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아테네의 오만과 한미동맹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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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아테네의 오만과 한미동맹의 미래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19.12.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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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편집주간

영어 휴브리스(hubris)는 ‘지나친 자신, 오만, 오만에서 생기는 폭력’을 뜻하는 단어다. ‘오만 또는 난폭’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브리스(hybris)에서 나왔다. 그리스 신화에는 오만과 불손, 방종을 상징하는 여신 히브리스가 나오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 단어에는 남에게 굴욕을 주면서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인들은 오만이 인간의 마음에 깃들면 제 분수를 모르고 야심을 품게 돼 결국 파멸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물론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i)’에도 인간의 헛된 히브리스(오만)와 이로 인해 내려지는 네메시스(nemesis 벌 보복)가 강조되고 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힘이 조금 세지면 분수를 잊고 날뛰며 남을 경멸하면서 짓밟다 결국에는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오만함을 경계했던 그리스인들이 새벽 도둑처럼 그들의 마음에 스며든 오만과 방자함 때문에 훗날 자멸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언한다.

오만은 야심을 품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그리스는 수백 개의 도시국가(폴리스)로 이뤄져 있었다. 이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가장 강대한 도시국가였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델로스 동맹(BC 478~477)을 결성한다. 주도권은 해군력이 우세한 아테네가 잡았다. 델로스 동맹에는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 뿐만 아니라 에게해의 섬들,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들도 가담해 200개가 넘는 도시국가가 참가했다. 본부는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로스 섬으로 정했다. 아폴로 신은 그리스 민족 누구에게나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패권을 강화하면서 기세등등한 모습이 못마땅했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 참가를 거부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테네가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의 해상무역 주도권을 장악하고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가난한 폴리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아테네가 해양세력을 상징한다면 스파르타는 대륙세력을 상징하고, 아테네는 무역에 의존한 반면 스파르타는 농업에 의존했다. 아테네가 해군에 강점이 있다면 스타르타는 육군에 강했다.

페르시아 전쟁(BC 499~449)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손을 잡고 승리를 했지만 바다와 육지를 세력권으로 삼아 그리스를 양분한 두 세력이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신흥 패권국가 아테네의 세력 신장이 스파르타의 공포감을 불러 일으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의 진단이다. 이른바 ‘투키디데스 함정’이다.

200여 개 도시국가로 뭉친 부유한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이 가난한 폴리스들의 집합체인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패배하게 된 이유는 여전히 세계사의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직접민주정치가 불러온 중우정치(衆愚政治)의 폐해와 소크라테스의 사형에서 보여주듯 사법체계의 파괴, 그리고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 성인 남자의 절반가량인 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 등이 패전의 요인으로 나열된다.

아테네의 오만함이 델로스 동맹을 붕괴시키고 자멸 초래

그러나 아테네의 히브리스, 즉 오만함도 펠포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이겼다기 보다는 아테네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이 더욱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델로스 동맹은 사실상 아테네 해상동맹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맹 초기에는 본부를 델로스 섬에 두고 동맹 참가국들은 내정과 외교에 있어서 완전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정책 결정도 가맹도시국가들이 각기 평등한 투표권을 행사했다. 의무도 폴리스들의 국력과 형편에 맞게 지워졌다. 아테네와 레스보스, 키오스, 사모스, 낙소스 같은 섬들의 도시국가는 선박과 전투원을 제공할 의무를 졌으며, 다른 폴리스들은 군사비를 부담했다. 이렇게 모은 동맹기금은 델로스 섬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금고에 보관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주도권과 동맹 함대의 최고 지휘권, 자금 운용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동맹 초기에는 독단적으로 운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테네는 오만해지고 독선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BC 454년 델로스 동맹 본부와 금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버렸다. 아테네 민주정치에 들어가는 돈을 동맹 기금에서 끌어다 썼으며, 급기야는 파르테논 신전 건축 비용도 이 돈으로 충당했다.

아테네의 독단과 전횡에 동맹들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아테네의 행태에 분노하는 폴리스들의 심사를 전하고 있다. “전쟁에 쓰기 위해 강요된 기부금을 가지고 도시를 금박으로 입히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그리스는 보고 있다. 이는 마치 바람둥이 여자가 수 천 탈란톤에 해당하는 보석과 조각상과 신전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과 같다.”

군사비만 챙기고 예속국가로 취급한 아테네의 오만함에 동맹국 등 돌려

이 같은 델로스 동맹국들의 불만에 대해 당시 아테네 최고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돈만을 납부한다. 만약 그들이 혜택 받은 것 대신 돈을 내는 것이라면, 그 돈을 지불한 자의 것이 아니라 받은 자들의 것이다.” 당시 아테네가 생각하는 델로스 동맹의 200여 폴리스는 동맹국이라기 보다는 예속국에 불과했다. 아테네에게 동맹국들은 군인과 전투장비, 세금을 상납하고 납부하는 식민국가나 다름없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중간에 끼어 중립을 지킨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에 대한 아테네의 압박과 무자비한 보복을 보면 당시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역사사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아테네의 사절단과 멜로스 의원들 간의 대화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테네 사절단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멜로스 의원들에게 통고한다.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 것 아니냐.” 멜로스 의원들은 델로스 동맹 편입을 강요하는 아테네 사절단에게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하자, 아테네 사절단은 “여러분은 항복함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면하고, 우리는 여러분을 살육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이 이익”이라고 냉혹하게 답변한다. 아테네 사신은 “약자가 강자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라고 냉소를 흘린다. 죽기 싫으면 땅바닥을 기고, 이익은 목숨을 건지는 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느냐는 얘기나 다름없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이 지난 8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한·미국방부장관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남용희 기자, 더 팩트 제공).
정경두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이 지난 8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한·미국방부장관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남용희 기자, 더 팩트 제공).

