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책에게 길을 물어 '북두칠성'을 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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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책에게 길을 물어 '북두칠성'을 따다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1.05.1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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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종건, 북항 지구에 테마형 무료도서관 열어
정철원 회장의 뜻 딸이 실행... '부전여전' 책 사랑
수백억 예상 임대수익 포기...'돈 잘 쓰는 법' 갈채

#한비자의 통찰과 지혜

아주 오래된, 흥미로운 희귀본 한 권을 얻어 읽고 있다. ‘동서한비병법 통수대설(東西韓非兵法 統帥大說’(허문순, 동서문화사, 1985)이란 책이다. 중국의 고대 정치사상가 한비자(韓非子)의 법가사상과 인간학, 제왕학을 어록 중심으로 다룬 책이다. 단순히 한비자의 말을 인용·풀이하지 않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인간관계, 기업경영, 처세의 이치와 지혜를 깨우친다.

한비자는 동양의 마키아벨리라 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쓴 ‘한비자’는 조선시대때 금서가 될 정도로 시대가 두려워한 책이다. 그런데도 한비자가 던진 통찰과 사유는 시간이 갈수록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한다. 별빛이 지상에 도달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리듯이.

‘동서한비병법 통수대설’을 접한 곳은 협성종합건업 정철원(75) 회장 집무실에서다.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던 중 정 회장은 “이런 책이 있지”라며 집무실 창가에 쌓아둔 책 더미 속에서 이 책을 꺼냈다. 먼지가 폴폴 나는 낡디 낡은 책이었다. 표지가 너덜너널 했고, 제목은 탈색되어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제본이 터져 있었고, 너덜거리는 페이지는 유리 테이프가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이래 봬도 이 책이 내 삶의 멘토였어. 사업 초창기에 읽고 엄청 도움을 받았지. 여기서 삶의 지혜와 이치, 가야할 길을 찾았으니까. 다섯 번 읽었고 요즘도 또 읽어요. 허허.”

부산 동구 협성종건 빌딩 집무실에서 '동서한비병법 통수대설'을 읽고 있는 정철원 회장(사진: 박창희 기자).
부산 동구 협성종건 빌딩 집무실에서 '동서한비병법 통수대설'을 읽고 있는 정철원 회장. 그의 집무실은 온통 책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목차를 일별하고 본문을 들추자 곳곳에 새까만 밑줄이 좍좍 그으져 있다. 어떤 곳은 연필과 볼펜을 번갈아 사용해 서너겹의 밑줄을 치고 단락 전체에 네모칸까지 질러 놓았다. 밑줄 친 부분 중 ‘돈 쓰는 법’이란 대목이 있었다.

“가장 훌륭하게 돈 쓰는 방법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1년지계는 밭갈이에 있고, 10년지계는 나무심는 데 있으며, 백년지계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다’(관자)고 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교묘하게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경제, 즉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제도)의 종극적인 뜻이다.”

인재양성에 돈을 쓰는 것, 그것이 경제라니! 보아 하니 보통책이 아니었다. 책은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는 없었다. "빌려 달라"고 했더니 대답이 없다. "독후감을 쓰겠다"고 약속하고 겨우 책을 빌렸다. 정 회장은 “내 보물이다. 조심해서 다루고 반드시 반납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빌린 책을 조심스레 읽으면서 독자의 집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다 떨어지도록 본다거나,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책 한권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아끼면서 한줄 두줄 밑줄을 그으가며 밤 도와 읽고 충분히 소화해 실천적 행로를 찾았다면, 책이 별빛이고 등불이 아닌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결코 레토릭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읽고 알게 되면 행하라”

협성종건 정철원 회장은 독서광이지만, 책을 읽고 좋아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책에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으면 뭐든 실천하려고 한다. 말만의 약속이나 계획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이 그랬다.  

정 회장은 기업에서 큰 돈을 벌었다. 협성종건, 협성르네상스, 상익건설 등 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지난해 시공능력 평가액 5965억 원, 전국 도급순위 56위(부산 2위)에 올랐다. 총 자산 규모가 1조 원에 이르고, 부채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동안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2010년 협성문화재단을 만들어 현재까지 8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재단이 펼치는 다양한 사업들은 대부분 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협성 독서왕, 뉴 북 프로젝트(당신의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북튜브, 이순신 읽기 등은 책을 기반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재단 설립 이후 박경리 문학상(토지문화재단)에 1억 원, 영랑문학상(전남 강진군)에 9000만 원을 기부한 것도 독서 진작을 위한 실천적 활동이다. 정 회장의 ‘영랑 사랑’은 남다르다. 중고교 때 읽은 영랑의 시에 반해 생가가 있는 강진을 10여 차례 찾았고, 협성이 지은 아파트 단지 3곳의 벽면과 돌담에 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쓴 조형물을 설치했다.

