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흐르는 피냐, 흘린 피냐?”...전광훈과 코로나, 안익태와 친일파 논쟁 등 한국의 진영논리와 연고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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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흐르는 피냐, 흘린 피냐?”...전광훈과 코로나, 안익태와 친일파 논쟁 등 한국의 진영논리와 연고주의 이야기
  • 정태철
  • 승인 2020.08.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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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적 연고주의에 빠졌다
인권, 정의, 진실 편에서 탈연고주의 노력 필요
"진실은 시와 같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하지만, 실은 모두가 싫어한다"

미국 대선 대진표가 짜졌다. 그런데 미국 대선전이 전과 같지 않다. 코로나 확진자 500만 명, 아프리카 계 미국인 인종차별 문제가 터진 가운데 치러지는 이번 미국 대선은 품위 없는 망발과 인종적 편가르기 풍조로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미국 대선이 ‘정치적 부족주의’라는 언론의 평가가 나올 정도다.

우리나라 정치 상황도 미국 걱정할 처지가 못 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지독하고 고약한 진영논리, 편가르기 이념 논쟁도 속 좁은 정치적 부족주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 검찰개혁, 박원순 극단적 선택, 부동산 문제, 홍수의 원인을 둘러싼 4대강 사업과 태양광 난개발 논란, 그리고 광복절 김원웅 광복회장의 이승만, 안익태, 백선엽 친일 논쟁과 파묘법 쟁점화,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와 코로나 확산 책임론 공방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내 편과 네 편으로 두 쪽이 났다.

원래 혈연, 지연, 학연에 의한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연고주의(nepotism, cronyism)라고 한다. 연고주의는 연줄주의, 귀속주의, 정실주의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편가르기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기반이면서도, 그 작동 방식이 친문, 친박 등 조직화된 팬덤이 그 중심에 있는 정치적 부족주의, 또는 정치적 연고주의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관계(關係)라고 쓰고 ’꽌시‘라고 읽는 단어가 있는데, 이게 바로 중국식 연고주의다. 중국도 이념적 전위대인 홍위병이 발호하던 시대가 있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 대학생 홍위병들이 자기 스승인 교수들을 공산당 이념이 부족한 지식인이란 이유로 포박한 채 조리돌림하는 장면이 어느 다큐멘터리에 나온다. 그중 한 미술학과 교수가 치욕을 못 이기고 연구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자, 충격을 받은 제자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반중 저항 화가가 된다. 다큐멘터리는 중국의 전통적인 꽌시가 홍위병이란 이데올로기 집단의식으로 순식간에 돌변하는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EBS, <회귀의 서곡>). ‘흐르는 피(사제지간)’가 ‘흘려야 할 피(문화혁명)’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원래 한국에서는 고려대,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가 3대 연고주의 사조직으로 회자된 지 오래됐다. 한국의 연고주의에 관한 한 충청도 사람이 덜한 편이어서 충청도 출신 장관이나 기관장이 오면 오히려 충청도 출신 측근들을 멀리 한직으로 발령낸다는 일화가 어느 시사 월간지에 실린 적도 있지만, 우리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연고주의는 주위에 널렸다. 김영삼 대통령을 당선시킨 초원복국집 “우리가 남이가” 사건도 있지 않은가.

서양도 연고주의가 있다. 유학 시절, 가족 간 유대감에서, 미국 가족이 한국 가족보다 약하다고 사회학 수업 중 발표했더니, 한 미국 학생이 “나는 내 엄마를 엄청나게 사랑한다. 그런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마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사람 사는 곳에 팔이 안으로 굽는 격인 학연, 지연, 혈연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서양은 연고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자각이 빨랐다. 최근 트럼프의 편가르기는 미국답지 않은 예외적 현상이다. 원래 서양 역사에서 노예제, 남녀 차별, 농노제, 신분제 등은 사회의 지배구조와 지배 이데올로기였지만, 진영의 편협성과 싸운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 노예해방, 그리고 서프리지(surffrage, 여성 참정권 운동) 등으로 극복된 바 있다.

