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다뉴브 강의 아리랑, 부산의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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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다뉴브 강의 아리랑, 부산의 기다리는 마음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19.07.12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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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문석 편집주간

“우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왔습니다. 최근 아주 비극적이고 참담한 사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과 저를 포함한 오케스트라 단원은 이 사고로 인한 슬픔과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작은 위로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이반 피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BFO)와 함께 지난달 26일 부산문화회관을 찾은 68세 거장의 손에 지휘봉 대신 마이크가 들렸다. 침통한 표정과 잠긴 목소리. 약 한 달 전 다뉴브강 유람선 ‘허블레아니호’ 침몰사고로 희생된 한국인 관광객 26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세계적 거장 이반 피셔와 BFO 단원의 위로와 공감의 노래

“공연에 앞서 다뉴브강 유람선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한없이 기다리는 그리움이 담긴 한국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애도곡으로 준비했습니다. 추모곡이 끝난 후 박수는 삼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악기 대신 악보를 들고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2절까지 부른 피셔와 63명의 단원들. 노래가 끝난 뒤 희생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망부석처럼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에도 정적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닦는 관객, 훌쩍이는 소리만이 침묵과 정적을 대신했다.

부산과 서울 대구 대전에서 가곡 ‘기다리는 마음’으로 슬픔을 전한 피셔와 BFO단원들은 3년 전 내한공연에서는 ‘아리랑’을 불러 한국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노래가 고통과 슬픔을 녹이고 하나로 마음을 모을 수 있음을 거장은 알고 있었다.

다뉴브 강 위엔 헝가리 사람들의 온정을 담은 아리랑이

그의 고향 헝가리 사람들도 이 거장의 따뜻한 마음을 닮은 게 분명했다. ‘허블레아니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엿새째 되던 날 다뉴브강 위로 아리랑 선율이 흘렀다. 시민들이 사고가 난 다뉴브강 바로 위 머르기트 다리에 모여 아리랑을 합창했다. 행사를 기획한 사람도 모여든 사람도 모두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자발적이었다. 영문으로 적힌 악보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훔치는 시민도 많았다. 경찰은 이들의 애도 행사를 위해 교통을 통제해 주었고 지나가는 시민들은 하얀 국화꽃을 강 위로 던지며 슬픔을 같이했다. 터무니 없는 사고가 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머르기트 다리 위에는 여전히 추모의 촛불이 타 오르고 국화꽃이 바쳐지고 있다. 서투른 한글로 애도의 마음을 적은 메모지도 꽂혀 있다.

한국이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국 틈바구니에 끼여 아픔의 역사를 갖고 있듯 헝가리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침략으로 고통 받고 약탈당했다. 특히 머르기트 다리와 다뉴브 강은 헝가리 사람들에게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 11월 4일 머르기트 다리. 나치 독일군이 출입통제를 하지 않고 모의폭파 훈련을 하다 다리 동쪽 교각이 완파되면서 수 백 명의 시민이 희생되는 참사가 빚어졌다. 최대 600명이 숨졌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추산이다.

머르기트 다리와 하류의 세체니 다리 사이 강둑에는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이 또 다른 비극을 증언한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동조한 헝가리 극단주의 단체 애로우 크로스(Arrow-Cross)는 시내 게토에 격리된 유태인 수 천 명을 무참히 총살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유태인들을 다뉴브 강가에 모아놓고 신발을 벗게 한 뒤 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대학살의 희생자는 5000~8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다뉴브 강은 인간의 잔혹함과 학살을 지켜보았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다뉴브 강가에 설치돼 있다(사진: 위키피디아 이미지).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다뉴브 강가에 설치돼 있다(사진: 위키피디아 이미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학살과 잔혹한 역사를 음악과 노래로 승화

그리고 다뉴브 강과 함께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흘러 지난 2005년.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영화감독 캔 토게이와 조각가 귤라 파우에르의 협업으로 조형물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이 놓여졌다. 쇠로 만들어진 60켤레의 신발은 참혹한 순간을 오늘에 재생한다. 신발들은 끈이 풀려 나뒹굴거나 구겨져 있고 찢겨 있다. 노동자의 작업화와 한때는 반짝 빛났을 회사원의 반듯한 구두, 또각거리며 멋 부리고 걸었을 젊은 여인의 하이힐, 어린이의 작은 신발까지 그날의 비명을 들려주고 있다. 바로 유람선 '허블레아니'가 침몰한 머르기트 다리에서 불과 1㎞ 지점, 그곳에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이 있다.

헝가리 옆 나라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도 도나우(다뉴브 강의 독일 말) 강은 아름답고 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인 오스트리아는 7주 만에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케의 탁월한 전략 앞에 무릎을 꿇고 유럽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제목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패전의 우울함을 달래려는 오스트리아 국민의 염원이 담긴 곡이다. 슬픔과 우울을 경쾌하고 밝은 음악으로 치유하려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현명함이 명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혐오와 증오 넘쳐나는 한국사회, 공감능력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음악은 정서적 유대감을 높이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산모에게서 모유를 나오게 하고,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분비돼 유대감을 높이는 옥시토신이 음악을 들을 때도 나온다고 한다. 종교단체나 집회,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옥시토신의 이런 효과 때문이다. 노래를 부름으로써 형성된 정서적 유대감이 사회적 유대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공감은 멋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탁월함을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명언을 남겼다.

헝가리의 시민들이 다뉴브강에서 부른 아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국인들을 향해 보내는 정서적 교감의 신호이며, 상처받은 그들 스스로를 다독이는 노래이기도 했다. 이반 피셔와 그의 음악단원들이 부른 기다리는 마음은 한국인과 헝가리인을 연결하는 공감의 메시지였다.

이반 피셔와 헝가리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과 손길을 보면서 오늘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는 냉혈한들의 혐오와 증오가 오버랩된다. 이러다 우리에게 공감능력과 정서적 유대감을 촉진하는 옥시토신 분비 능력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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