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1-소동파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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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1-소동파의 충고
  • 칼럼니스트 이현우
  • 승인 2019.12.1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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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현우

 

이현우 칼럼니스트
이현우 칼럼니스트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이리 보면 고갯마루 저리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 알기 힘든 까닭은)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위의 시는 1000여 년 전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가 쓴 〈제서림벽(題西林壁)〉이다. 유학자이면서도 도가와 불가를 넘나들었던 동파는 당시(唐詩)에서 볼 수 없는 송시(宋詩)만의 설리적(設理的) 특성을 확립한 중추였으며, 이 짧은 칠언절구에도 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마치 잠언처럼 들린다. 나(我)를 벗어나야 참나(眞我)를 볼 수 있다는 교훈으로, 삼라만상의 이치를 설파하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산속에 있으면 산을 보지 못하듯이, 사물이나 현상을 진단하는 데도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다각적 다층적으로 살펴야만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고 참모습이 보인다는 뜻이다.

소동파(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소동파(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경직된 사고는 편향된 이념으로 나아가 ‘나만의 정의’를 만든다. 따라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뿐, 결코 세상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고질병, 이념 논쟁의 원인도 이 부분에서 자명해진다.

‘이념의 늪’은 모든 가치를 한쪽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형성된 맹목적 신봉이 어떻게 인간 사회를 해치는지 모두들 지켜본 바가 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나무가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다양한 생각들이 조화롭게 교집합을 이룬 곳이 민주 사회다. 의도하든 안 하든 결과적으로, 이를 외면하는 그 어떤 것도 보편적 정의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만 남기고 다 베어버리면 산은 생명력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편향된 이념이 이끄는 나라의 운명은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끝난다. 한 세기를 지배했던 이런저런 이념들이 그렇게 역사 속에서 빛을 잃었다. 이념은 결코 고정불변의 절대선이 아니다. 오히려 마약이나 사이비 종교에 버금가는 중독성을 지닌 것이다.

실제로, 오도된 이념은 종종 ‘일그러진 영웅’을 탄생케 했다. 나치즘의 히틀러,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스탈린, 주체사상의 김씨 왕조만 해도 그렇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이 6,000만을 넘고, 스탈린이 숙청하거나 수용소로 보낸 정적의 수가 270만에 달하며, 김씨 왕조 3년(1995〜1998) 동안 굶어 죽은 북한 동포는 100만이 넘는다. 어디 그뿐인가. 양식을 찾아 압록강을 건넌 수많은 여인이 인신매매범들의 먹이가 되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들 ‘일그러진 영웅’은 대부분 ‘일치된 함성’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상에게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군중’에게도 똑같이 묻고 있다. 더욱이, 우상의 망동을 정당화한 판관과 언론, 지식인의 경우, ‘캄뷰세스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안타깝다.  이미 천여 년 전 이웃 나라의 한 시인이 산사의 벽을 통해 간곡히 충고했음에도, 우리의 주변에는 여전히 이념에 매몰된 ‘가엾은 노예들’이 서로 다른 집회를 한다. 이들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적개심을 드러내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무리 포장해도, 실상은 ‘세력의 도구’가 된 어리석은 무리다. 모르고 짓는 죄는 알고 짓는 죄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이들의 몽매함을 누가 어쩌겠는가. ‘나무를 그려놓고 숲을 그렸다고 외치는’ 그네들의 귀에는 그 어떤 예지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모든 이념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사회는 결코 민주사회가 아니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 캄뷰세스의 심판 - 기원전 6세기 경 고대 페르시아의 ‘캄뷰세스 왕’이 부정한 판관 ‘시삼네스’의 위선이 드러나자 그에게 내린, 온 몸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

▶필자 이현우는 시인이다.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시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시집으로 <오늘 날씨는 우리들 표정> <문 밖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 현재 시사‧문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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