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의 책과 사람]⑰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다-퇴계 이황
상태바
[김윤환의 책과 사람]⑰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다-퇴계 이황
  • 김윤환
  • 승인 2019.12.29 0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광도서 대표 김윤환
영광도서 대표 김윤환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 도산에서 진사 이식의 여섯 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의 아버지는 서당을 지어 교육하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퇴계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4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퇴계를 굽어보는 곳에 몇 칸 규모의 작은 집을 지어서 책을 간직하고 소박한 덕을 기를 곳으로 삼고자 했다. 퇴계 가는 지나치리만큼 고요하기는 하지만 마음을 활달하게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터를 옮기기로 작정하여 도산의 남쪽에서 이 땅을 얻게 되었다. 앞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고요하며 넓을 뿐더러 바위와 산기슭이 매우 밝고 돌우물이 달고 차가우니 세상을 피해 자신을 가다듬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제야 비로소 속세의 울타리에서 몸을 빼내 시골 생활에서 본분을 찾았다. 자연을 벗 삼은 즐거움이 내 앞에 다가왔다.’

살 곳을 정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나는 팔리기를 기다리는 물건과 같다’라고 고백했던 공자나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는 맹자와 달리, 퇴계는 20여 차례나 관직을 사양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산새’라는 별명을 붙여 조롱했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깔보며 자신만 편하게 지낸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대학자였던 고봉 기대승이 관직에 나오지 않는 연유가 무엇인지 묻자, 퇴계는 ‘자신이 몸을 바쳐야 할 곳에서 의(義)가 실현될 수 없다면 당장 물러나야 ‘의’에 위배됨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명종실록>에는 그가 관직을 그만둘 때 집에는 좁쌀 두어 말밖에 없었으며 하인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관직에 제수되어 상경할 때는 의관을 마련하지 못해 다른 사람이 빌려 주겠다고 나설 정도였다고 한다. <중종실록>에는 사림 중에 성리학 연구와 문장 수준에서 ‘이황을 앞설 사람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은 정신을 차려 셀 수 없이 반복해 읽어야 한다. 한두 번 읽고 그 뜻을 대략 깨닫고 덮는다면, 몸에 충분히 밸 수 없다. 또한 마음에도 간직할 수 없다. 알고 난 뒤에도 몸에 배도록 더 깊이 공부해야만 비로소 마음에 오래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런 뒤에야 학문의 참된 의미를 경험하여 마음에서 기쁜 맛을 느낄 수 있다.’

'독서는 산놀이와 같다고 하는데

이제 보니 산놀이가 독서와 같네.

낮은 데서부터 공력을 기울여야 하니

터득을 하려면 거기를 거쳐야지

구름 이는 것 봐야 오묘한 이치 알고

근원에 당도해야 시초를 깨닫지.

꼭대기 높이 오르도록 그대들 힘쓰오.

노쇠하여 포기한 이내 몸이 부끄러워라.'

퇴계의 독서론이다.

퇴계는 죽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강론을 했다. 사망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 4일,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가르침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이날 퇴계는 조카 이영을 불러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사양해야 한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간단히 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銘)을 쓰도록 해라."

퇴계는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 됐는데도 유언을 남겨 이를 사양했다. 단지 4언 24구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퇴계는 96자의 한시로 자신의 삶을 압축했다.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장황하게 쓰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세상을 뜨던 날 평소 애지중지했던 매(梅)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뒤 일으켜달라고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사망했다.

퇴계가 사망하자 율곡 이이는 제문(祭文)에서 ‘물어볼 데를 잃고 부모를 잃었도다! 물에 빠져 엉엉 우는 자식을 뉘라서 구해 줄 것인가!’라며 정신적·사상적 거처를 잃게 됐음을 애통해 했다.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 선비 퇴계 이황, 나아감과 물러남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큰 스승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