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이건희 기증관’ 서울에 '말뚝'... 비수도권 '찬밥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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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이건희 기증관’ 서울에 '말뚝'... 비수도권 '찬밥 신세'
  • 취재기자 허시언
  • 승인 2021.11.1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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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이건희 기증관’ 서울 송현동 건립 심의 의결
수도권 3개 시·도에 문화시설의 36.2%가 분포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심각한 문화격차 그대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을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이 서울 송현동에 들어서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이로써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화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사진: 네이버 지도 캡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을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이 서울 송현동에 들어서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이로써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화 격차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사진: 네이버 지도 캡처).

결국은 서울이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을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이 서울 송현동에 들어서는 것으로 최종 결정 났다. 비수도권이 이건희 기증관 지방 유치를 위해 노력해온 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 7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일방적으로 이건희 기증관 유치 후보지를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로 결정한 후 9일 이를 최종 심의 의결했다. 이와 같은 문체부의 일방적 결정에 대해 비수도권 곳곳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국 30여 개의 지자체가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위해 정부에 요청서를 보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서울과 비수도권 간의 문화 불균형은 심각한 상태다. 문화시설의 소재지에 따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구분하면 수도권 3개 시·도에 문화시설의 36.2%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당수의 문화 인프라가 수도권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서울 송현동에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4월 이건희 전 회장의 유족 측이 문화재와 미술품 총 2만 3181점을 기증했다. ‘세기의 기증’에 문화예술계는 환호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언급했다. 이후 정부는 기증품을 통합적으로 소장·관리할 기증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부지를 검토했다.

문체부는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성과 기반 시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두 곳을 기증관 부지 후보로 정해버렸다. 연관 분야와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 상승효과를 기대할만한 충분한 입지여건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모두 비수도권에는 없는 것들이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성과 기반 시설’을 갖춘 박물관과 미술관을 비수도권에 건립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문화 시설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에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는 것을 결정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문화 인프라가 계속해서 수도권에 모여들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낳는다. 좋은 문화 시설은 더 좋은 문화 시설을 건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미 대부분의 문화 시설이 서울에 모여 있는 지금으로써는 비수도권은 이대로 평생 제대로 된 문화시설 없이 문화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것을 지켜만 보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문화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문화 기반 시설이 충분한 수도권이 아닌 비수도권에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했어야 한다. 계속해서 문화 시설이 수도권에만 집중된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화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수도권 집중화가 심해지게 될 것이다. 좋은 문화시설을 비수도권에 설립해 문화 시설이 골고루 분포하게 만들어야지 이미 문화 기반 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또다시 문화 시설을 서울에 설립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문체부는 내년 하반기부터 국제설계 공모를 진행해 2027년 이건희 기증관을 개관할 계획이다. 문체부는 내년 하반기부터 연 3회 이상 지역별 대표 박물관·미술관 순회 전시를 순차적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전국 13개 국립 지방박물관, 권역별 공립 박물관·미술관 및 별도로 기증받은 지방박물관과도 협력해 지역에서도 이건희 기증품을 충분히 관람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체부의 방안에도 문화격차가 해소된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비수도권에서도 언제든 시간이 나면 이건희 기증품을 보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 기증품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닌, ‘시간을 내서’ 기증품을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다. 비수도권에서도 언제든 수준높은 문화 전시를 보러 갈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는 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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