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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에서 평화의 성지로...트럼프는 과연 판문점 올까강동수의 자투리시사인문(43) 북미회담 후보지로 떠오른 판문점 65년의 모든 것

1.

편집국장 강동수

판문점이 연일 세계적 뉴스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이곳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이미 구문이다. 당시 두 정상이 함께 한 12시간 동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것도 다들 아는 일.

한국의 방송사는 물론 CNN 등 세계적 뉴스채널들도 당일 많은 시간을 할애해 판문점 발 ‘핫뉴스’를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송출했다. 세계 각국에서 3000여 명의 기자들이 정상회담 취재에 나섰고 일산 킨텍스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엔 내외신 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대형 모니터를 지켜보면서 바쁘게 기사를 송고했다.

어쨌든 4월 27일 판문점은 세계적 뉴스의 발신지가 됐다. 그런데, 판문점이 그날보다 더 큰 뉴스의 산실이 될 수도 있을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열릴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로 판문점을 강력하게 꼽았기 때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 “우리는 싱가포르를 포함해 다양한 나라들을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살펴보고 있다”며 “한국 비무장지대의 (판문점) 평화의 집, 자유의 집에서 열 가능성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내가 매우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나는 제3국이 아닌 그 곳(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선호한다. 그 곳에서 일이 잘 풀린다면 정말 축하할 만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과 비무장지대에서 미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문제를 논의했으며 문 대통령이 이를 북한 측에 전달했다고도 밝혔다. 이와 관련해 CNN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의 판문점 개최에 동의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북미정상회담에 정통한 관계자를 인용해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미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여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고, 김 위원장 역시 판문점이 최고 회담 장소라는 데 뜻을 함께 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도 이 같은 보도를 적극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을 북미정상회담 개최 후보지로 언급했다는 보도와 관련해 “(북미정상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결정됐는지는 모른다”면서도 “판문점이 분단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분단을 녹여내고 새로운 평화 이정표를 세우는 장소로서 판문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판문점 남측 지역을 북미회담장으로 권유해 김정은의 동의를 받은 후 28일 밤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이곳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의 권유를 받은 다음 판문점을 유력한 회담 장소로 고려하게 됐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 CNN은 1일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문재인, 김정은 두 사람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12시간 동안 회담과 각종 이벤트를 연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도 그런 방식으로 세계에 노출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보도했다.

현재까지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거론된 곳은 싱가포르, 울란바토르, 스위스 등이었지만 막판에 판문점이 강력하게 부상한 셈인데,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판문점에서 열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판문점은 장소 자체는 좁지만 주한 미군이 근접해 있어 미국 대통령의 경호 등에도 나쁘지 않다. 특히 한국전쟁 정전협정의 당사자들이 협정이 체결된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모여 종전을 선언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이벤트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만일, 판문점이 ‘트럼프-김정은 회담’ 장소로 확정되고, 담판 끝에 역사적인 대타협이 이루어진다면 판문점은 분단의 현장이 아니라 ‘평화의 성지’로 거듭날 것이다. 한국에서 북미회담이 열린다면, 중재자로서의 한국과 문재인 대통령의 위상도 한층 더 올라가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2.

그렇다면, 이참에 판문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상징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아시는 대로 판문점은 남북 분단의 현장이자, 남북이 대치한 전초기지로 커다란 역사적 상징성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아닌가.

판문점의 원래의 행정명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였다.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판문점리다. 위치로는 서울 서북쪽 48㎞, 개성 동쪽 10㎞, 평양 남방 약 180㎞, 북위 37°57′20″, 동경 126°40′40″, 긴 지름 1㎞, 짧은 지름 800m인 타원형 구역이며, 한복판에 휴전선이 있다.

우선, ‘판문점(板門店)’이란 지명의 유래부터.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송림현(松林縣)이었던 곳으로 조선 태종대에 장단군에 편입됐으며, 송림현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송남면(松南面)으로 불렸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엔 이 지역이 개성부(開城府)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이 부근에 널문다리(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란 설과 이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쫓겨 선조가 의주로 피란할 때 이곳에 이르자 백성들이 널빤지 대문을 떼어다가 다리를 놓아 왕이 건너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엔 개성군의 일부 지역과 합쳐 장단군 진서면(津西面)이 됐다.

