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칼럼]‘부처님 오신 날’에 대한 단상-카르마, 무재칠시 그리고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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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칼럼]‘부처님 오신 날’에 대한 단상-카르마, 무재칠시 그리고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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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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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발행인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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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일요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다 아는 얘기겠지만,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피타고라스 같은 분들은 직접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한 것이라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여시아문, 如是我聞)-예수 가라사대-공자가 가로되-피타고라스가 말씀하시길’이라고 되어 있지요.

저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나는 이렇게 들었다-여시아문’ 하려 합니다. ^^

1.

얼마 전, 지인들과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대학병원 교수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생면부지인 사람이 고교 선배라면서 밤늦게 전화를 걸어와 병실을 마련하라고 하더라. 화가 많이 났다.”

선배인 경찰 고위 공무원이 달랬습니다.

“누가 부탁을 해 오면 가급적 친절하게 대해 줘. 법적인 문제만 없으면 성의껏 도와주고,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부탁하는 사람은 대개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게 마련이니 그 부분도 잘 헤아려 주고. 무엇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잖아?”

그러고 나서 얼마 뒤 한 언론사 간부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동의의료원 송무호 박사님한테 무릎 수술을 받습니다. 지병이 있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친구 분이라고 하던데 말씀 좀 잘 드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효자로세, 생각하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복을 짓게 해줘서 외려 제가 고맙습니다.”

2.

지인이 있습니다. 회사 화장실 벽에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기억합시다’란 표어를 붙여두었는데, 누가 떼어 버렸더라면서 웃었습니다.

무재칠시. 다 아는 얘기겠지만, 혹 처음 접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싶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 새삼 기록을 해 보겠습니다.

무재칠시는 ‘재물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베풀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빈털터리입니다. 베풀 게 없습니다.”

“빈털터리라도 베풀 수 있는 게 일곱 가지 있습니다. 진실하게 행하면 매사가 순조로워질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는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말합니다.

“화안시(和顔施 : 미소를 띠고 정답게 대하는 것), 언사시(言辭施 :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대하는 것), 심시(心施 :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하는 것), 안시(眼施 : 호의를 담은 눈빛으로 대하는 것), 신시(身施 : 힘을 써서 남을 돕는 것), 상좌시(狀座施 : 자리를 양보하는 것), 방사시(房舍施 : 편안하게 쉴 공간을 제공하는 것). 이 일곱 가지입니다.”
 
3.

듣자니, 복을 많이 지으면 3대(代) 안에 누가 복을 받아도 받는다고 합니다. 어느 날 대학생들과 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하다 이 말을 전했더니, 한 학생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그러더군요.

“내가 못 받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짚어보았습니다.

“3대라면, 나와 아들 딸, 손자 손녀인데…그럼 된 거 아닌가?”

“…”

이 학생은 더 이상 말이 없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동의했는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팍팍해서 결혼도 포기해 버린 세대의 입장이라면, 내가 물정 모르는 소릴 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습니다.

저는 불교신자는 아닙니다만, 네팔에 간 김에 부처님 태어나신 룸비니엘 들렀습니다. 한국 절인 대성석가사를 찾았습니다. 한밤중이었는데 스님이 눈을 부비며 나와 필요한 걸 물으시더니 두 말 않고 라면과 식은 밥과 김치를 내왔고 잠자리를 봐 주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이 칼럼을 쓴 오늘만이라도 사람들을 정답게 대하고, 말을 따뜻하게 하고, 마음을 어질게 갖고, 눈에 호의를 담고, 근육을 써서 돕고,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양보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편히 쉴 자리를 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편,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카르마’를 이야기합니다. 업(業) 혹은 인과응보입니다. 명리학과 주역,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한 지인은 “안 좋은 카르마는 병 속의 진흙과 같아서 그냥 물을 부으면 흐려지게 마련이니 부지런히 진흙을 긁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흙을 긁어내는 데는 용이한 직업 여섯 가지가 있으니, 따지고 보면 무재칠시와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의료직, 남의 아이나 가족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교직, 몸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종교직, 대민 봉사를 많이 할 수 있는 낮은 직급의 공직, 적게 남기면서 많이 제공하는 식당일, 남들이 꺼리는 일이면서 남들을 행복하게 하는 청소 및 위생직 등입니다.

이쯤에서 지금까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니 한 마디에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친절’입니다. 그러고 보니 달라이 라마는 아예 “나의 종교는 친절이다”라고 단언하고 있군요.

예수님 다시 살아나신 날(부활절)에 이어 부처님 오신 날(초파일)이 지나갔습니다.

기념일은 지나갔지만, 그 정신이 늘 온 누리에 가득 차서 세상사람 모두가 ‘도화지 속의 풍경’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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