가족과 사회 정의에서 고민하는 영화 '뮤직박스'에서 변호사 딸로 열연한 제시카 랭(사진: diChroma Photography, 위키미디어 무료 이미지).
가족과 사회 정의에서 고민하는 영화 '뮤직박스'에서 변호사 딸로 열연한 제시카 랭(사진: diChroma Photography 촬영, 위키미디어 무료 이미지).

연고주의에 대한 서양의 이런 전향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영화가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뮤직박스(Music Box)>다. 변호사인 딸이 헝가리 이민자인 아버지를 모시고 미국의 한 마을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돌연 아버지가 2차대전 헝가리 비밀경찰 조직의 일원으로 양민학살 등의 전범이었다는 형사소추를 받게 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이민 서류에 범죄 사실을 숨겼다는 미국 이민법 위반으로 헝가리로 축출되어 헝가리 법정에 서야 한다. 변호사 딸이 아버지 변호에 나서서 무죄를 입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죄 증거를 찾아 헝가리 고향을 방문해서 아버지 지인들을 만나면서 아버지가 전범이었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난다. 어느 아버지 친구가 보내준 뮤직박스(태엽을 감았다가 풀면, 딩동딩동 음악이 연주되는 장난감)를 틀자, 그 안에서 독일군 복장을 한 아버지 사진이 태엽이 돌아가면서 뮤직박스 속에서 나온다. 영화는 변호사 딸이 아버지의 유죄 증거들을 봉투에 넣어 상대편 검사에게 우송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딸은 ‘흐르는 피(혈연)’보다 ‘흘린 피(정의)’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 읽은 오 헨리의 <20년 후(After Twenty Years)>라는 단편소설은 지금도 그 내용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부터 뉴욕 빈민가를 헤집고 다니며 우정을 쌓은 단짝 친구 두 사람이 20년 후 성공해서 다시 뉴욕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헤어진다. 그리고 20년 후, 한 친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 다른 친구를 기다린다. 얼마 후 한 듬직한 뉴욕 경찰 한 명이 순찰 중 담뱃불을 빌려달라는 그에게 불을 붙여주고는 스쳐 지나간다. 그 경찰이 바로 두 명 중 다른 한 명의 친구였으며, 결국 경찰 친구는 20년 전 약속 장소에서 담뱃불에 비친 사람이 그날 만날 친구이면서 수배범임을 알아채고 그 길로 친구를 다른 형사에게 고발해서 잡히게 한다는 게 소설의 결말이다. <뮤직박스>의 결말도 그렇고, <20년 후>의 결말도 우리 한국 사람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서구는 이처럼 연줄이나 진영에서 벗어난 스토리가 많다. 연고와 정실에 얽혀 진실, 정의, 인권을 보지 못했던 문제가 예를 들면 흑백문제다. 그러나 흑인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은 백인 링컨이었으며, 영화 <헬프(The Help)>에서 백인 주인들에 갑질당하는 흑인 하녀들의 애환을 소설로 폭로한 사람은 백인 여기자였다.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에서 수학 영재 흑인 여성의 천재성을 발휘해서 아폴로 발사에 기여하도록 나사(NASA) 내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한 사람도 백인 책임자였다.