어쨌거나, 6·25 전에는 초가집 4채만 있던 외딴 마을이었던 이곳은 1951∼53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처음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휴전회담은 장장 1년 9개월을 끌었다. 휴전협정 조인을 위해 부근에 목조건물을 지었으며, 그 후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했다. 1953년 7월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국제연합 측과 북한 측의 '공동경비구역'이 되었으며, 그해 8∼9월에는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초 1951년 7월 8일과 10일 처음 열린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은 개성에서 열렸다. 그러나 개성지역은 당시 공산군 치하에 속했다. 예비회담에서부터 양측의 신경전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중국 왕조 전통상 남면(南面), 즉 황제가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이란 것을 안 유엔군 대표단이 먼저 회담장의 남쪽을 향해 앉아 기선을 제압하자 북측은 승자의 하사품임을 암시하는 다과를 내놓았다고. 10일의 본회담에서도 공산군 측은 유엔군으로부터 노획한, 총알자국과 핏자국이 묻은 낡은 지프를 유엔군 대표단에게 제공했는가 하면, ‘안전 보장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지프에 백기를 달게 했다. 북한군은 ‘만세’를 연호하면서 유엔군 지프를 몰고 다니며 유엔군이 항복하러 온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고.

결국 옥신각신 끝에 ‘쌍방 접촉선의 중앙 부근에 개성·문산 사이의 중립지대인 판문점 근처가 적격’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던 것. 1951년 10월 7일부터 널문리에서 계속된 휴전회담은 본회의 159회 등 총 765회의 회의를 거쳤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군사정전 협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휴전협정을 조인했던 것.

북쪽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앞에 보이는 건물이 남한의 '평화의 집'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휴전협정에 따라 판문점은 유엔군과 공산군(북한군·중국인민지원군)의 적대쌍방(敵對雙方) 각 5명씩의 장성급장교로 구성된 군사휴전위원회의 본부구역으로 설정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가 됐다. 이곳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본부가 설치돼 있으며, 중립국인 스웨덴·스위스(유엔군측 지명)와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공산군측 지명) 등 4개국 감시위원이 상주하고 있다.

최초의 회담 장소인 널문마을에 이어 휴전협정조인을 위해 약 200평의 목조건물(북한은 ‘평화의 전당’이라고 함)을 마을 부근에 세웠고 협정 조인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 세 번째의 장소. 현재의 회담장소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으나 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게 되고, ‘자유의 집’(1965)과 ‘판문각’(1968) 등 콘크리트 건물도 세우게 되었다. 1980년대엔 남북대화의 빈도가 잦아지자 ‘평화의 집’(남쪽)과 ‘통일각’(북쪽) 등 남북대화용 건물도 세워졌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북측 판문각(사진: Driedprawns at en.wikipedia).

3.

정전협정 조인 후 65년이 흐르는 동안, 판문점은 숱한 사건, 사고와 에피소드를 낳았다. 애초엔 반경 1000야드(914.4m)의 원형구역 안에서는 군사분계선 표시도 없었다. 쌍방 경비군인들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실수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1954년 2월 5일 미군의 피터스 중령이 탄 군용비행기가 북한에 착륙했지만 몇 달 후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시인도 하지 않은 채 인수증도 없이 기체와 함께 돌아왔다. 1955년 8월 번파스 공군 소위도 T-6 조종실수로 북한 영공을 침입했다가 격추됐다. 그러나 역시 4일 만에 인수증 없이 돌아왔다고.

그러나 1962년 9월 5일 돌발사건으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추석을 맞은 남북한 경비병들끼리 술판을 벌였다. 사실 남북한 병사들끼리 이런 조우는 가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은 거나하게 취하자 병사들끼리 언쟁이 벌어져 급기야 총격전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북한군 사병 3명이 사망하고, 장교 2명이 다쳤다. 한국군 병사 몇 명도 다친 것으로 보고됐다.

냉전이 계속되면서 판문점은 점점 체제 경쟁의 무대로 변질돼 갔다. 1961년 초 북한 측이 비교적 큰 규모의 초소를 언덕 위에 세웠다. 1964년 10~11월 사이엔 이른바 ‘평화의 파고다’라 해서 파고다 모양의 휴게소까지 지었다. 그러자 유엔군 측은 “북한의 파고다보다 훨씬 보기 좋은 시설을 세운다”며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자유의 집’이다. 1970년 북한 측은 ‘파고다 공원’을 철거하고 그 언덕 위에 ‘판문각’을 세웠다.

판문점을 분단의 갈등과 대결의 장으로 만든 가장 큰 사건은 역시 1976년 8월18일의 ‘도끼만행사건.’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인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국군 병력 다수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 그것이다.

유엔군 측 주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미군은 북조선 3개 초소를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이를 제거하기로 했다.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 등 병력 11명이 경비하는 가운데 노무자 5명이 작업을 벌였다. 이때 북한군 15명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했지만 미군 측이 강행하자 북한군은 트럭을 타고 온 추가병력과 함께 미군과 국군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던 것.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사망했고 나머지 한미군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도끼 만행 후 주한 미군의 판문점 미루나무 제거작업(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국 백악관은 국무부와 함께 “이 사건의 결과로 빚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그 책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다”는 공동성명을 당일에 발표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한편, F-4, F-111, B-52 폭격기, 미드웨이호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무력시위 계획을 수립했다. 미국 본토에서도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됐다.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순양함 등의 중무장한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했다.

