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기증관 일방적 서울행 결정에 유치 나섰던 비수도권은 허탈...심각해지는 ‘지역 공동화 현상’ 대책 마련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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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기증관 일방적 서울행 결정에 유치 나섰던 비수도권은 허탈...심각해지는 ‘지역 공동화 현상’ 대책 마련 필요
  • 취재기자 조라희
  • 승인 2021.07.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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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 한번 열지도 않고 서울 용산, 송현동으로 후보지 독단 결정
전국 200여 개 미술관 중 50% 이상이 현재 수도권에 몰려 있어
말로만 ‘지방 분권화’ 외칠게 아니라 지역특화 문화시설 배치해야
문체부, “입장 바꿀 가능성 적어” 후보지 재검토 요구에 부정적
부산 해운대구 우일종합시장 앞에 새마을지도자 우1동 협의회, 부녀회는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희망하는 현수막을 내걸어놓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라희).
부산 해운대구 우일종합시장 앞 길거리에 새마을지도자 우1동 협의회, 부녀회가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희망하는 현수막을 내걸어놓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라희).

정부가 삼성의 고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을 전시할 '가칭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약칭 이건희 기증관)' 유치 후보지를 두고 전국 지자체들이 요구했던 공정한 공모 절차를 외면한 채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를 후보지로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같은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비수도권의 분노와 상실감이 분출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곳곳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전국 30여 개의 지자체는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위해 정부에 요청서를 보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정치, 경제, 사회, 행정 등 모든 분야가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는 상황에서 이건희 기증관까지 서울에 유치한다는 정부의 결정은 비수도권의 따가운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수도권 문화 집중 현상은 심각한 상황이다. 현재 전국 200여 개 미술관 중 5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희 기증관까지 서울에 유치하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나친 주장이라는 것이 비수도권의 입장이다. 

문체부는 서울의 접근성과 연구·보존·관리의 용이성을 이유로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결정했다. 문체부는 지난 7일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 방향’에서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성과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비수도권에서는 경제 창출 효과가 큰 이건희 기증관을 효율성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수도권에 유치하기로 한 문체부 입장이 정부의 핵심 국정 목표인 ‘국가 균형 발전’, ‘지역 분권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방의 문화인들은 ‘문화 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이미 문화 기반 시설이 충분한 수도권이 아닌 비수도권에 이건희 기증관을 유치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산문화재단 강동수 대표이사는 “문화 인프라가 충분한 서울에 또 새로운 문화 시설을 유치한다면 수도권 일극주의가 더 심해질 것”이라며 “경제적 논리에 의해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수도권에 이건희 기증관을 유치한다면 수도권 집중화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체부는 이건희 기증관을 서울에 유치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지역별 대표 박물관, 미술관 순회 전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산시 문화예술과 박선옥 주무관은 “정부가 이미 수도권 위주의 결정을 내린 후 언제, 어디에서 순회 전시를 추진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허탈감만 든다”고 말했다. 문체부는 “아직 논의가 시작 단계이다 보니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다듬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수도권 중심적인 시각으로 비수도권이 주체가 되는 개발은 시행하지 않고 ‘대안’만 제시한다면 정부가 외쳤던 국가 균형 발전을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부산미술협회 박태원 이사장은 “수도권 다음으로 비수도권 순서라는 인식 자체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수도권 우선주의 시각으로 비수도권에 대안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평등하게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 문화 집중 현상은 ‘지방의 인재 유출’ 현상, ‘지역 공동화’를 심화시킨다. 비수도권의 작가, 청년 문화 예술인들은 지방에서 전시할 공간이 마땅치 않고 취업할 곳이 많지 않아 수도권으로 많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부산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오수연 회장은 “지방 작가, 예술인들이 보고 느끼는 것이 많아야 하는데 지방은 전시장이 부족해 불모지”라며 “비수도권과 수도권의 문화 예술인이 가진 하드웨어는 똑같은데, 문화 불균형으로 인해 비수도권에서는 소프트웨어를 채울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에서는 문체부가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선정하기에 앞서 충분한 논의와 설명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거세게 나오고 있다. 부산 예총은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공청회, 설명회, 세미나 등 다양한 형태로 충분한 논의를 함께 거쳐서 결정했다면 이렇게까지 반발이 크게 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체부는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공모 절차 없이 빠르게 결정 내린 이유에 대해 “현재로서 답변을 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 명단이다(사진: 시빅뉴스 제작).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 명단이다(사진: 시빅뉴스 제작).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결정한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의 위원이 수도권 중심적이라는 반발도 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지역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반박했다. 문체부 문화기반과 임재완 연구사는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신상철 교수님은 세종 캠퍼스에서 근무하고 있다"며 "상명대 양현미 교수님도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고, 철박물관 장인경 관장님도 현재 지방에 계신다”고 수도권 중심의 위원회 명단 구성에 대한 논란을 일축했다.

비수도권 시민이 지방에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열리는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감상하려면 시간 및 비용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대학원생 황혜지(26, 부산시 남구) 씨는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전시회 하나를 보러 가도 교통비, 식비, 숙박비까지 부담해야 한다"며 "비수도권에서는 문화 향유 기회가 적고, 접근성이 좋지 않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수도권에 수도권 못지않은 문화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의 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부산문화재단 강동수 대표이사는 “정부가 새로운 문화 시설을 유치하는 데 있어 경제 논리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지역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지역 문화 분권을 이뤄내기 위해선 비수도권에도 수도권 못지않은 정도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이사는 수도권의 문화 편중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권역별로 지역만의 특화된 문화시설을 배치해 ‘특색 있는 문화 지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강 대표이사는 “부산은 영상 도시화 전략을 펼치고, 전주는 전통문화의 허브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등 지역마다 특색 있는 문화를 갖추기 위해 정부가 장기적인 대책을 고민해 개발을 추진한다면 지역 문화 분권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수도권에서는 여러 지자체와 시민단체 등이 연대해 문체부의 일방적 결정을 철회하고, 이건희 기증관을 서울이 아닌 비수도권에 건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민주적 절차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대해 문체부는 “여러 가지 비용부담, 행정 부담이 있는 상황이어서 입장이 바뀔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가 수도권 문화 집중 현상에 대해 비수도권의 거센 반발을 인지하고 마땅한 대책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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