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8-보석 같고 꽃잎 같고...'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상태바
[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8-보석 같고 꽃잎 같고...'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칼럼니스트 이현우
  • 승인 2020.01.29 0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현우 칼럼니스트
이현우 칼럼니스트

‘개자식이다, 말썽꾸러기다, 악마다…’ 어른들은 ‘제제’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어른들의 착시와 달리 그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다섯 살 소년이다. 가난과 외로움과 폭력이 끝없이 괴롭혀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 집 앞에 서 있는 라임오렌지나무와 슬픔을 나눠 갖고, 마음속 새를 불러 하늘을 날며, 사랑과 우정의 끝길에서 이별을 마주해도 울지 않는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전편에 걸친 모든 이야기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지만 여기서는 차례로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까닭은, 다음의 두 장면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인 사랑, 연민, 이별, 슬픔에 흠뻑 젖는데, 구태여 덧붙이는 사설은 삼가야겠다.

라임오렌지나무(사진: 구글 무료이미지).
라임오렌지나무(사진: 구글 무료이미지).

욕을 먹고 매를 맞는 일상 중의 어느 날, 갓 학교에 입학한 제제는 등굣길에 남의 집 정원에 핀 꽃을 꺾는다.

<..."대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재빨리 들어가 꽃을 땄어요. 하지만 꽃이 굉장히 많아서 표시도 안 났어요. 그렇겠구나. 그래도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다.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해도 도둑질인 건 사실이잖니? 아녜요, 그렇지가 않아요, 세실리아 선생님, 이 세상은 하느님 것 아녜요? 이 세상 모든 게 하느님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꽃들도 역시 하느님 거예요." 선생님은 내 논리적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선생님, 우리 집에는 정원이 없어요. 꽃을 사려면 돈이 들고요...그리고 전, 선생님 꽃병만 늘 비어 있는 게 마음 아팠어요." 선생님은 마른 침을 삼켰다. "가끔 선생님께선 제게 생과자를 사 먹으라고 돈을 주셨잖아요. 그렇죠? 매일 주고 싶었지만 네가 종종 숨어 버렸어... 전 매일 받을 수가 없었어요. 왜? 점심을 싸 오지 못하는 애가 또 있었거든요." 선생님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슬쩍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도로틸리아는 저보다 더 가난해요. 다른 여자애들은 그 애가 깜둥이에다가 가난뱅이라고 같이 놀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앤 매일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기만 해요. 전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산 생과자도 그 애하고 나눠 먹었어요." 선생님은 이번엔 아주 오랫동안 눈물을 닦았다.>

<"선생님께선 가끔 저 대신에 그 애에게 돈을 주셔야 했어요. 그 애 엄마가 남의 집 빨래를 해 줘서 식구들이 먹고살아요. 애들이 열한 명이나 된대요. 게다가 모두 아직 어린애들이래요. 우리 진지냐 할머니께서도 토요일마다 그 애 집에 쌀과 콩을 갖다주세요. 그래서 저도 엄마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과 나눠 먹으며 살려고 그 애와 나눠 먹은 거예요....제제야, 이 꽃병은 결코 비어 있지 않을 거야. 난 꽃병을 바라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름다운 꽃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꽃을 갖다준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나의 학생이었다고. 그럼 됐지?" 선생님은 웃으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잘 가라, 황금의 마음씨를 가진 아이야...">

여기서, 왜 선생님은 꽃을 훔친 제제에게 벌을 줄 수 없었을까. 벌을 주는 대신 눈물을 훔쳤을까. 아이들은 단순한 생각으로 행동한다. 어른들처럼 복잡하지 않다. 꽃을 보고 선생님 교탁 위의 빈 화병을 떠올린 마음씨는 ‘연민’이었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친구와 빵을 나누어 먹은 마음씨는 ‘동정’이었다. 인간의 법정은 ‘행동을 판단’하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있으나, 하느님의 법정은 ‘양심을 판단’하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릇을 깬 아기를 꽃나무 가지로도 때릴 수 없듯, 제재의 심성을 안 선생님이 어찌 제재에게 벌을 줄 수 있었으랴.

제제를 몹쓸 아이로 취급하는 그 많은 어른 중에서도 제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제제의 곁을 먼저 떠난 ‘발라다리스’ 아저씨. 제제는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는 내게서 떨어져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난 널 무척 사랑한다, 꼬마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러니 자, 이젠 웃어봐.”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고 면도한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비벼댔다...우리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달렸다. 포장도 안 되어 있었고 인도도 없는 좁은 길이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로 둘러싸인 멋진 길이었다...>

<“왜 이토록 맞았지?” 난 모든 일을 사실대로 얘기했다. 내가 얘기를 끝냈을 때 그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어쩔 줄을 몰랐다..."왜 그런지 난 알아요. 난 쓸모없는 애라서 그래요"..."바보 같은 소리. 넌 아직 천사 같은 꼬마야. 그래서 그런 장난꾸러기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절 무척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래." "그런데 왜 우리 집에 오셔서 아빠에게 저를 달라고 하지 않으세요?" 그는 깜짝 놀라, 누운 채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 내 아들이 되고 싶니?" "태어나기 전엔 아버지를 선택할 순 없잖아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택하겠어요.">

<“그게 아니다, 얘야. 인생이란 그렇게 생각하듯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내 한 가지 약속을 하마...앞으로 널 내 아들처럼 사랑해 주마. 친아들처럼 대해 주마."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이에요, 포르투가?" "네가 잘 쓰는 말이지만, 맹세하마." 나는 우리 가족 이외의 사람에겐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그의 얼굴에 키스를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심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래서, 순수한 영혼을 가진 다섯 살 어린아이 제재는 발라다리스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렀다. 제재가 ‘마음으로 선택한 아빠’였던 것이다. 이처럼 육신의 아빠와 영혼의 아빠가 같을 수만은 없다. 한쪽은 ‘숙명’이고, 다른 한쪽은 ‘선택’이니까. 이 세상에, 몸으로 맺어진 아빠와 마음으로 선택한 아빠가 다른, 가엾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아픔과 기쁨, 만남과 이별의 감정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라임오렌지나무만큼 컸을 때, 마침내 제제는 발라다리스 아저씨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삶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한다. ‘삶의 아름다움이란 꽃과 같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나무에서 떨어져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낙엽과도 같은 것...'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