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저력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가곡 <선구자>의 1절, 2절, 그리고 3절 중 기억 나는 구절들이다. 용정시 해란강과 일송정 앞에서 떠올려본 노래다. 노래로만 알던 일송정과 해란강이 눈앞에 펼쳐지니 감회가 좀 다른 것 같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벤시(市)와 용정시를 비롯한 북간도 지역과, 요녕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이른바 둥베이(東北) 3성을 둘러본 것은 1994년 8월 15일 전후 10여일 간이었다.
먼저 중국 지린성 쪽에서 백두산(중국에서는 창바이산) 천지(天池)를 올랐다. 운이 좋았는지 그날따라 백두산 꼭대기가 활짝 개여 있어 파란 천지를 볼 수 있었다. 하늘이 피라야 천지도 파래진다. 천지 아래엔 온천이 흐르고 있어 백두산의 위험한 지진활동이 떠오르기도 했다.
중국 3성과 베이징 여정은 험하고도 머나먼 길이었다. 베이징 공항에서 선양(審陽)은 비행기편, 나머지 길은 꾸불꾸불한 비포장 길이었다. 그때는 옌벤공항이 확장 중이어어서 선양-퉁하(通化)-허룽(化龍)-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지안(集安)-백두산(장백산)-옌벤까지는 중국의 낡은 버스로 3일 간을 달려야 했다. 선양에서 하루 밤, 통화와 화룡에서 각 하루 밤, 장백에서 하루 밤, 연변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학술회의가 있었던 지안에서는 나흘을 머물렀다.
돌아오는 길은 옌벤-하얼빈-창춘(長春)까지는 기차편이었고, 창춘에서 베이징은 항공편이었다. 모두가 우리 독립군 발자국이 지나간 피땀서린 곳이고, 또 200만 중국 동포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땅이었다.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義擧)의 현장 하얼빈 역사(驛舍)에 잠시 들러 묵념을 드렸다. 당시 의거는 중국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의 성도(省都)여서 인파가 북적였고, 거리 가운데는 중국 최북단 도시답지 않게 화려했다. 창춘(長春)에는 의외로 발해박물관이 있어 찾았다. 발해 문화는 고구려 후손들의 유적이고 문화지만, 중국은 자기들 문화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용정시에서 명동촌 윤동주 시비(詩碑)와 함께 해란강 건너 비암산 줄기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는 일송정(一松亭)이 있다. 중국 당국의 간섭이 심해 일송정과 간도지방 독립운동 유적지 등의 보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일송정 지붕 한쪽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은 말끔히 정리되어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리는 곳이라고 한다.
청산리 대첩지와 그 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불사른 그 앞 마을터 입구에 서면 한국인이면 누구나 숙연한 자세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에 패배한 복수로 엉뚱하게 그 마을을 불지르고 불길을 피해 빠져나오는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총칼로 희생시켰다고 안내인이 덧붙였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간 것 같다. 청산리 전적지와 그 초입에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안내 표지판이 외롭게 서 있었다. 역시 중국 측에서 안내판을 크게 하지 말라고 한다니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디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 그들이 황무지였던 북간도 지역을 1870년대 이후 개척하며 고달픈 삶을 살았던 이 지역에 현 우리 정부나 국민들의 관심은 너무 엷었던 것 같다.
북간도(北間島 또는 北墾島)는 두만강과 중국 토문강 사이의 넓은 지역으로,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우리 동포들, 즉 '개척자'의 땀과 한(恨)과 숱한 눈물, 그리고 독립군의 피땀과 '생명'이 서린 곳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독립군들의 영혼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우리 땅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한때 제2의 애국가라 불릴 만큼 국민들이 애창했던 가곡 <선구자(先驅者)>. 지금은 작사가 윤해영, 작곡가 조두남이 한 민간 연구소에 의해 친일(親日) 인사로 찍히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노래도 잘 부르지 않는다. 앞서 3개절의 노래 가사만 본다면 친일 흔적은 찾기 어렵다. '사람'은 시대상황이나 삶의 여건에 따라 '친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로서의 음악은 우리 곁에 오래 남겨진다.
아무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독립군 '선구자'들이 숨차게 말달리던 청산리 백운평 전적지 앞산 줄기들과 일송정, 해란강 등을 바라보면 그 <선구자> 노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라 빼앗긴 백성들의 수많은 애환과 비통,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지배가 안겨준 아프고 쓰린 기억들을 되씹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나치게 과거에 매달리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새겨야 한다.
나라잃은 백성들은 세계 어느 나라든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한국을 비롯, 중국, 인도, 남아공 등 아프리카와 남미 여러 나라, 동남아시아 제국들이 경험한 뼈아픈 과거사다. 힘이나 이념이나 어떤 이유로든 나라를 잃으면 비극은 마찬가지다.
요즘 나라 안팎을 보면서 25년 전 북간도 지역과 일송정, 용두레 우물, 그리고 그곳 우리 '조선족' 사람들의 삶을 둘러본 고단했던 여정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지 74년이다. 기술과 장비 등은 아직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질서의식이나 보편적 윤리 도덕률이 다소 부족한 점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 들어서고 있다. 해방 후 30년도 안돼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룬 대단한 저력의 나라요 민족이다. 좋은 지도자만 만나면 위대한 나라를 일궈낸 역사도 가지고 있다. 조선조 세종대왕이나 임진왜란 과정 등이 바로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앞에는 바다보다 넓은 '가능'(可能)의 세계와 미래의 영역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굳이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처럼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분들과 그 분들의 후손들에게 존경과 함께 늘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항심'(恒心)을 자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참에 다시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독립운동을 한 선각자들은 3대에 걸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해외 망명이나 요시찰(要視察) 집안, 인물이 되면 가족과 재산을 지킬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분들은 전 재산을 갖다 바치고 결연하게 목숨을 걸었다
길지도 않는 세월이 우리를 간혹 망각지대(忘却地帶)로 끌고 간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세대가 되려면 우리는 지금 이 지점에 꼭 시선을 멈추고, 또 마음을 모아야 한다.
2019년 10월 20일
묵혜(默惠) 김민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