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백두산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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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자욱한 백두산에 서서...
  • 편집인 강성보
  • 승인 2014.07.2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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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 왜 백두산인지 아십니까?”

지난 6월말, 고등학교 동기생 20여 명과 부부동반으로 환갑기념 백두산 관광을 했을 때 조선족 현지 가이드가 우리 일행에게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것은 너나 없이 다 알고 있지만 왜 이름이 백두산이지?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서 그렇게 불렸나? 중국인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던데, 그 차이는 뭐지?’ 솔직히 역사라 하면 학창시절에 배운 기본 지식밖에 없어 백두산의 어원에 관해서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터라, 이번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팁을 하나 얻게 되나 보다 하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엉뚱했다. “백두산은 ‘백’ 번 올라 ‘두’ 번 정도 그 정상에 있는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싱거운 허무 개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였다. 백두산에서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은 열 번에 한 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드물다고 한다. 특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 속에서 영롱한 천지의 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행운은 우리 가이드의 말대로 100번에 두 번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2%의 ‘대박’ 행운은커녕 10%의 ‘소박’ 행운도 잡지 못했다.

우리가 서파(西陂) 중간 휴게소로부터 1440여 개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을 약 30여 분 간 힘겹게 올랐지만, 백두산 정상은 캄캄한 안개 속이었다. 사진으로 보던 그 푸른 에머랄드 빛의 칼데라 호수인 천지는 야속하게도 우리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과 2, 3미터 전방만 가뭇하게 보이는 농무(濃霧)... 김승옥의 <무진기행> 속 안개는 "면사포 속 신부의 슬픈 눈망울처럼 흐릿하게 호수를 감추고 있었다"고 했는데, 우리들이 만나려 했던 천지는 면사포가 아니라 검은 복면을 뒤집어 씌운 듯 캄캄했다.

참 아쉬웠다. 살아 생전에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오나. 다시 오더라도 2% 확률의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의 버켓 리스트(죽기 전에 해야 할 일 목록)에는 백두산 등반과 천지 감상이 들어 있었는데, 이 항목을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상념을 잠시 접어둔 채, 우리 일행은 한쪽 면에 '中國,' 다른 한쪽 면엔 '조선'이란 글자가 쓰인 사람 키 정도의 표지석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하산했다.

우리 일행의 여정은 중국 심양(瀋陽)에서 통화(通化)를 거쳐 압록강 상류 연안을 버스로 달린 뒤 백두산 등정, 백두산 산록의 시골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1박하고, 다시 버스로 두만강을 따라 도문(圖們)까지 간 뒤 용정(龍井) 탐방, 그리고 연길(延吉)과 장춘(長春)으로 이어지는 4박 5일 코스였다. 연변 자치주를 비롯한 길림성 일대를 대충 훑고 지난 것이다. 길림성과 요령성, 흑룡강성 등 현재 중국의 동북 3성은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고구려, 발해 등 나라를 세웠던 만주 벌판이었다. 특히 길림성은 19세기 중반 간도(間島)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封禁)이 해제되자 우리 조선 민족이 대거 밀려가 개척한 땅이었다. 일본 강점기 대한의 독립군들은 이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그 중 하나, 우리 일행이 일박한 백두산 산록 이도백하는 독립군의 항일 전사(戰史)에 일획을 그은 청산리 대첩의 무대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6일 간의 혈전을 벌여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5000여 명을 섬멸했던 것이다.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 관동군은 대대적으로 이 일대 조선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쳐 부녀자, 노약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조선인이란 조선인은 닥치는대로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백두산 자락에 19세기 후반부터 드문드문 형성됐던 조선인 촌락들은 죄다 초토화됐고 조선인은 자취를 감췄다는 기록이 있다.

