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전주 ‘길 도서관’의 신선한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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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전주 ‘길 도서관’의 신선한 길 찾기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1.04.0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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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대한민국 최초 ‘길 도서관’ 추진
길의 시대… 걷고, 보고, 찾고, 배운다!
길 자산 보면 부산이 전주보다 휠씬 풍성
‘유라시아 게이트웨이 길 박물관’ 논의해보자

지난달 전북 전주시의 ‘길 도서관’ 추진 자문회의에 참석했다. 화상회의라서 앉아서 전주를 다녀온 셈이다. 길 도서관? 처음엔 의아했다. 길을 주제로 한 도서관? 길을 찾는 도서관? 길 테마 박물관? 길을 불러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세상사, 문명사, 인간사가 모두 길이고 길을 찾는 과정인데…

가볍게 생각하고 회의에 참석했다가, 몰랐던 큰 길 하나를 배웠다. 자문회의에는 내로라는 국내 길 전문가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간단한 영상 인사를 나누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토론이 시작됐다. 막연하기만 하던 길이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길에 대한 의미 부여부터 자신의 체험, 걷기여행 경험, 그리고 살아가면서 맞딱뜨린 난관과 험로, 앞으로 가야할 길까지 다양한 층위와 무늬의 길 이야기가 화상을 장식했다. 당시 회의의 주요 발언을 잠깐 소개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발상이 좋다고 봐요. 길 도서관, 이런 게 대한민국에선 처음이거든.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란 거죠. 가장 소중한 것은 길 위에 있다고 하잖아요. 문화도시 전주가 새로운 길 하나를 내고 있어요. 시야를 넓히면 큰 게 보여요(신정일 (사)우리땅걷기 대표)."

“길 도서관에 채울 수 있는 유무형의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고 봐요. 역사속에서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길도 많고요. 왕이 다니던 길, 사신이 오간 길, 병자호란때 민초들이 끌려간 길 등등. 이제 머리와 발이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길은 나와 너, 우리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봐요.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연결이 정말 중요한 가치라는 걸 깨닫죠. 코로나 시대, 4차산업시대에도 연결은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담아내는 도서관, 아 탐나는데요(한비야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길? 왜 전주여야 하죠? 역사성과 당위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길을 다 담을 수는 없어요. 가닥(주제)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전주에서 할 수 있는 방법, 범위를 잘 찾아야 성공합니다(이정덕 전북대 글로벌융합대학 학장)."

#길, 지혜의 연결 

길에 관해 얘길 하고 듣자니 상상력과 영감이 마구 마구 분출했다. 지식의 쓸모와 쓸모없음, 앞서 걸어간 선인들의 발자취, 세상의 유명한 길들,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고뇌, 걷기 교육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길 도서관의 슬로건이 될만한 문구도 제시되었다.

*세상의 모든 길(all-that-path)! 길의 도시 전주!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박노해)

*당신은 지금 길 위에 있습니다!

*길에서 걷고, 보고, 찾고, 배운다!

사전에서 ‘길’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의미가 40여 가지 나온다. 그만큼 다채롭고 복합다의적이다. 길에는 대체로 ▶삶(인간, 도리) ▶여정(여행, 걷기) ▶지향(목적, 방향)의 의미가 녹아 있다. 콘텐츠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길의 내력(역사, 인문학) ▶길과 문화(책, 예술, 노래) ▶길과 사람(길라잡이, 보행도시) 따위의 분류가 가능하다.

갈래를 쳐보면 길 속에, 길 위에 녹아있는 의미와 가치,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실체적 관광 콘텐츠도 건질 수 있다. 더 많은 생태적·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는 달리 말해, 21세기의 집단지성이 틈입해 도서관의 새 길, 큰 길 하나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설레고 가슴 뛰는 일을 전주시가 하고 있다.

전주시가 추진 중인 국내 최초의 '길 도서관' 조감도(사진: 전주시 제공).
전주시가 추진 중인 국내 최초의 '길 도서관' 조감도(사진: 전주시 제공).

#전주 한옥도시 키울 콘텐츠

전주시의 길 도서관 사업은 문화도시 전주로 가는 큰 디딤돌이다. 전주시는 완산구 동서학동 일원의 부지 8046㎡에 무형유산 복합문화시설(전수관, 도서관, 행복주택)을 추진 중이다. LH가 참여하며 사업 예산 382억 원은 대부분 국비다. 이곳의 핵심시설은 교육·체험·전시·편의시설을 갖춘 길 도서관이다. 지역사회에서 논의를 거쳐 도출한 콘셉트라고 한다.

전주는 조선 9대 도로 중 2개(삼남대로, 통영대로)가 지나는 요충지다. 길 도서관 예정지는 옛 역참이었던 반석역 자리다. 인근에 전주의 효자 한옥마을이 있다.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000만 명이라니 이 중 10%만 불러와도 길 도서관은 존재 의미가 있다. 한옥마을로선 날개를 다는 셈이고, 길 도서관으로선 한옥마을을 품는 셈이다.

길 도서관 구상은 '현대판 김정호'라 불리는 신정일 (사)우리땅걷기 대표의 ‘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주에 사는 신 대표는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 문화사학자, 길 도사, 자연대학 총장 등으로 불리는 그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와 길, 걷기와 관련한 저서 100여 권을 펴냈다. 걷기로 보자면 아마 조선의 이중환('택리지')이나 김정호('대동여지도')보다 더 많이 걸었을 것 같은 위인이다.

첫 회의에서 신 대표는 전주 길도서관 자문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 끝에 도출된 전주 길도서관의 추진 방향은 ‘길 문화 도서관’으로, 주제는 ‘지혜의 연결’로 대강의 가닥이 잡혔다. 2차, 3차 자문회의가 이어지면 방향과 정체성이 분명해질 것이다. 

#부산의 풍성한 길 자원은 어디에 쓰나

회의 말미에 ‘부산의 길 자원’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신 대표가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길이라면 부산이 더 할 얘기가 많지 않나요? 영남대로와 임진왜란 침공로, 조선통신사가 오간 한일 뱃길, 관부연락선, 경부선 철로, 세계로 열린 바닷길, 항공로 등 육해공 모든 길을 갖고 있잖아요. 정작 부산에서 길 도서관이나 박물관 건립이 논의돼야 하는데…”

아차! 싶었다. 콘텐츠 선점 차원에서 부산이 전주에 밀린 게 아닌가. 길 자원 측면에서 보면 부산은 전주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운 자산을 갖고 있다. 갈맷길과 해파랑길, 낙동강 길, 수원지 길, 온천길, 산복도로 등 걷는 길에 관한한 없는 게 없다. 뿐인가. 부산항은 대륙과 해양의 결절점, 이른바 유라시안 게이트웨이이고, 향후 통일을 예상하면 남북철도의 기종점이 된다. 논란이 되는 한일해저터널이 뚫린다면 핵심 연결거점도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에선 왜 길 도서관, 길 박물관 같은 길 콘텐츠에 대한 논의가 없을까? 제2도시라는 허명에 갖혀 길 너머의 세상을 못보고 있는 게 아닌가. 눈을 떠야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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