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북간도 용정과 윤동주 시비(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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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북간도 용정과 윤동주 시비(詩碑)
  • 김민남
  • 승인 2019.10.0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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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에 1994년 윤동주 시비가 있는 용정 방문을 기억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세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외로워했노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1에서)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시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용정중학교 교문 안쪽 '용두레 우물가에' 윤동주(尹東周) 시인의 대표작 <서시(序詩)>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1994년 '해외(海外)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李潤基 옌벤대학 명예교수)가 주도하여 세웠다. 전 국회의원 이윤기 소장은 "해외 800만 동포들의 민족정체성과 구심점 회복을 위해" 윤동주 시비를 비롯, 기념관, 생가와 명동촌을 복원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운동이 일어난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ck)에 '신한촌' 기념탑도 세웠다. 

용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사진: 위키피디아)
용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사진: 위키피디아)

그는 구 소련 철권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30여 만 동포들이 꽁꽁 얼어붙은 시베리아 부근 수천 km를 이고지고 하면서 강제 이주 당한 중앙아시아 항일운동 유적도 찾아 단장했다. 강제이주 참상(慘相)을 그린 그곳 화백 신순남(신 니콜라이)의 길이 45m, 높이 3.2m에 이르는 대작 그림을 발굴해서 한국에 전시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프랑코 군에 의해 북부 바스크 지방 2000여 주민이 학살당한 비극'을 전해듣고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 그림에 비견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강제이주는 그보다 더한 참상이었다. 춥고 험악하고 배고픈 수천 km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게르니키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내가 베이징, 선양(審陽), 허룽(和龍), 퉁하(通化), 백두산을 거쳐 명동촌을 찾은 것은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지 두 달 후인 1994년 8월이다. 8월 15일 전후 4일간 압록강변 고구려 첫 도읍지인 중국 지안(集安)에서 이 연구소가 주관한 '고구려문화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었다. 고구려문화를 재조명(再照明)하는 이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 일본 중국 대만 등의 관련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우리 학계에서조차 그동안 고대사(古代史), 특히 고구려와 고구려 문화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민간 연구소가 바로 건너편에 북한을 두고 있는 중국땅 옛 고구려 수도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 이 회의에는 북한 원로 사학자 칠순의 박시형(朴時亨) 김일성대학 교수 등 북한 학자들이 이례적으로 참가했다. 눈길을 끈 것은 중국 학자들의 오만한 태도였다. 그들의 고구려를 보는 시각과 그 속에 비친 중국의 오랜 대국(大國) 근성과 그들의 '민낯'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주제발표가 끝난 후 이어진 토론과 질문에서 산둥성(山東省) 어느 대학 교수가 느닷없이 일어나 "고구려라는 나라는 없었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 변방에 고구려라는 한 '소수민족'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강변했다. 고구려나 그 문화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다. 참석한 학자들 모두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당시 고구려문화 학술회의를 하고 있는 자리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북한 박시형 교수가 일어나 "고구려와 고구려 문화를 부정하는 중국 학자의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느 사서(史書)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기록이 없다"는 반박에는 그 중국 학자도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중국 고대 수(隋)나라를 상대로 한 을지문득 장군의 '살수대첩'과 양만춘 장군이 당(唐) 나라를 물리친 안시성 전투 등은 중국을 무찌른, 강성했던 고구려 역사를 웅변한다.

학술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은 지안 부근 고구려문화 유적 탐방에 나섰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 동굴 고분(古噴)에는 고구려문화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어 국내성 터, 장군총, 사적비(史迹碑) 등을 둘러보았다.

앞서 윤동주 시비가 있는 용정의 명동촌과 연변시 등 북간도(北間島 또는 北墾島) 일대는 1860년대부터 개척에 나선 우리 '조선족'의 개척정신과 함께 개척민의 땀과 눈물과 슬픔과 이국민(異國民)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본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싸운 독립군의 '생명'과 발자취가 뚜럿하게 새겨진 역사의 땅이다.

우리 정부나 학계에서는 그동안 200만 가까운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작가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가 1960년대 '사상계'에 연제되면서 여기가 어떤 땅인지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젊은 항일 시인 윤동주의 <서시> 등 저항시가 널리 읽혀지면서도 그가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1917년에 태어나 용정중학교(당시는 대성중학)를 다닌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 전신)과 도쿄의 릿교대학을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귀국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형 선고를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살이하던 중 고문 후유증이 겹쳐 1945년 2월 끝내 조국(租國)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사(獄死)했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윤동주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와 함께 우리들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항일 '저항' 시인이다. '저항'(抵抗, 레지스탕트, resistant)은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지식인들의 침략국에 대한 끈질긴 투쟁이다. 이러한 저항이 바로 해방, 독립, 그리고 국권회복을 가져오거나 앞당기는 '거룩한 전쟁'이다. 3.1독립만세운동, 독립군의 항일 투쟁, 수많은 애국-순국 열사들과 김구 선생 등을 비롯, 독립운동을 이끈 분들의 투쟁이 곧 거룩한 전쟁이다. 졔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의 투쟁은 연합군 상륙 작전이나 낙하산부대의 거점 확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뒤에 <가장 긴 전쟁(The Longest Day)> 등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요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부끄러운 '조국사태'는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일어날 수 없는 부도덕이요 비윤리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기를 염원해온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왜 그걸 미처 몰랐을까.

우리는 60년대 초 국민소득 70달러의 굶주림에서 이제는 3만 달러를 넘어서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일궈낸 위대한 민족이고 나라다. 우리가 깊이 생각을 멈춰 봐야 할 지점이다.

2019. 10. 3. 개천절
묵혜(默惠) 김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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