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눈물은 이미 바다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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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눈물은 이미 바다를 이뤘다
  • 편집인 강성보
  • 승인 2014.05.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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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신문에 “앵커는 눈믈을 흘려선 안된다”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단국대 신방과 손태규 교수가 쓴 이 칼럼은 이번 세월호 사건 보도에 한국 언론이 지나치게 감정을 노출시켰다고 지적하면서 JTBC 손석희 앵커의 뉴스 진행 도중 눈믈을 예화로 들어 비판한 것이다.

손 교수의 이 지적은 옳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의 유지는 언론인의 절대 규범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언론인은 흥분해서는 안된다. 기자의 감정에 물든 기사는 가치를 상실한다. 기사 속에선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도 가급적 삼가해야 하는 게 언론의 정도다. 언론 학자들은 기사를 쓸 때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고 어떻게 그것이 아름다운지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을 목도하더라도 이를 보도할 때는 “슬프다”고 말해선 안된다. 카메라의 기계적인 작용처럼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기자 자신이 취재 대상인 상황에 감정이입해서는 곤란하다. 환호가 터지더라도 표정을 관리해야 하며, 눈물이 나더라도 속으로 삼켜야 한다는 윤리 지침도 있다.

한 언론학자는 “기자는 담장 위의 파리”라고 비유했다. 담장 위의 파리는 담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관찰할 뿐이라는 것이다.

30여 년 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필자도 이 담장 위 파리의 교훈을 몸으로 배웠다. 80년대 후반 민주화 항쟁 당시 “경찰이 시민들을 무지막지한 곤봉과 지독한 최루탄으로 탄압했다”는 표현을 동원하며 격정적인 기자메모를 썼다가 데스크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았다. 신문에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가두에서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이를 최루탄 등으로 진압했다”는 짤막하고 드라이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한 대통령 선거 개표 과정에서 내가 바랐던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한밤 중 편집국을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다니다가 선배로부터 “네가 기자냐, 선거꾼이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세상만사를 한걸음 물러서서 차갑게 보는 자세에 익숙해졌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대형사고를 보면서도 감정의 파고는 그다지 일지 않았다. 몇 명이 사망하고 부상했는지, 극적인 구조 사례는 어떤게 있는지 등에만 관심이 쏠렸다. 90년대 이산가족 상봉 때도 온 국민이 TV를 보면서 울었지만, 내 눈에서는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는 달랐다.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한 실종자 어머니가 “내 딸을 좀 빨리 구해주세요. 마음이 약한 애예요. 그 추운 바다 속에서 얼마나 무서워할지…”라고 애타게 하소연하는 소리를 듣고 핸들을 부둥켜 안고 그 어머니와 함께 통곡했다. “예은이가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예쁜 모습입니다. 걱정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단월고 학생 희생자 아버지가 시신으로 돌아온 딸을 가슴에 묻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고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 전 아들, 며느리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세월호 사건 얘기가 화두에 올랐다. 아들이 어디에서 들었는지 “배 안에서 찾은 시신들 대부분 손가락이 골절됐다고 합니다”고 했다. 순간 나는 울컥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아들, 며느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이보그 같은 냉혈인간’ 소리까지 듣던 내가 왜 이리 감성적으로 변했을까? 언론사를 떠난 지 수삼 년 되어 다시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한 것일까? 남자도 나이들면 여성 호르몬이 남성 호르몬보다 더 왕성하게 나온다던데, 그 때문일까? 60이 넘으면 소변을 흘리는 요실금처럼,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찔끔거리는 누실금(淚失禁) 증세를 앓게 된다든데, 그 증세가 나타난 걸까? 일전에 고등학교 동기회 홈페이지에 “눈물이 나와서 미치겠다.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글을 올렸더니 한 친구가 “이제 다시 인간이 됐네, 그렇다고 미치진 말거래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눈물이 나와서, 화가 나서 미칠 뻔한 것은 우선 필자 개인의 심경이나 육체적 변화 탓일 게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번 세월호 사건이 가진 참혹한 비극적 요소라 해야 할 것이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선장의 말을 듣고 배 안에서 침착하게 대기하다가 침몰하는 배 속에 갇혔다. 캄캄한 선실 안에서 바닷물이 차오르는 순간, 이들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에어포켓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겨우 코만 공기 속에 내밀어 숨을 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몇몇 남자 학생은 수압으로 꽉 닫힌 철제 문을 밀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들의 손가락은 그 과정에서 모두 탈골됐을 게다. 그러다가 절망 속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아빠. 무서워. 빨리 구해줘” 한 여학생이 가족에게 보냈다는 마지막 문자 한 마디에 온 국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JTBC 손석희 앵커가 시청자 앞에서 눈물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몇 초간 침묵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을 전하던 언저리였을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매끄럽게 뉴스를 진행하기로 이름난 앵커지만 그도 인간인 만큼 찌릿하게 자극되는 누선을 억누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를 굳이 방송사고라고 폄하할 필요는 있을까 싶다.