정 회장은 마산상고(현 용마고)를 나왔다. 이게 최종 학력이다. 그렇다고 주눅들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내겐 책이 대학이자 삶의 멘토였다. 책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협성종건도 없다. 나는 요즘도 책을 만나면 절하면서 본다.”

이쯤되면, 책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인생역전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 배운 ‘돈 잘 쓰는 법’

5월초 북항 재개발지구에 문을 연 ‘북두칠성 도서관’은 정철원 회장의 책 사랑과 독서문화 진작을 위한 실천적 행동의 산물이다. 정 회장은 북항 재개발지구에 건설한 협성마리나G7의 B동 상가 1층에 테마형 무료 도서관을 만들었다. 규모가 400여 평으로, 점포 10개(1320㎡)가 들어설 수 있는 자리다. 분양을 했더라면 대략 350억 원의 수익이 예상 되었다니, 그만큼 사회에 기부를 한 셈이다. 

‘북두칠성’이란 이름이 신선하다. 슬로건이 ‘책이 사람을 만나 빛이 되고 길이 되는 공간’이다. 길이 없거나 보이지 않으면 북두칠성을 보고 길을 찾듯이, 책이 인생행로의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 취지란다. 

부산 북항 재개발지구 협성마리나G7 건물 1층에 문을 연 '북두칠성 도서관'. 400여평 규모의 무료도서관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부산 북항 재개발지구 협성마리나G7 건물 1층에 문을 연 '북두칠성 도서관.' 400여 평 규모의 테마형 무료도서관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도서관을 채운 장서는 현재 약 2만 권. 최대 5만 권까지 채울 수 있다고 한다. 공간배치가 독특하다. 서가는 북두칠성 별자리를 모티브로 설계돼 7개 공간으로 나누었다. 책 분류도 기존 도서관에서 하는 십진법이 아니라, 주제별·이슈별로 구분해 찾기 쉽고 읽고 싶게 만들었다. 도서관 가운데 배치한 ‘테마 서고’는 김경집(교육) 김미향(인문) 정희진(젠더수업) 등 6명의 전문가가 이름을 걸고 추천한 분야별 도서 4000여 권으로 꾸몄다. 책도 보고 영화나 공연도 즐길 수 있는 ‘책오름 광장’이 있고, 세미나실, 놀이방도 마련했다. 어디든 퍼질러 앉아 책을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북두칠성 도서관의 총괄 기획자는 협성문화재단 정선희(50) 이사다. 정 회장의 둘째딸이자 문화기획자인 정 이사는 2014년부터 재단 실무를 맡아 기획과 살림을 꾸려왔다. 아버지가 북항에 도서관을 세우고 싶어 하자, "정말 잘 하신 결정"이라며 적극 민 것도 그녀라고 한다. 북두칠성이란 명칭부터 공간배치, 장서 선정이 모두 그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특기할 부분이다. 

정 이사는 “국내외 도서관의 특징과 변화 추이를 면밀히 살펴 북항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히려 했다”면서 “앞으로 낭송회, 영화, 작은 콘서트, 아동 도서전, 플리마켓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책과 접목시켜 보려 한다”고 말했다. 북두칠성 도서관을 여는 데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 자본론-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민음사)에서 많은 통찰과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마스다는 '도서관이 곧 문화콘텐츠'라고 주장한다. 

북두칠성 도서관 내의 책오름 광장. 그냥 퍼질러 앉아 책을 읽고 싶은 공간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북두칠성 도서관 내의 책오름 광장. 그냥 퍼질러 앉아 책을 읽고 싶은 공간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정철원 회장은 지역사회에서 '짠돌이' '자린고비'로 소문 나 있다. 휴지 한조각도 두 번 쓰고, 메모장은 이면지를 잘라 쓰면서 허튼 돈은 안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수백억의 임대수익을 포기하고 무료 도서관을 연 것은 성숙한 시민, 인재양성을 위한 남다른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에 소개한 한비자 책에서 '돈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셈이다.   

북두칠성 도서관을 돌아보며 ‘세상엔 좋은 책이 정말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내가 읽은 책은 얼마나 될까? 한 5%? 못읽은 95%를 생각하자 갑자기 막막해지다가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 이게 희망이 아니고 무엇인가. 끝 모를 코로나 시국에서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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