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부처님의 나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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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부처님의 나라라고?”
  • 강성보 시빅뉴스 편집인
  • 승인 2014.02.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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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도올 김용옥의 신작 <금강경 강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부처님의 나라”에서 연유됐다는 것이다.

그 대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가 애초에 불법을 퍼트린 곳은 북 코살라 왕국 슈라바스티(Sravsti)다. 이것을 5세기 초 불교를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파한 후진(後秦)의 구마라십(鳩摩羅什)은 사위성(舍衛城)으로 번역했는데, 7세기 당나라 명승 현장(玄奘)은 산스크리트 원어 발음에 가깝게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으로 적었다. 여기서 이 ‘실라벌’이 한반도에 넘어와 서라벌(徐羅伐)이 되고 점점 음운변화를 일으켜 ‘셔블’, ‘서울’이 됐다."

이 같은 ‘서울의 불국(佛國) 연유설’은 기존의 학설과는 온도차가 있다. 우리가 배워온 바에 따르면 서울의 원어 ‘서라벌’은 ‘새롭다’를 의미하는 순수 고대 국어 '쇠', 또는 '새'와 들판을 의미하는 '벌'의 합성어 '쇠벌', '새벌'의 음차(音借)다. 신라의 발상지이며 지금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이 문헌에 따라서는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사로(斯盧), 사라(斯羅) 등으로 기록돼 있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서라벌이 부처님 나라라는 어원을 가지려면 불교가 신라에 보편적으로 수용된 이후에 이 이름이 등장해야 할텐데 불교가 국교로 된 것은 신라 23대 법흥왕(~503) 때이지만 서라벌이란 이름은 그 이전 신라를 기록한 중국 문헌에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도올 선생의 서울의 불국 연유설은 '실라벌실저국'이란 표기와 '서라벌'의 음운적 유사성에서 착안한 하나의 설일 뿐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워낙 박람강기(博覽强記)한 도올 선생의 주장인데다 기록이 박약한 우리 고대사를 정확하게논증하기는 어려운 만큼 도올 선생의 이 학설 역시 연구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학설이 맞다면 우리는 지금 2,500년전 인도에 있었던 부처님 나라의 이름을 딴 땅에서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사실 우리나라, 특히 서울에 불교와 연관된 지명은 셀수 없을 만큼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한많은 미아리 고개> 노래로 유명한 미아동(彌阿洞* 아미타불서 유래)이며, 불암산(佛岩山)은 부처님이 사시는 산을 의미한다, 또 안양(安養)이라든지 보광(普光), 불광(佛光)은 극락의 땅을 뜻하고 구로구 도선동, 천왕동, 은평구 신사동 등도 불교 용어다. 지방에도 불교식 지명이 수두룩하다. 오랫동안 주한 미군 사격 연습장으로 사용돼 환경오염 문제로 한때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한 충남 매향리(埋香里)의 ‘매향’은 미륵이 태어난 그 자리에 향을 묻었다는 설화에서 연유됐다. 부산 앞바다 에 떠 있는 거제도(巨濟島)의 지명 역시 불교에서 나왔다. 거제는 중생을 크게 구제한다는 뜻이다.

통영 앞바다 아름다운 한려수도 한가운데 욕지도가 있다. 발음상 얼핏 ‘욕지거리’라는 말을 연상해 “뭐 이런 이상한 지명이 있나?”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욕지(欲知), 즉 지혜를 갈구한다는 이 뜻은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서는 너무나 소중한 말이다. 여기서 지혜는 지식(knowledge)이나 세상살이의 실용적인 지혜(wisdom)와 차원이 다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덧없음(五蘊皆空)을 깨닫는 ‘프라즈냐(prajna)’의 경지,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이 지혜의 완성자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욕지도’는 반야바라밀다가 되고 싶은 작명자의 불심이 만들어낸 지명이 틀림없다.

지명 뿐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언어 가운데 불교와 연관 있거나 불교용어에서 유래된 것이 수두룩하다. 우선 인간(人間)이란 말이 그렇다. “이 인간아!”할 때 처럼 마음에 마땅찮은 사람을 얕잡아 부를 때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는 원래 ‘마누사 로카(manusa-lok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역이다. ‘마누사’는 사람, ‘로카’는 세상이란 뜻이다. 즉 ‘인간’은 윤회 육도(六途)의 하나인 “사람 사는 곳”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도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게 아니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건달’은 또 어떤가. 영화 <친구>에서 처럼 깡패를 일컫는 이 말도 실은 알고 보면 아주 좋은 뉘앙스를 가진 불교 용어다,.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 금강굴에 살면서 제석천(帝釋天)의 음악을 맡아 보는 신 간다르바(乾達婆)가 이 건달이란 말의 어원이다. 인도 신화에서 간다르바는 천상의 물 소마(soma)을 지키며 의사의 역할도 하는데 향을 먹고 살면서 떠돌아다니는 신으로 그려져 있다. 이 떠돌이 특성 때문에 ‘놀고먹는 한량, 혹은 불량배’로 의미가 전와됐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 절에서 선승과 행정승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연극이나 시나리오를 다듬을 때 쓰는 말인 각색(脚色)이 승려들의 수행이력을 기재한 문서 각하색물(脚下色物)에서 나온 것이라든지, 경제 생활용어로 널리 쓰이는 투기(投機)가 ‘마음을 열어, 몸을 던져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의 사찰 용어라는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심지어 ‘삭신이 쑤신다’할 때의 ‘삭신’, ‘괴롭힘을 당한다’ 할 때의 ‘시달림’도 불교 용어라 하면 놀람을 표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 싶다. 삭신은 빛깔과 형상이 있는 몸을 뜻하는 색신(色身)에서 유래됐고, 시달림(屍茶林)은 고대 인도에서 죽은 사람 시신을 버리는 곳인 쉬타바나(sitabana)의 음사(音寫)다.

우리가 매일 먹는 점심(點心) 역시 스님들이 쓰는 말인데 누항으로 들어와 생활용어가 됐다. 원래 점심은 끼니가 아니고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배고플 때 정신이 들게 하기 위해 조금 먹는 새참을 뜻한다. 마음에 점을 찍는 행위나 그 음식인 것이다.

무려 1,500여년간 불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한민족인 만큼 불교 흔적이 한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처럼 우리 주변 구석구석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구가 녹아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외래 종교가 지금 우리 사회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 역시 부처님의 손 바닥 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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