손석희 앵커 뿐 아니다. 지극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TV토론 사회자로 명성을 날리는 정관용 앵커도 이번 세월호 사건 뉴스를 진행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MBC 기자로 활약하다가 고발뉴스 앵커로 자리를 옮긴 이상호 기자도 구조 현장에서 방송 도중 격앙된 표정으로 대한민국 구난 시스템의 허점을 통박하고, 정부 발표만 그대로 전한 타사 후배 기자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활자로 독자를 대하는 신문들도 기사를 통해, 제목을 통해, 칼럼을 통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과 분노를 표출했다. 한 컬럼니스트는 시신들의 손가락 골절 뉴스에 타고 가던 버스에서 내려 전봇대를 붙잡고 오열했다고 적기도 했다. 손태규 교수가 우려한 것과 같이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의 웬만한 언론은 모두 감정과잉, 흥분상태였다.

그렇다고 한국의 신문과 방송들이 언론의 금도를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이번 세월호 사건이 주는 충격이 크고 깊었기 때문이다. 손 교수의 지적처럼 요즘과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슬픔과 동정, 당황, 분노와 같은 원초적 감정마저 배제한 채 기계적인 보도만 일삼는 기자는 ‘영혼이 없는, 괴물과 같은 언론의 내시’로 힐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또 희생자 가족이 많은 안산에서 실시간으로 전하는 언론들의 ‘인간적인 보도’에 5000만 국민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 눈물들을 모두 모은다면, 세월호가 깊이 수장된 진도 앞바다 만큼은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 하나의 눈물 바다를 이루었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은 남겨두고 자신들만 살자고 세월호를 탈출한 선장과 선원, 그리고 사건 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드러나는 해운 비리와 부조리, 대한민국 재난 시스템의 부실 등에 대한 5000만 국민들의 분노의 총합은 말 그대로 세상을 뒤엎을 만한 규모일 것일 게다.

그래도 그 국민적 분노와 슬픔이 어린 자녀를 잃은 단원고 학부모들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원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단장(斷腸)의 슬픔이라고 했다. 창자가 마디마디 찢어질 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옛 중국 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의 장수 항온(恒溫)이 양자강 상류를 따라 함대를 이동하던 도중 한 병사가 어린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태웠는데,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강 연안을 따라 사흘 밤낮을 쫓아오다 죽어 그 배를 갈라보았더니 창자가 갈기갈기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수학여행을 떠나 보냈다가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 자식을 얼싸안고 통곡하는 단월고 학생들의 부모들, 그리고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진도 팽목항 부둣가에서 실종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아버지들의 애(창자)와 간장도 마디마디 갈라져 있을 것이다. 동진의 장수 항온은 아무 생각없이 어린 원숭이를 잡아 태운 병사에게 심한 매질을 한 뒤 쫓아냈다. 이제 우리도 단원고 학생 희생자 학부모들에게 단장의 슬픔을 안긴 이번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에게 최대한의 징벌을 가해야 할 때다. 사회적 보복 차원 만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회를 보다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통과 절차다.

사고 직후 한 희생자 가족이 라디오에서 울먹이며 말한 “내 아들 버려놓고 자기만 살자고 탈출한 선장이 너무 미워요. 제때 구조 활동을 벌이지 못한 높은 분들도 너무 미워요. 옆에 있으면 정말 패주고 싶을 정도로 미워요”라는 절규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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