아테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이에 순응하는 것” 강변

아테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멜로스는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감정에 호소하면서 약소국의 궁박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러나 멜로스가 끝내 무릎을 꿇고 항복하지 않자 아테네는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보복했다.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주민 중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모두 노예로 팔았다고 역사에 기록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거의 대부분이 휩쓸려 들어갔다. 전투는 그리스 세계 전 지역에서 벌어졌고 27년 동안 잔인하고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아테네의 착취에 고통을 겪던 델로스 동맹 도시국가들은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코논이 이끄는 아테네 함대가 리산드로스의 스파르타 함대에게 궤멸되자 아테네에 등을 돌려버렸다. 아테네가 버틸 힘은 없었다. BC 404년 스파르타는 한때 적이었던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를 무장해제시킨다.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게 인도하고 긴 성벽들을 헐었으며, 델로스 동맹을 해산했다.

승자인 스파르타도 힘이 소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세계의 힘을 분열시키려는 페르시아의 의도에 말려들어 농락당했다. 스파르타는 테베에게 패배하고 결국 그리스는 그들이 멸시했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되고 만다.

트럼프의 미국 주한미군 주둔비 5배 증액 요구는 아테네의 오만함 연상시켜

25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오늘에 소환한 것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이다. 한미동맹 의 한 축인 한국에 터무니없는 주한미군 방위비를 요구하는 오만함이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 폴리스에 군사비를 요구하는 것과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내년도 한ㆍ미 방위비 분담금 협정(SMA) 협상에서 한국에 올해 분담금(10억 달러, 1조1700억 원)의 5배인 50억 달러(약 5조8000억원)로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말은 아테네 사절단의 말 만큼이나 오만하고 폭력적이다. 미국의 전기 작가인 더그 웨드가 쓴 책 ‘트럼프의 백악관 안에서(Inside Trump's White House)’에는 트럼프의 저속하고 오만한 육성이 소개돼 있다. “우리는 수십억 달러 어치의 미사일을 사서는 우리의 부자 동맹들에 줘버린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벗겨 먹는다(They are ripping us off)’라고 말하겠다” “가장 나쁜 대목은 우리를 가장 나쁘게 대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동맹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제임스 매티스 전 미 국방장관의 연설문비서관이었던 가이 스노드그래스가 쓴 책 ‘선을 지키며(holding the line)’에도 트럼프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트럼프는 취임 초기 동맹국과 해외 주둔 미군에 드는 비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것을 넘어 비공개로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외교안보팀에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과 일본, 독일 등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할 수 있는지를 렉스 틸러슨 당시 국무장관,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주한 미군은 한국을 위해 존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미국의 동북아 전략, 더 넒게는 태평양 전략을 위해 주둔한다는 것이 적확한 분석이다. 그러나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인 트럼프에겐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당장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미국 유권자들 역시 태평양 너머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의 주둔비용을 자기나라 대통령이 아끼겠다는 데야 반대할 이유가 크게 없을 것이다. 동맹의 가치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같은 고차원적인 개념은 미국 국민들로선 신경 쓸 이유도 없고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도 않는다. 트럼프로서도 유권자 대중들의 이러한 단순한 심리를 파악하고 다음 대통령 선거 전략차원에서도 한국 일본 독일 등 전 세계 동맹들을 쥐어짜고 있다고 봐야 한다.

동맹들에 대한 트럼프의 오만함이 장차 미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도 높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존 햄리 소장은 “주한 미군은 돈을 받고 한국을 지키는 용병이 아니다”면서 “미국 군대의 목적은 미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트럼프를 비판했다. 햄리 소장은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라면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과 파트너를 보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주한 미군은 중국ㆍ북한ㆍ러시아로부터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보다 더 주한미군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필요할까.

미중 패권전쟁과 미국의 고립주의 속에 한국의 운명 슬기롭게 개척해야

트럼프의 오만과 미국 행정부의 동맹에 대한 협박성 군사비 증액 요구 앞에서 아테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약자 입장에서 괘씸한 마음에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봐야 미국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 만큼 어수룩한 나라도 아니고 앞으로 상당기간 독보적인 패권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마당이니 허공에 빈주먹 날리기나 마찬가지다.

동맹국가에 대한 미국의 오만함이 미국에 미칠 영향은 그들이 걱정할 일이지 우리가 오지랖 넓게 할 일은 아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낀 처지에서 우린 우리가 살아갈 걱정을 하는 게 다급하고 현명한 태도일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미국과 트럼프의 동맹국에 대한 협박성 주둔비 증액 요구가 트럼프 시대 특유의 일시적 현상이냐 아니면 지속적인 대외군사정책이냐를 눈밝게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대체적인 시각은 미국이 이미 대외정책을 고립주의적인 방향으로 틀을 잡았다는 것이 국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렇다면 미국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을 상정해 우리의 운명을 걱정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2500년 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포폰네소스 동맹간의 세계대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비극을 맞은 멜로스의 운명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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