일촉즉발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자 북한은 납작 엎드렸다. 김일성은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유감을 표한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표명했다. 이 사건으로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도 군사분계선을 두고 남북이 나눠서 판문점을 경비하게 됐다.

그렇다고 판문점이 대결과 갈등으로 얼룩진 것만은 아니다. 이곳이 남북대화의 현장으로도 활용됐던 것. 1971년 8월 12일 남측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북측에 제의해 같은 해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첫 적십자사 간 접촉을 시작됐다. 이후 1992년까지 20여 년간 70여 회(본회담 10회, 예비ㆍ실무회담 60여 회)의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2000년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8ㆍ15에 즈음한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합의된 이후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2000년 6월 개최되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한 전대협 소속 임수경 학생과 문익현 신부가 귀환한 곳도 이곳이었고, 1998년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소떼를 태운 50여 대의 트럭을 이끌고 통과한 곳도 판문점이었다.

1998년 10월 27일 50개의 트럭에 실린 501마리의 소를 몰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방북하는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4.

판문점을 소재 삼아 분단의 비극을 그려낸 예술 작품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이호철의 소설 <판문점>과 박찬욱이 감독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일 터. 60년대까지는 대중가요에도 판문점이 자주 등장했다. <비나리는 판문점>, <판문점의 달밤> 같은 노래들이 실향민의 슬픔을 달랬던 것.

1961년 '사상계' 3월호에 발표된 이호철의 <판문점>은 분단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판문점으로 취재 간 남한 통신사 기자 ‘진수’가 북한 여기자와 만나 겪는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그들은 상대 체제에 대한 가벼운 입씨름을 벌인다. 장대비가 내리자 그들은 빈 지프차에 숨어들어 간다. 차 안에서 그들은 감정의 흔들림을 겪는다. 북한의 여기자는 남한의 기자에게 월북을 권유하기도 한다. 여자가 발작적으로 울자 여자를 풀어준 진수는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녀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판문점으로 취재 기회를 만들어 가지만 그 곳에서 재회한 그 여기자는 사뭇 냉랭한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 이 소설엔 이런 인상적인 구절도 나온다.

“진수는 한 2백 년쯤 뒤 판문점이란 고어로 ‘板門店’이 되리라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백과사전에 실릴 판문점에 대한 내용들을 떠올렸다. 판문점은 이 나라 북위 38도 선상 근처에 있었던 해괴망측한 잡물로 기억될 것이고 민족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좀먹는 곳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인훈의 기념비적 소설 <광장>에도 판문점이 나온다. 전쟁포로였던 주인공 이명준이 판문점에서 남북한 심사관들로부터 남한, 또는 북한행 회유를 받는 장면이다. 남북한의 현실에 절망했던 주인공 명준은 단호하게 제3국행을 선언한다. 하지만 제3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바다에 투신해 자살한다는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다.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JSA>는 판문점에서 경계를 서는 남북한 군인들의 은밀한 우정을 소재 삼아 분단의 비극을 고발한 영화다. 공동경비구역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나 북한 병사 정우진(신하균 분), 최상위(김명수 분)가 죽고, 오경필(송강호 분)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남한 병사 이수혁(이병헌 분)은 군사분계선 위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다. 사건에 대해 남북한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수사를 위해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책임수사관 소피(이영애 분)가 파견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다 우거진 갈대밭에서 지뢰를 밟아 대열에서 낙오한 이수혁은 북한군 오경필과 정우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수혁은 이를 계기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초소에서 이들과 만나면서 우정을 키운다. 그러나 어느 날 북한군 최상위에게 발각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마침내 북한 초소에서 총성이 울린 것. 초코파이를 나눠 먹는 남북병사의 친교가 인상적인 이 영화엔 당시로선 엄청난 관객 584만 명이 들었다.

 

5.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하고 함께 ‘판문점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판문점은 이미 한반도 평화의 산실이 됐다. 어쩌면 판문점은 곧 전 세계적인 주목을 다시 받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 최강국 미국 대통령이 찾아와 적대국이었던 북한의 수뇌와 담판을 벌여 세계의 골칫거리인 ‘북핵 폐기’라는 역사적 전환을 이루는 현장이 될 수도 있는 것.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타결된 후 문재인 대통령까지 마무리 모임에 참석해 남북·미 3국 정상이 함께 건배하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겠다. 남북한과 미국이 세계의 마지막 분단지역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선포하는 감격적인 장면이 과연 연출될 수 있을 것인지 8000만 한민족이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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