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의 책과 사람]24-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마오쩌둥(毛澤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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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의 책과 사람]24-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마오쩌둥(毛澤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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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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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영광도서 대표
김윤환 영광도서 대표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한반도의 운명과 뗄 수 없는 존재다. 공자, 맹자의 나라, 임진왜란에는 원군을 보내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조선의 국왕을 꿇어 앉혔다.

한국전쟁 중에는 중공군의 위력을 보여 주었으며, 분단의 핵심 세력이었다. 개혁 개방 이후에는 한국관광객이 중국으로 몰려갔고 이후 중국 관광객이 인해전술로 밀려왔다. 적과 친구 관계를 넘나든 나라가 중국이다.

천안문 광장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은 분열되어 힘을 잃었던 중국을 다시 통합하여 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분열된 중국을 통합하여 국제사회의 강대국으로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흑역사에 대해 중국인들은 공 7 과 3으로 공이 더 많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자 중국 공산당 정부에 대한 비판이 된다.

중국 천안문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초상화(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중국 천안문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초상화(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마오는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湖南) 성 창사(長沙) 남서쪽 사오산(韶山)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마오의 형제는 7명이었다. 이중 아들 셋만 살아남았다. 마오는 살아남은 삼형제 중 맏이였다.

여덟 살 때 마을 서당에 입학해 글을 배웠다. 당시 중국의 모든 농촌에서 그랬듯이 농사일도 했다. 서당에서 5년간 유학을 배운 마오는 열 세 살 되던 1907년, 이웃 마을 뤄(羅)씨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다. 마오 부부는 2~3년 동안 함께 농사를 지었으나 아내는 스물 한 살에 죽고 말았다.

마오는 1910년 집을 떠나 인근에 있는 샹탄(湘潭)이란 도시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한 법학도와 중국학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 마오는 다양한 독서를 했다. 이때 읽은 책 중 하나가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다룬 <중국의 분할>이다.

1910년 샹탄 가까이에 있는 샹샹(湘鄕)중학교에 입학한 마오는 본격적으로 세계정세를 공부했다. 마오는 자신이 샹샹중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급진적이고 서양의 신지식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에 대한 열정이 불붙기 시작한 마오는 샹탄으로 온 지 불과 몇 달 만에 성도인 창사로 가 창사의 한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마오는 청 황실에 반대하며 혁명당을 조직한 쑨원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에 관한 글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1912년 2월 청조가 멸망했다. 마오는 1913년 가을 창사사범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창사의 공공 도서관에 틀어박혀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훗날 마오는 이때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이 시기에 마오는 처음으로 서구의 정치 이론을 진지하게 학습했다. 그 무렵 그가 읽은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다윈의 <진화론>, 허버트 스펜서의 <논리학> 등이다. 그 밖에 존 스튜어트 밀, 루소, 몽테스키외 등도 스무 살 마오가 읽은 책이었다.

창사사범학교에서 마오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인 교사 양창지(楊昌濟)를 만났다. 마오는 양창지에게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배웠다. 1918년 창사사범학교를 졸업한 마오는 양창지가 베이징대 교수가 되자 그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했다. 사서 보조로 일하는 동안 사서 리다자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다자오는 베이징대학 교수들과 만든 잡지 <신청년>에 세계 각국의 정치 정세에 대한 글을 싣고 있었다.

마오는 <신청년> 1918년 10월호에 실린 리다자오의 글 ‘볼셰비즘의 승리’라는 글을 읽고 볼셰비키 혁명(1917년) 이후 소련에 들어선 혁명적인 새 질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리다자오는 당시 중국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볼셰비즘을 소개하면서 정기적으로 혁명 이론을 토론하는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결성했다. 물론 마오는, 이 연구회는 물론 베이징의 지식인 그룹에 끼지 못했다.

‘나는 정치와 문화를 주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은 워낙 바빴다. 그들은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서 보조원의 말을 한가롭게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마오는 대장정(大長征) 때도 책을 품고 다녔다. 1947년 연안에서 철수할 때 그동안 읽었던 책을 단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베이징으로 옮겼다.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류사오치(劉少奇)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말에 류사오치는 ‘하루라도 책을 놓으면 마오에게 뒤처진다’며 서로 독서를 격려했다.

마오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텐안먼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났다. 중국의 영웅이자 독재자 마오는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 주었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된다. 1981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중국 정부에서는 마오의 문화대혁명은 내란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어쨌든, 마오가 독재자로 비난 받지 않고 혁명가, 사상가, 현대 중국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이유는 끊임없는 독서, 왕성한 독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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