그러나 한국의 온정주의 역사는 깊고, 한국 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며, 국민 정서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전설적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은 몰락한 양반의 자제였다. 그는 홍경래의 난 때 홍경래에게 항복한 역적 김익순(당시 함경도 선천의 부사)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답안지를 작성해서 과거급제한다. 그러나 김익순은 김병연 자신의 할아버지였고, 과거 가족사를 모르고 숨어 지냈던 김병연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자신을 하늘을 볼 자격이 없는 패륜아로 자칭하면서 하늘을 가리는 삿갓을 쓰고 평생을 방랑하다 객사한다. 그는 진실보다는 인륜을 더 중시했기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현행 국보법 불고지죄는 간첩으로 넘어온 북의 친척이나 피붙이를 고발하지 않으면 잡히는 법이니 한국인에게는 천륜을 어기라는 악법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에 연고가 있는 사람을 일부러 간첩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연고주의를 공산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6년 좌파세력이 일으킨 대구 10월 사건으로 경찰에 사살된 친형 박상희의 친구들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 박상희 친구 중 한 명인 황태성은 후에 북으로 갔다가 5.16 직후인 1961년 8월 서울로 잠입,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려고 동네 사람들이었던 박정희 친인척에게 접근했다가 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박정희의 친척들은 한국전쟁 직후였으니 북한의 의도와는 달리 연고주의보다는 반공의식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산업화가 진행되고 공동사회가 이익사회 중심으로 변하면서, 연고주의에 변화가 생겨 공익제보자가 다수 나타났다. 소속 조직 입장에서 보면 변절자나 배신자지만 노태우 때 군부대 부재자 투표 부정행위를 폭로한 이기문 중위도 있었고,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리 혐의를 폭로한 김태호 수사관, 청와대가 정무적 이유로 국채발행을 강요했다는 재정부 신재민 사무관, 참여연대의 입장과는 달리 반조국을 택한 김경률 회계사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맹폭하고 있는 진보 논객 진중권, 조국 사태 때 일부 한겨레 젊은 기자들의 편집 방향 반대 움직임, 정의연과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경실련의 행보 등이 탈연고주의의 희망을 보여준다.

사실, 공익제보자, 즉 리커(leaker)는 정보에 의해 여론이 형성돼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정보 기반 민주주의(informed democracy)’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닉슨 대통령을 사임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미국 정부가 미군 희생자 수를 속이면서 월남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월남전 극비문서를 NYT와 워싱턴 포스트 지가 보도해서 세상에 알린 펜타곤 페이퍼 사건도 내부고발자인 리커로부터 시작된 언론 자유의 승리였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말이 왠지 연고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충성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월성 1호기 감사를 놓고 정부 및 여당과 갈등을 빚고 있는 최재형 감사원장도 결국 진실이냐 조직의 이익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선 듯하다.

연고주의가 기업에서는 단합의 장점도 있고, 인간사에서는 의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중학교 때 겪은 사건이 하나 있다. 수업 중 친구가 장난을 치다가 선생님께 들켜 앞으로 불려가 손바닥을 몇 대 맞고 들어가면서, 판서하려고 칠판 쪽으로 몸을 돌린 선생님 등 뒤에서 ‘주먹감자(주먹과 팔뚝으로 하는 욕으로, 지금으로 치면 미국식 손가락 욕)를 먹였다. 다른 학생들이 “와!”하고 웃었고, 선생님은 아이들이 웃는 소리에 느낀 바가 있었는지, 반장이었던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방금 들어간 놈이 무슨 짓을 했지?”라고 나에게 물었다. 교실은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에 싸였다. 내가 이실직고하는 순간, 그 친구는 죽도록 맞든지 아니면 최소 정학을 당하지 않았을까? 몇 초가 흐른 뒤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가 자리에 들어가면서 혓바닥을 쭉 내밀어서 친구들이 웃었습니다”라고. 선생님은 내 말을 믿으셨던지(아니면 믿는 척해주신 건지) 더 이상의 진실을 캐묻지 않으셨다. 곧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친구들이 나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하이 파이브를 퍼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 순간에 그런 답을 생각했냐? 네가 우리 반을 살렸다.” 당시에 그런 일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단체 기합을 받게 마련이었다. 선의의 거짓말도 때로는 필요한 게 인생인가 보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는 곧 국가의 일 아닌가. 환한 대낮에 정치인들의 입에서 뻔뻔한 연고주의가 돌출해서야 되겠는가. 물불 안 가리고 적과 동지만 남아서 죽고 죽이는 피의 조선시대 당파싸움이나 마피아 영역 싸움 같은 2020년 진영논리는 나 같은 정치 혐오자에게는 어서 직을 마치고 은퇴해서 초야에 묻힐 꿈을 재촉한다.

거액 사기꾼이 판치는 월가(Wall Street)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을 다룬 영화 <빅쇼트>에 나오는 명대사가 생각난다. “진실은 시(詩)와 같다. (겉으로는 시를 좋아하는 척하지만) 젠장, 실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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