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껍질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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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껍질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 강성보 시빅뉴스 편집인
  • 승인 2013.03.1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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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베란다에 비둘기 한 쌍이 둥지를 틀었다. 시멘트 벽 사이 한 뼘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다. 황량한 아파트 단지, 그것도 겨울인데, 어디서 물어왔는지 소담스런 지푸라기로 엮어진 제법 아늑한 보금자리다. 집사람은 “배설물 때문에 집 안팎이 지저분해진다”며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세입자 함부로 쫓아내면 벌받는다”고 설득해 그들의 무단주거를 허용키로 했다.
어느날 “이 양반들 잘 계시나” 싶어 둥지를 내려다 볼수 있는 창문을 “삐익” 소리와 함께 열자 비둘기 한 마리가 놀란 듯 후다닥 둥지를 박차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뒷자리엔 예쁜 알 두 개가 다소곳하게 놓여있었다. “오호, 새로운 생명이 우리 집에서 탄생하는 모양이구나”하고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새끼 비둘기들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뿔싸, 어미 비둘기가 그날 이후로 ‘귀가’를 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루, 이틀, 사흘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심심하면 자신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집주인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성가셨나? 그래도 그렇지 자식들을 저렇게 팽개치고 떠날 리가 없을텐데! 그렇다면 혹시, 도심의 차로 위에서 모이를 주워먹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나? 공연히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비둘기 부부는 영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미처 세상구경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된 두 생명이 안타까워 “이불로 품어서라도 부화시키면 안될까”라고 객적은 소리를 했더니 집사람이 대뜸 “말도 안된다. 그런다고 새끼가 탄생하느냐?”라며 핀잔한다. 사실 그렇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孵化)는 다른 생명현상과 마찬가지로 여간 델리케이트한 것이 아니다. 어미 품속 같은 온기만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엔 어미의 시의적절한 도움 행위가 필요하다.
보통 병아리 등 조류 동물의 새끼는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되면 알 안쪽에서 껍질을 쫀다. 하지만 갓 생긴 연약한 부리는 단단한 껍질을 깰 만큼 강하지 못하다. 신호를 감지한 어미가 알 밖에서 껍질을 쪼아 병아리의 탄생을 도와줘야 한다.
이를 ‘쫄 줄(啐), 쫄 탁(啄)’, <줄탁동기(啐啄同氣)>라고 한다. 같은 타이밍에 어미와 병아리가 껍질을 동시에 쪼는 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이때 어미는 그냥 도와줄 뿐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메인 행위는 주인공인 병아리가 해야 한다. 이 <줄탁동기>는 불가에서 수행자의 깨달음 과정과 관련된 핵심 공안(公安*화두)으로 원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스승은 깨우침의 계시만 할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지난 연말 경성대 신방과 종강파티 후 2차 술자리. 한 교수님이 4학년 학생 졸업생들을 상대로 한 고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갈 만큼 여러분을 단련시키지도 못한 채 세상 밖으로 내보내게 되어서… “ 고개를 숙인 그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비쳤다. 일부 여학생들의 눈자위도 붉게 물들여졌다. 그의 고별사는 자리를 함께 한 학생, 교수들을 숙연하게 만들 만큼 울림이 있었다.
나 역시 그 교수님과 공감했다. 경성대 학생들과 인연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들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엷지만 인생 늘그막의 감수성 탓인지 그냥 무턱대고 떠나 보낼 수 밖에 없는 제자들에 대한 석별의 정은 여느 교수들 못지 않았다. “이제 됐다. 하산하거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충분히 가르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 제자 모두를 어디 좋은 직장 자리 잡도록 알선해주지 못한 역량 부족의 자괴심으로,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래서 그날 졸업생 대여섯명과 함께 날이 훤하게 밝아질 때까지 통음했다.
하지만 교수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껍질 밖에서 쪼아주는 ‘탁(啄)’, 즉 깨우침의 계시일 뿐이고 알을 깨고 나오는 ‘줄(啐)’, 즉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학생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4년 동안 학문을 갈고 닦고, 또는 목표를 세운 직장 취업 준비를 철저하게 한 뒤 제 힘으로 세상에 나와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주인공은 학생 자신이다. 교수는 옆에서 도와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때로는 앞에서 이끌어 줄 뿐이다.
내가 방과후 생맥주를 한잔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끔 들려주는 잔소리 교훈으로 <붉은 여왕 효과(Red Qeen Effect)>라는 게 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연유된 것으로 생태계의 쫓고 쫓기는 형평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거울나라에 들어간 앨리스는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달리는데 주변의 풍경들이 계속 그대로다. 이상하게 생각한 앨리스가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빨리 달리면 주변은 뒤로 휙휙 지나가는데..”라고 말하자 여왕은 “너희 나라가 이상하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달리는 속도 이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달린다”라고 말한다.
“지금 세상은 엄청난 경쟁사회다. 너희들이 아무리 죽을똥 살똥 뛰어도 주위 경쟁자들은 너희들보다 더 열심히 뛸 가능성이 있다. 그들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자칫 한눈을 팔면 영원히 낙오된다. 너희들이 열심히 뛰어 세상 밖으로 나올 채비를 갖췄을 때 우리 교수들은 마지막 깨우침의 죽비(竹扉)를 너희들 어깨 위에 내려칠 것이다. 어미 새가 알 껍질을 쪼아주는 것으로 새끼의 탄생을 도와주듯 말이다. .”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학생들의 눈빛이 새로운 각오로 빛나는 것을 본다.

시인 이정록은 <줄탁>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어미의 부리가/닿는 곳마다/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나를 꺼내려는 어미의/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젖은 내 눈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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