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시
<漫成(만성) 편하게 쓴 시>
平生事可噓噓已(평생사가허허이) 한평생의 일들에 한숨만 나올 뿐인데
浮世功將矻矻何(부세공장골골하) 뜬구름 같은 세상 부귀공명 힘써 무엇 하나.
知子貴無如我意(지자귀무여아의) 알겠노라, 그대는 귀하여 나같은 뜻 없음을
那須身上太華誇(나수신상태화과) 어찌 몸이 태화산에 올라 과시해야만 하는가.
<種竹山海亭(종죽산해정) 산해정에 대나무를 심고>
此君孤不孤(차군고불고) 이 대나무 외로운 듯 외롭지 않아
髥叟則爲隣(염수칙위린) 소나무 있어 이웃이 되기 때문이라
莫待風霜看(막대풍상간) 바람과 서리 기다려 보지 않아도
猗猗這見眞(의의저견진) 싱싱한 모습에서 그 참다움을 보노라
<偶吟(우음) 우연히 지은 시>
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사람들이 옳은 선비 좋아하는 것이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호랑이 껍질을 좋아하는 것과 같구나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살아 있을 때는 죽이고 싶지만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죽은 뒤에는 훌륭하다 칭찬하는구나.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이 태어났다.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다.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갔다. 남명은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는 공부해서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다.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유학자들은 학문을 이룬 뒤 벼슬에 나가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이를 '군신지의로' 간주했다.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을 불의로 여겼다. 남명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양하여 군신지의를 저버렸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남명은 꼭 벼슬에 나가 왕을 돕는 데만 군신지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며, 대도(大道)에 입각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도를 후세에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다. 미수 허목이 남명 선생 신도비문(神道碑文)에 ‘늘 뜻을 드높이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며, 구차스럽게 조정의 요구에 따르지도 않거니와, 또한 구차스럽게 정치의 잘못을 묵과하지도 않는다. 자기의 몸값을 가벼이 하여 세상에 쓰임을 구하지 않아 고고한 자세로 홀로 우뚝 섰다’고 했다.
남명 조식은 선비였다. 선비였지만 평생 칼을 차고 다녔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땐 시퍼런 칼을 책상머리에 두었다. 한 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칼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칼과 함께 쇠로 만든 방울도 항상 품고 다녔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방울은 요란하게 울렸다. 그때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다. 방울 또한 그의 칼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다. 한 번 결심을 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리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신에게도 용서 없이 질책했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조식은 덕천 강가에 세심정을 짓고 살며, ‘저 무거운 종을 좀 보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허나 그것이 어찌 지리산 만하겠소.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같은 시를 지었다. 지리산을 ‘무거운 종’으로 여기고 그 지리산을 닮고 싶어했다. 지리산 천왕봉 주위에 살고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남명은 72세에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옹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했다.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했다.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런 남명이 차갑고 냉철한 선비이기만 했을까. 풍류가객이기도 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명종 임금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런 시조를 지었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