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리 칼국수 집의 인심과 따뜻한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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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 칼국수 집의 인심과 따뜻한 자본주의
  • 김민남
  • 승인 2020.01.1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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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한 그룻의 인심에서 세상의 정에 감복
-일본 소설 '우동 한그릇'의 따뜻함 떠올라
-따뜻한 자본주의, 배려하는 민주주의, 베푸는 연말연시가 되었으면...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바닷가 뒷골목에 자그만 칼국수집이 하나 있다. 아직 소문난 식당은 아니고 '맛집'도 아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고만고만한 칼국수집 중 하나다.

5, 60대 쯤 돼 보이는 부부가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부인이 주방 일을 하고 좀 무뚝뚝한 남편은 손님 서빙을 맡아한다. 목이 좋은 곳도 아니고 내부 장식이 화려하지도 않아 장사가 제대로 될까 오히려 손님인 내가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부부가 모두 독실한 신자여서 일요일엔 문을 열지도 않는다.

그런데 2년이 채 안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처럼 찾아간 오늘은 손님이 엄청 붐비고 주방 아주머니는 연신 칼국수를 끓여내기에 바빴다. 바깥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원도 한 사람 더 늘었다.

칼국수 점심을 끝내고 일어서는데, 아주머니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주방에서 나와 "언젠가 어르신께 칼국수 한 그릇 꼭 대접하고 싶었는데, 오늘 마침 연말입니다" 하면서 기어이 칼국수값을 받지 않는다. '내가 나이든 노인이라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옥신각신하다 결국 꺼냈던 지갑을 도로 닫을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칼국수의 정을 광안리 한 칼국수 집에서 느꼈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따뜻한 칼국수의 정을 광안리 한 칼국수 집에서 느꼈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돌아서 나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일본에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우동 한그릇>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栗良平)가 1989년 처음 소개한 소설이다. 스토리는 일본 국민들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눈물이 나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의회에서까지도 국민 홍보에 나설 만큼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일본 최북쪽 홋카이도(북해도 北海道)에 북해정(北海亭)이라는 자그만 우동집이 있다. 남편은 주방에서 일하고 부인은 손님을 맞으며 우동을 나르는 일을 한다. 

어느해 12월 31일 밤 10시, 가게문을 닫으려고 바깥에 펄럭이는 안내 깃발을 막 걷어내리려고 하는데, 허름한 옷차림을 한 중년 부인이 초중등생으로 보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될까요?" 모기 소리로 묻는다. 가게 주인은 "네, 우동 한그릇이요"를 외치며, 다시 불을 지폈다. 주인은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1.5인분 우동을 담아낸다. 그 사이 아내가 난로불을 다시 켜고 따뜻한 자리로 이들을 안내한다.

세 모자가 한 그릇 우동이 꽤 많다면서 오손도손 맛있게 나누어 먹는다. 어린 아들이 우동 한 가락을 떠서 먼저 엄마에게 드린다. 두 아들 모두가 '고학'(苦學)을 하면서도 엄마한테는 힘든 내색이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 뒤에도 몇 년간 섣달 그믐날이면 어김없이 세 모자가 찾아와 여전히 우동 한그릇만 시킨다. 이들에겐 우동 한 그릇이 1년 중 가장 맛있고 성대한 만찬(晩燦)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인은 연말이면 이들을 학수고대했지만 ㅡ.

10여 년 지난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10시에 드디어 두 신사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게문을 드르럭 열고 들어섰다. 그때 큰아들은 의사가, 작은아들은 은행원이 되었고, 어머니는 곱게 차려입은 초로(初老)의 귀부인으로 바뀌었다.

