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영화 ‘인생 후르츠’ 노부부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말 ‘차근차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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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영화 ‘인생 후르츠’ 노부부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말 ‘차근차근, 천천히’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19.04.0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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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주간 송문석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90세 건축가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 만능 슈퍼우먼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177세. 65년을 함께 산 노부부는 지은 지 50년 된 손 때 묻은 집 텃밭에 50가지 과일과 70가지 채소를 가꿔 식탁에 올리고 이웃과 나누며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만큼 키가 큰 도토리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온갖 꽃나무와 들풀이 자라는 집은 그들만의 우주이자 새와 지렁이가 공존하는 자연 그 자체입니다. 아니, 두 사람이 나무이고 풀이고 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슬로 라이프 삶 츠바타 부부의 자연친화적 인생 이야기

지난해 연말 국내에 개봉됐던 영화 <인생 후르츠>는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낙오될 것처럼 매순간 초조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아~' 하며 긴 숨을 조용히 내뿜게 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국내 개봉한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서 다도 선생님으로 출연한 일본의 국민엄마 배우 키키 키린은 <인생 후르츠>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잊을 만하면 우리에게 말합니다.

영화 <인생 후르츠>는 슬로 라이프의 삶을 사는 건축가 노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이다(사진: 네이버 영화).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바람과 땅이 일러준 대로, 츠바타 노부부처럼,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서두르지 말고 살아가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실, 영화 <인생 후르츠>는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영화입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훨씬 긴 노부부. 별스레 새로울 것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깔깔거리고 웃을 만한 것도 없는 너무 심심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과 특별히 다를 게 없으리란 게 너무나도 분명한, 그래서 뻔한 이야기가 화면에 펼쳐집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노인 부부의 일상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앙상한 몸과 구부정한 어깨를 따라가며 그들의 느린 숨소리에 맞춰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걸 어느 순간 느낍니다.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느릿느릿 쉬지 않고 움직이는 노인들의 발길을 좇아가면서 우리는 어느덧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쟁시대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

츠바타 슈이치 할아버지는 도쿄대학 제1공학부를 졸업한 뒤 일본주택공단에 입사해 고조지 뉴타운 계획으로 도시계획학회 이시카와상을 수상할 만큼 유능한 젊은 건축가였습니다. 그러나 고조지 뉴타운 계획은 자연친화적인 그의 설계의도와는 달리 아파트 숲으로 건설됐습니다. 마치 우리네 신도시 건설처럼 돼 버린 것입니다. 슈이치는 회사를 그만두고 그 도시의 한 귀퉁이에 1000㎡의 땅을 사서 바람이 통하고 자연이 살아 숨쉬는 그 만의 작은 집을 가꿉니다.

그런 슈이치 할아버지를 히데코 할머니는 묵묵히 따르며 응원할 따름입니다. 단 한 번도 남편의 일에 반대한 적이 없고, 편의점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사서 식탁에 올린 적이 없다는 히데코 할머니는 그저 매일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이고 디저트를 맛깔스럽게 뚝딱뚝딱 만들어냅니다. 그 자신은 밥 대신 빵을 먹으면서.

매일 10여 통의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노부부. 마을 사람들은 물론 배달부, 생선가게 점원에게도 손그림을 그려 고마움과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츠바타 부부. 돈 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며 정신병원 설계를 기꺼이 무료로 해주는 노건축가. 그들에게서 함께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관객들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차근차근, 천천히’ 어제를 오늘처럼 살아가던 슈이치는 어느 날 텃밭 일을 끝내고 낮잠을 자던 중 스스르 낙옆지듯 숨을 거둡니다. 꿈 꾸듯 자연 속으로 되돌아갑니다. 히데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속울음을 삼키며 보냅니다. 소리 내 울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소풍가는 남편을 보내듯 조용히 보냅니다.

키키 키린의 입을 빌려 노부부가 주는 삶의 교훈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 <인생 후르츠>를 우리나라에서 약 7만 명이 봤다고 합니다. 지난 겨울 영화의전당에서 영화를 보며 50~70대 시니어 관객이 많다고 느꼈는데 20~30대 젊은이들의 반응도 뜨거웠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많이 지쳐 있었나 봅니다.

때늦게 영화 <인생 후르츠> 이야기를 새삼 다시 꺼낸 건 다큐를 찍던 중 저세상으로 떠난 슈이치 할아버지에 이어 히데코 할머니가 며칠 전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들립니다. 조용한 그의 성품대로 죽음도 그렇게 맞았나 봅니다.

<인생 후르츠>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던 키키 키린이 지난 해 9월에 저세상으로 먼저 떠났으니 영화를 이끌어간 세 사람 모두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줬던 영상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전하고 있습니다. 숨넘어갈 듯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에게 속삭이듯 삶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봄꽃이 만발한 이 계절에 낮은 목소리로 키키 키린이 말합니다.

"차근차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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