집에 해피가 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둥지탈출’ ‘스타 골든벨’ ‘아빠 본색’ 등 수많은 프로그램이 연예인 2세들의 방송계 진출 통로로 활용됐다. 물론 일반인들보다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관심에다 그들 자녀의 성장과정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노골적으로 이들 프로그램을 자녀들의 방송 진출 코스로 악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대기업에서 노동조합원의 자녀와 친인척을 특별채용하거나 아버지가 퇴직한 자리에 자식을 세습채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조가 회사에 공식적으로 요구하거나 단체협상 안건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부도덕의 극치다.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 행사가 지난 2017년 5월 10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배정한 기자, 더 팩트 제공).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 행사가 지난 2017년 5월 10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배정한 기자, 더 팩트 제공).

만 11차 회사원 조귀동 씨가 최근 펴낸 ‘세습 중산층 사회’(생각의 힘)는 한국사회 불평등 연결고리가 부모의 계층→자녀의 학벌→자녀의 고소득 일자리 취업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 씨가 내린 세습사회의 현상과 젊은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서글프고 어둡다.

“오늘날 20대 문제의 핵심은 '1등 시민'인 중상위층과 나머지 '2등 시민' 간의 격차가 더는 메울 수 없는 초격차가 되었다는 데 있다. 초격차는 단순히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만이 아니라 좋은 직업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형태의, 즉 물적 자본만이 아닌 인적 자본의 세습을 통해 확대·유지된다. 그리하여 1등 시민과 2등 시민이 갖는 격차는 노동시장에서 소득·직종·직업적 안정성의 격차로 나타난다.”

세습사회, 부모 스펙에 대한 생각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최근 경향신문이 공채 시즌을 맞아 취준생 147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이 ‘부모가 곧 스펙’이라고 대답했다. 한 취업 재수생은 “1년 내내 정기·수시 채용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면서 “유력 정치인 자녀들의 채용과 연관된 비리 의혹을 보면 지금까지 차별받았던 것은 아닌지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고 경향신문은 전했다.

불평등과 불공정, 부도덕이 이 시대의 키워드로 여전히 오르고 있다는 건 문재인 정부의 수치이고 정책의 실패다. 분열된 야당을 둔 덕분에 40%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꽁꽁 묶어 정치적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세습사회, 양극화, 빈부격차를 임기말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는 실패한 정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문 대통령의 19대 대통령 취임사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중략)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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