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황령산칼럼
2014·04·16 세월호...기억을 기억하라/ 송문석 편집주간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시 구조작전을 펼치는 모습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가 여기 살았다. 안네 프랑크. 1929년 출생. 1944년 추방.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살았던 독일 아헨의 집 앞 보도에 반짝거리는 작은 동판이 박혀있다. 가로, 세로 10㎝의 사각형 동판.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 독일어로 걸려서 비틀거리다는 뜻을 가진 슈톨펀(stolpern)과 돌이라는 단어 슈타인(stein)을 합성해 만든 말이다. 발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다. 걸림돌이다. 베를린에만 5000여 개, 유럽 전역에 7만 개의 슈톨퍼슈타인이 주택가, 사무실, 골목 보도블록 사이에 반짝거리며 박혀 있다.

슈톨퍼슈타인은 1992년 독일 행위예술가 군터 뎀니히라는 사내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쾰른에서 ‘걸림돌 프로젝트’라는 기발한 일을 벌였다. 나치시대에 학살된 피해자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살았거나 잡혀갔던 집 앞 인도에 황동 판을 심는 작업이었다. 유대인, 기독교인, 양심범,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에 희생된 사람이라면 인종 종교 성정체성 등 어느 것도 따지지 않았다.

나치의 잔혹함을 망각하지 말자는 길거리 걸림돌 슈톨퍼슈타인

동판에 새겨지는 글귀는 간단하지만 그것은 한 인간의 삶 전체가 담겨있어 결코 가볍지 않다. "여기 살았다(HIER WOHNTE)." 모든 동판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바로 아래 줄에 이름을 적고, 몇 년 출생, 몇 년 몇 월 며칠 추방,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식이다. 히틀러의 ‘최종 해결’ 정책으로 사라져간 희생자의 전 생애다. 간략해서 오히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군터 뎀니히가 걸림돌을 심게 된 건 인간의 망각에 망치를 두드리고 싶어서였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지만 독일인들은 나치 시대 범죄에 고개를 애써 돌리고 회피하려 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다하우 포로수용소에서 “대다수 독일인이 당시 대학살에 눈 감았다”고 사죄한 것처럼 시민들은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침묵하고 동조했다.

키르스텐 세룹-빌펠트가 자신의 책 <걸림돌>에서 소개한 것처럼 군터 뎀니히가 동판을 심는 것은 처음엔 쉽지 않았다. 나치즘에 가장 격렬히 저항했다는 쾰른 시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쾰른 시만큼 나치즘에 저항한 도시도 없었다고 하지만 히틀러는 정작 쾰른 시에서 ‘인생 최고의 환영 갈채’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1941~1945년 사이에 강제 이주돼 살해된 1만 1000명 중 쾰른 시민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50여 명에 불과했다. 강제 이주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도 침묵했다. 군터 뎀니히는 쾰른 시에만 1500개의 걸림돌이 깔려야 하고, 유럽 전역에는 나치에 희생된 숫자만큼 600만 개의 걸림돌이 그들이 살았던 집 앞에 박혀야 한다고 말한다.

군터 뎀니히는 황동판을 직접 제작하고, 자기 손으로 박아 넣는다. 한 개에 120유로의 비용이 드는데 후원자와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청소년들은 희생자들의 약력을 조사하고 발굴하면서 역사와 만나고 희생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미래를 생각한다.

유럽의 골목길을 걷다가 발길에 툭 차이는 무언가에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걸림돌, 슈톨퍼슈타인. 걸림돌에 새겨진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바라보며 인간의 잔혹함과 전체주의 광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누리는 안락함과 평화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깨닫는다.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혹시 우리 안에 증오와 혐오, 배타성과 잔인성, 방관과 방조의 싹이 자라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발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다시는 걸려 넘어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뎀니히가 걸림돌을 깔아 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부모 세대가 이 걸림돌 앞에 서는 것이 옳을 것이지만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걸림돌 앞에 섰습니다.”

슈톨퍼슈타인은 걸림돌이지만 보도 바닥과 비슷하게 설치돼 발부리가 거기에 걸리는 일은 없어 보인다. 군터 뎀니히의 말대로 “걸림돌에 채여 휘청거리게 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와 가슴”이다. 군터 뎀니히는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세 차례의 살해 협박 전화를 받았고, 100개 가량의 걸림돌이 파헤져졌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면서 반대하고, 페인트칠을 해대는 극우단체도 있었다. 세무관청은 예술작품에 적용되는 7% 세율 대신 대량생산품에 해당한다며 19% 부가세율을 매기겠다고 덤비기도 했다.

5년 전 세월호 비극 잊으면 또 다시 불행 되풀이 돼

2014년 4월 16일 아침.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비현실적인 화면 앞에 주저앉았다. 5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다. 잔잔한 바다에서 서서히 뒤집혀 가라앉는 세월호 안에 304명이 함께 사라지는 모습은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이는 물신주의를 비난하며 인간다운 삶과 세상을 진심으로 바랐다. 숨져간 아이들이 내 아이, 내 동생과 조카인 것처럼 가슴 아파하며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주겠노라 아이들 앞에서 다짐했다. 대한민국은 4.16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며,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잊고 살았다. 아니 희생자와 피해자를 오히려 죄인처럼 만들었다. 유족들의 단식장 앞에서 프라이드 치킨과 피자 파티를 하고, “경제도 어려운데 이제 그만하자”거나 “자식 죽음 놓고 돈 벌이한다”는 등 허구에 찬 비방과 삿대질로 희생자들을 욕보이고 비수를 가슴에 꽂았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생명을 잃어야 성숙해질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여길 때에야 우리의 삶은 한 발짝 앞으로 의미있게 나아갈 수 있다. 타인의 불행에 눈 감을 때 그 불행이 언젠가 나의 불행으로 닥쳐 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불행한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불행은 또다시 되풀이된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산 자를 위한 일이다. 산자의 미래를 위한 의식이다. 죽은 자의 해원은 산 자의 삶을 위한 길이다. 세월호의 진실은 햇볕 아래 드러나야 한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여길 때 진정 우리는 힘차게 걸을 수 있다.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월호#안네의 일기#진도#304명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