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5-손해 좀 보고 살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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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5-손해 좀 보고 살그라
  • 칼럼니스트 이현우
  • 승인 2020.01.0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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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칼럼니스트
이현우 칼럼니스트

중학교 때 과학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내 옆의 친구가 선생님께 손을 들어 질문했다. ‘수업료 낼 적에 봉께로 실험 실습비라 카는 기 있던데 와 실험은 안 해 주시는교?’ 일순, 교실에 적막감이 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뜬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선생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뒤통수 맞은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눈을 감겨 놓곤 아무말 없이 뒷짐을 진 채 교실을 왔다 갔다 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있었다. 교실에는 슬리퍼 끌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종이 치자,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렀다. ‘니 말이 맞다. 몬 해주서 미안타. 하지만 지금은 우짤 수가 없다 아이가. 그 돈이 다 우리 쓰라 카는 건 아인 기라. 실험실은 고사하고 기구도 지대로 없고, 입시 준비 땜에 코피가 날 지경이고...' 그 말을 들으며 안도하는 순간, 선생님의 불같은 호령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종아리 걷어라!’

그날 그 친구는 장딴지에 멍이 들었고 우린 골치 아픈 숙제를 받게 되었다. 그 친구가 왜 매를 맞았는지 각자 답을 적어 내라는 것이다. 그 해가 다 가도록 문제를 풀었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원하는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마지막 수업 시간, 선생님이 그 친구를 다시 불러냈다. 그리곤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와 맞았는지 알겠나?/ 언지예…/ 짜슥, 여태 답을 모리겠나?’ 우린 일제히 소리쳤다. ‘선생님예, 정답이 머십니꺼? 갈키주이소!’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구글 무료 이미지).

선생님 왈, "학교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곳이 아인기라. 학교가 시장이 되먼 세상이 어지러버진다. 어릴 때만이라도 손해 좀 보고 살그라. 그라몬 나중에 그기 더 큰 이익이 돼서 돌아오는 날이 있을끼다. 너그가 내 나이 되어보먼 머시 진짜 소중한 긴지 알게 될 끼다. 돈도 아이고 지위도 아이고 명예도 아이다. 인간애다 인간애, 애간애가 먼지 아나?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거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사람한테서는 찾기 힘든 기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속에 있는 기다. 그런 거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다 손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기 있어 이 세상이 굴러가는 기다. 다들 알아 묵었나?"

그로부터 어느덧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의 교육 현장은 그날 그 선생님의 염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교육과정이 열 번도 더 바뀌고, 선풍기 하나 없던 교실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콩나물시루 같던 교실도 그런대로 넉넉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선진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입시를 정점으로 모든 교육 활동이 '올인'하고 있고, ‘학생 인권 조례’라는 미명하에 교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 교육과 질서 교육은 초등부터 대학까지 그 어느 현장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인공지능형 인간을 양산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이념교육까지 더해졌으니, 장차 어떤 유형의 인간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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