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문체부, '이건희 기증관' 서울로 일방 결정...지자체들 '부글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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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문체부, '이건희 기증관' 서울로 일방 결정...지자체들 '부글부글'
  • 취재기자 조라희
  • 승인 2021.07.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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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후보지로 서울 용산, 송현동 일방 발표
해운대구청장 1인 시위 중... "일방결정 납득못해"
비수도권 지역, “문화적 소외 극복 위해 공모 절차 재추진" 요구
지난 8일 오전 홍순헌 해운대구청장이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 부산시 해운대구 제공).
지난 8일 오전 홍순헌 해운대구청장이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 부산시 해운대구 제공).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 30여 개 지자체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이건희 기증관(가칭)' 위치를 공모를 통해 진행할지에 대한 논의를 거치겠다고 지난 6월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문광부는 결국 7일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로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를 결정했다고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을 통해 발표했다.

핵심 국정 목표로 국가 균형 발전과 지방 분권을 강조했던 정부는 이건희 기증관의 후보지를 공모 절차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정부는 이번 사례로 지방 분권화는커녕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는 결과를 낳았다. 비수도권에서 문화적 소외 극복을 염원했던 지자체들의 반발이 그래서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과연 지역의 문화적 소외 극복 의지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이건희 기증관을 비수도권에 유치해야 한다고 가장 먼저 주장한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 7일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 중심주의 결정을 따끔하게 비판했다. 박 부산시장은 “대한민국은 서울밖에 없습니까? 이건희 콜렉션의 서울 유치에 대한 문화부 결정은 한국의 관료 행정이 얼마나 서울 중심주의와 수도권 일극 주의에 물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안"이라고 꼬집었다.

각 지자체는 정부가 진정 문화 균형 발전을 실현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이건희 기증관을 공모를 통해 후보지를 선정하고 비수도권에 유치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부산시 문화예술과 박선옥 주무관은 “지금도 공모 절차를 추진하기에 늦지 않았다”며 “지난 4월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미술관 건립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했을 때부터 각 지자체는 투명하게 공모 절차를 추진해야 한다고 모든 걸 어필해왔는데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허탈감만 느껴질 뿐”이라고 말했다.

부산미술협회는 지난 8일 “전국 200여 개 미술관 중 5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고 했다. 부산시에 따르면, 현재 전국 국·공·사립 문화기반시설의 36%가 수도권에 건립돼 있다. 이 중 국립문화시설만 한정할 경우, 48%가 수도권에 있다. 또한 최근 10년간 세워진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살펴보면, 총 21곳 중 38%인 8곳이 수도권에 있다. 게다가 올해 완공될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 2024년에 지어질 국립한국문학관 조차 각각 인천과 서울에 건립 예정인 만큼 수도권 문화집중 현상은 갈수록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는 “지역의 문화시설 확충과 함께 이건희 기증품 관련 전시를 정례적으로 개최하여 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지역에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언제, 어디에 개최할지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희 기증관이 서울에 지어지고 난 후 악화될 지역 격차 심화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법이 없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비수도권 국민도 수도권 수준의 문화·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문체부의 이번 결정은 일방적인 밀실 행정과 지방과의 소통 부재를 드러낸 문제이자, 현 정부의 핵심 국정 목표인 지방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박 시장은 또 “지역 격차가 갈수록 심화하고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방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며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문체부는 후보지 결정 이유에 대해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성과 기반시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인근에 있어 충분한 입지 여건을 갖추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진정으로 지방 분권화를 이뤄내고 싶다면 미술관 유치 시 몰려드는 사람, 재화, 물자 등을 고려해 문화 인프라가 이미 충분한 수도권이 아닌 비수도권에 미술관 유치를 재고해야 한다.

동남권발전협의회는 규탄 성명서를 통해 우려했던 바가 현실이 됐다며 정부가 서울이 최적지라고 발표한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동남권발전협의회는 “수도권과 지역의 문화 격차가 심각하고, 이로 인한 국민의 문화 향수권이 갈수록 불균형해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서울은 일부러라도 피해야 할 곳이 아닌가”라며 “서울공화국의 위세 앞에 할 말을 잃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이런 것인가 싶다”고 말했다.

동남권발전협의회는 또 “응당 거쳐야 할 최소한의 의견수렴 절차와 공론화 과정을 생략하고 서둘러 ‘서울이 최적지’라고 발표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런 중요한 결정을 뒤도 안 쳐다보고 할 수 있는가”라며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편 올해 4월, 이 회장 유족은 정부에 문화재와 미술품 총 23,181점(국립중앙박물관 2만 1693점, 국립현대미술관 1488점)을 기증한 바 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이건희 미술관 건립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그 후 이건희 미술관은 1조 원이 넘는 경제적 효과를 가질 것으로 예상됐고, 전국 지자체들 사이에서 뜨거운 유치전이 펼쳐졌으나 결국 무산됐다.

이건희 기증관 유치로 또 하나의 그들만의 리그가 탄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지역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공정하고 투명한 공모 절차를 도입해 지방 분권을 이뤄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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