또 두만강을 따라 가다 우리가 들렀던 도문(圖們)시 인근에는 청산리 대첩을 이끈 항일 전쟁의 서막, 봉오리 전투의 무대가 있다. 이 전투에서도 대한 독립군은 일본군 수천 명을 몰살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전적비가 도문시 인근 삼림공원에 세워져 있다는데, 우리 일행은 그 전적비를 보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두만강에서 보트를 타고 약 30분 간 유람하면서 갈대 솦 건너 북한땅을 지척에서 구경하고 두만강 물에 발을 담그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도문을 떠나 용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두만강 흥취를 미처 떨치지 못한 듯 자진해서 마이크를 잡더니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하면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노래를 질펀하게 불렀다. 더욱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발로 한쪽 끝을 누른뒤 노젓는 시늉을 하며 노래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용정에서 우리는 민족 시인 윤동주가 어릴 때 애국심을 함양하고 시심(詩心)을 키웠던 용정중학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 졸업생이라는 스무 살 앳된 모습의 조선족 안내원의 인도로 용정중학교의 역사관을 둘러봤다. 이곳에는 이 학교가 배출한 여러 위인들에 관한 기록,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유명한 <서시(序詩)>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용정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민족 운동을 펼친 선각자와 독립 투사들의 족적을 둘러보며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차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전시관 출구에는 유리로 된 큰 기부금 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관계자는 우리들이 기부한 소정의 돈은 윤동주 등 선각자들의 기념 추모사업과 용정중학교 학생들의 장학사업에 쓰인다고 설명했다. 유리함 속에는 중국 위안화, 한국 원화, 그리고 달러화까지 제법 많은 돈이 모여 있었다. 우리 일행도 이미 달아오른 가슴 탓인지 너나없이 지갑을 열었다. 대부분 100위안, 우리 돈으로 한 2만 원 정도씩 기부했는데, 한 친구는 100위안짜리 다섯장을 선뜻 꺼내 함 속에 밀어넣었다.

이 역사관에서 나와 다시 버스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관계자가 뒤에 처져 있던 나를 포함한 대여섯 명 일행에게 “저쪽 구석방 윤동주 교실에 들러보시라”고 권했다. “응? 그런게 있나요?”라며 그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좁은 복도를 지나가니, 60년대 우리들이 공부했던 국민학교 교실 비슷한 낡은 교실이 나타났다. 한쪽 면에 칠판이 있고, 교실 가운데는 난로가 놓여 있었다. 뒤쪽 게시판에는 당시 윤동주 등 학생들이 공부했던 모습이 큰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2인용 책상은 예닐곱 개. 아마 10여 명 학생들이 공부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교탁 바로 한쪽에 풍금이 놓여있었다. 그냥 장식인가 싶어 건반을 눌러봤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친구가 “어이, 풍금은 발판을 눌러야 소리가 나지” 하면서 의자에 턱 앉더니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눌렀다. 그러자 “찌잉찌잉” 하며 은은한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내 마음의 풍금이라더니, 윤동주 교실에서의 풍금이라~” 약간 감동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그 다음 한 동기 친구의 부인이 의자에 앉으면서부터 시작됐다. 음대 출신이라는 그 부인은 풍금 치는 솜씨가 대단했다. 풍금 선반에 윤동주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 악보가 펼쳐져 있었으나, 그 부인은 “이 노래는 잘 모른다”면서 “자신이 잘 아는 노래를 연주하겠다”고 했다. 악보도 없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연주한 그 노래가 바로 <선구자>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율이 흐르자, 우리 대여섯 일행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같이 합창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한 친구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가에 물기도 얼핏 비쳤다. 요즘 젊은이들 유행어에 ‘안습(안구에 습기찬다)하다’라는 말이 있다더니, 우리 모두 안습했다.

이날 윤동주 교실에서의 <선구자> 합창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감격스러웠고 보람이 있었다. 백두산 천지 감상은 못했어도 이것이 있었기에 내 일생에 가장 값지고 귀중한 추억이 되겠다 싶다. 그 여운을 달래려 용정에서 연길로 가는 버스간에서 우리들은 모두 <선구자> 노래 합창을 몇 차례나 리플레이했다.

장춘시 룽지아(龍嘉) 공항 대합실에서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여행을 뒷바라지 해준 동기회 총무가 방명록을 내놓으며 여행 소감 한마디씩 써달라고 한다.

그냥 “잘 놀았습니다”라고 쓸까 하다가 흥취가 생겨 이렇게 썼다.

"민족의 영산 백두에 서서/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선구자들이 누볐던 만주 벌판을 돌아보며/
가슴 벅찬 애국심을 음미하다.”

"좀 오바했나?" 하는 낯간지러운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실제 4박 5일 이번 백두산 여행을 한 감상은 위 소감 그대로였다. 배달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백두산에 서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빠서 대부분 조국과 민족을 잊고 살지만, 백두산에 올라보고 만주 벌판을 둘러보면 평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민족주의의 맥박이 깨어나 펄떡펄떡 뛰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나도 참 오랜 만에 뻐근한 애국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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