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의 책과 사람]③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다른 배달꾼들은 화투를 쳤고 나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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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의 책과 사람]③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다른 배달꾼들은 화투를 쳤고 나는 책을 읽었다”
  • 대표 / 발행인 이광우
  • 승인 2019.09.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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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모습(사진: 현대중공업 홈페이지 캡쳐).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사진: 현대중공업 홈페이지 캡쳐).

가장 밑바닥에서 최정상에 오른 인물, 대한민국 대표기업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인 정주영. 소학교 졸업 학력으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만들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산업화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네 번의 가출, 소학교 졸업의 학력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이다.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아산정책연구원, 이것들을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충남 아산과는 관련 없다.충남 아산에 현대차 공장이 있기는 하다.

송전소학교 졸업.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어릴 때 가출을 4번이나 했다.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다. 두 번째 가출은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 가출 때는 소 판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부기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끌려왔다. 네 번째 가출 때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화투 대신 책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첫 직장은 쌀가게 복흥상회였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샐러리맨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정주영은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 눈을 뜨면 쌀과 잡곡을 가득 담은 가마니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급히 배달 나갈 때 쌀, 보리, 잡곡 등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복흥상회에는 여섯 명의 쌀 배달꾼이 있었다. 저녁 7시 쌀가게가 문을 닫고 나면 배달꾼들은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쳤다. 그러나 정주영은 책을 읽었다.

동료들과 놀지 않고 독서로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쌀가게 주인은 정주영을 눈 여겨 보았다. 주인의 외아들은 노름에 빠져 있었다. 외아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하는 정주영에게 가게를 팔았다. 복흥상회 주인의 딸인 이문순 여사는 청년 정주영에 대해 “다른 일꾼들과는 사뭇 달랐어요. 밤이 되면 항상 책을 붙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문순의 어머니도 청년 정주영의 성실성과 독서열에 감탄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정주영이 무식했을까? 그렇지 않다. <정주영의 경영정신>의 저자 홍하상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나 <십팔사략(十八史略)>까지 배웠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원 졸업생 정도의 학문적 소양을 이미 갖추었다”라고 평가했다.

책에서 익힌 상상력, 기적의 창의력으로 발현되다

그의 독서 실력은 상상력, 창의력을 발휘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에 왔다. 그는 선거기간 중 6.25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즉시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했고 이를 실천했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본토 밖에 있는 최전선을 방문한 것은 최초였다. 부산 대연동 유엔군 묘지에 참배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가 오기 전 미군은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에 잔디를 입히는 공사를 해야 했다. 겨울에 잔디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했다.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미군 장교를 찾아가 왜 파란잔디를 주문하느냐고 물었다. 미군장교의 설명은 이랬다. 대통령 당선인에게 황량한 묘지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 묘지를 파란 잔디로 단장해달라. 정주영은 “묘역에 풀만 파랗게 덮여 있으면 되냐”고 물었다. OK였다. 정주영은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낙동강변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를 사다가 단 5일만에 묘역을 녹색바다로 만들었다. 아이젠하워 일행은 묘지를 단장한 푸른 식물을 보며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했다.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정주영 사장은 공사비를 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입찰 금액의 3배를 받았다. 이 후 미8군의 공사는 모두 정주영이 맡았다.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명령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 대통령의 조임에 견디다 못해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려야했다.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으로 갔다.

아무 것도 없던 모래밭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지폐 한 장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이 배를 만들 때 세계 최초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나라다”라고 했다. 영국 측은 ‘판매처를 확실히 해야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정주영은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와 독대하여 수주를 따냈다. “우리 배를 사겠다고 서명해주면 그 계약서를 들고 가 은행에서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했다. 봉이 김선달보다 더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서산간척지 공사 당시 뻘 때문에 매립이 잘 안 되자 큰 폐유조선 두 척을 둑으로 이용해 매립공사를 했다. 이것은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되었을 때나 홍수가 나면 긴급 제방을 만들 때 응용되었다.

정주영은 노출되지 않게 문학인들을 극진히 예우했다. 그의 식사대접을 받은 문학인들이 많다. 독서의 힘을 통해 뚝심, 추진력, 지혜를 한껏 발휘한 이가 정주영이다.

정주영 회장의 어록 일부를 소개한다.

●운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운이 나빠지는 거야.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나가게 하는 것 이상 우매한 짓은 없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을 해야지.

●불가능하다고? 해보기는 했어?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인식을 시키고, 그 인식시킨 내용이 효율적으로 행동에 옮겨지도록 하는 실행력이 있는 사람만이 최고 경영자요, 훌륭한 간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소극적인 사람은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일하는 고통만 생각한다. 일을 끝내고 나무 그늘에서 바람을 쐬며 휴식할 때 만끽하는 행복감을 생각하지 못한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진취적 기상과 모험심, 불같은 열정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극복하여 배운다.

●사람은 나쁜 운과 좋은 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운이 들어올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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