이런 줄거리의 소설이었지만, 일본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동을 불러내는 작품이어서 당시 전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설국(雪國)>의 모양세다. 칼국수 한 그릇, 우동 한 그릇은 정말 별것 아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잔잔한 감동을 주고, 때로는 시(詩)와 소설, 그림, 영화로 탈바꿈한다. 이 소설도 뒤에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소설 속 그때 두 아들에겐 가장 먹고싶은 우동이었지만, 찢어질 듯한 가난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어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험금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빚더미를 안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빚을 외면할 수 없었던 착한 부인은 그때부터 팔을 걷어 붙이고 험한 일터로 나갔다. 큰아들은 신문배달, 작은 아들은 엄마 대신 집안일을 맡아 하면서 빚을 4년이나 앞당겨 다 갚았다.

일본 자본주의의 따뜻한 한 모퉁이랄까, 일본 사람들의 '정직성'이랄까를 보여주는, 조금은 의도적인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경쟁체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이런 따뜻함마저 갖지 못한다면 그 모습이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 심리와 '경쟁'으로 굴러간다. 때로는 개인이나 소수 자본은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경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불안하고 윤리도덕마저 흐트러지게 된다.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고 사회나 정부와 권력이 너무 무관심하면 미국 하버드대학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가 일갈한 것처럼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들의 말대로 선출된 민주주의 권력도 사법부를 존중하고, 상대편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그들은 게임의 룰(rule)을 지켜 상대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게 한다면 민주주의는 존재가치를 잃는다고 지적한다.

권력을 잡거나 부(富)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타인(他人)들,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가져야 한다. 이건 한 개인이나 권력의 심성(心性)이나 태도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은 선심쓰듯 나랏돈을 나눠주고 베푸는 건 따뜻한 손길이 아니라 표를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이 스스로 삶을 꾸리고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북돋워주고 용기를 주는 적절한 선에 머무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뜻한 가슴과 손은 사회구성원들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사회를 지탱하는 바탕이요 첫 걸음이다. 선출된 권력 또한 이걸 잊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따뜻한 손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선택이 아닌 의무이자 법과 제도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권력이 민주적 통제를 받는 제도적 장치가 늘 작동되고 있다. 바로 따뜻한 권력이 사회의 필수조건이란 뜻이다. 이걸 국민과 국민을 대신하는 의회와 언론이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권력은 오만해지거나 통제불능이 된다. 언론이 권력과 한편이 되거나 야합했을 때 빚어지는 민주주의 훼손은 우리가 현실과 역사에서 자주 보고 경험하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권력의 속성은 사실상 폭력에 가깝다. 따뜻한 손길과는 먼 칼날처럼 차갑다. 따라서 통제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레드 라인을 넘어서게 되고, 끝내 권력은 물론 나라가 무너지는 길로 간다. 사회나 국민, 권력 자신도 큰 불행에 빠진다.

'칼국수 한그릇' 얘기가 좀 다른 길로 벗어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 해를 돌아보고 또 다른 한 해를 바라보는 연말연시(年末年始)다.

우리는 따뜻한 가슴과 손길로 특히 어려운 이웃에 미소를 잊지 않고 '베푸는 삶'을 살아 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또 가슴 한켠에 따뜻한 불쏘시개 하나쯤 지니고 있는지 한 번 물어볼 때다. 베푸는 것은 꼭 돈이나 재물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요즘 한 쪽에서 어름장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와 국민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기 있다. 소득 3만 달러, 500조 원을 껑충 뛰어넘은 나라 살림은 이미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복지사각(死角) 지대가 있고, 세계적인 초저출산(超低出産)의 짙은 먹구름이 밀려온다. '속수무책'의 북한 핵과 미사일이 수시로 하늘을 들락거린다. 여기에 생산성 저하, 강성노조, 초강대국의 무역전쟁과 패권다툼 등이 구름층의 두께를 더하고 있다. 앞장서 해결해야 할 정부나 당사자들은 애써 눈길을 피하기도 하고, 더러는 맑은 하늘만 보려고 한다.

그래도 나눔, 베품, 배려, 대접, 어르신 같은 단어들이 아직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어 우리 사회는 그런대로 버텨나가는 듯하다.

2020년 1월 12일
묵혜(默惠) 김 민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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