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출신 향토작가가 ‘고향 명지’에 바치는 지역연구·사회비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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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출신 향토작가가 ‘고향 명지’에 바치는 지역연구·사회비평 에세이
  • CIVIC뉴스 칼럼니스트 차용범
  • 승인 2023.12.1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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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웅 지음 ‘최화웅 고향에세이 울말섬 찬가’
부산 명지의 역사·인문·지리·문화 전반 살핀 지역연구서
혈액 투석 받는 등 투병 중 집필..."글 쓰면서 병 치유"

부산지역 방송기자 출신 최화웅(崔和雄, 80) 작가가  고향 부산 명지(鳴旨)의 역사·인문·지리·문화 전반을 살핀 ‘최화웅 고향에세이 울말섬 찬가’를 발간했다. 지역연구서 겸 사회비평서다. 저자는 책 제목에 ‘에세이’라는 표현을 붙였지만, 그 서술의 폭과 깊이는 일상의 체험과 생각을 쓰는 수필을 껑충 넘어 논리성·객관성을 완비한 사회과학 연구서에 가깝다. 그만큼 외관과 내용에서 객관적 논조를 제시하며, 참고 문헌 150여 편으로 서술의 근거를 충실히 밝힌 책자다.

책 제목의 ‘울말섬’은 오늘 부산 강서구 명지동, 그 ‘명지’의 고대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 중 동쪽은 일웅도·을숙도 넘어 엄궁·하단, 서쪽은 녹산·용원, 북쪽은 옛 김해지역의 대저동·강동동 삼각주와 접하며, 낙동강 하구~대한해협·태평양을 잇는 길목이다. 명지는 70여 년 전부터 낙동강 하구의 모래톱이 다리와 둑으로 육지와 이어지며, 오늘 명지 사람마저 명지가 섬이라는 것을 잊고 산다.

그가 고향 명지를 평생 천착힌 이유, 낙동강하구는 부산의 강서·북·사하구를 비롯하여 김해 대동 양산 물금에 걸쳐 오랜 세월 강물이 실어 나른 모래와 자갈이 쌓이고 쌓여 물 밖으로 크고 작은 모래톱이 나타나기 시작한 곳이다. 다대포 아미산 전망대에 오르면, 대저도, 명지도, 강동을 비롯하여 대마등, 맹금머리등, 장자도, 신자도, 백합등, 도요등, 진우도 같은 연안사주들이 차례로 등장, 모래등과 낙조 가 얽혀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그 낙동강하구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부산 지역언론 출신 최화웅 작가의 ‘고향 연구’ 에세이집 표지(사진; 저자)
부산 지역언론 출신 최화웅 작가의 ‘고향 연구’ 에세이집 표지(사진; 저자 제공).

최 작가는 1971년 부산MBC 공채기자로 입사, 32년여 현업 생활을 하며 부산MBC·부산 평화방송의 보도국장을 지낸 민완기자 출신이다. 그는 언론생활을 시작할 무렵 ‘고향 명지’에의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명지 연구’를 시작, 50여 년 만에 필생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지난 3년여 코로나19 팬데믹 속 일주일에 3번 혈액 투석을 받는 혹독한 세월을 감당하며 집필을 완료, 신국판 542쪽에 이르는 필생의 역작을 출간했다.

방송기자가 사회과학 연구서 겸 사회비평서를 발간했다? 그렇다. 최 작가는 이미, 언론활동에 바탕한 사회비평서와 문학활동에 바탕한 에세이집, 학술활동에 바탕한 언론이론서까지, 문화예술 전반에서 12권의 저서를 낸 왕성한 필력의 우뚝한 ‘글쟁이’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는 다분야에 걸친 깊은 사색과 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적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역사인식과 시대적 감수성을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다는 평가(유한근)를 받고 있다.

최 작가는 2001년 문예종합지 ‘문예운동’을 통해 등단한 수필가다. 그는 본업에 바탕한 사회비평 차원의 저널리즘적 시각을 에세이의 문학적 영역에 접목시키며 집필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 책에서도 그런 시각으로, 고향에의 그 귀하고 거룩한 기억과 사랑을 알차게 담아내고 있다.

그에게 이 책은, 스스로 향토의 기록을 추적하고, 향토의 유래와 내력을 탐구하며 정리하는, 곧 향토의 꺼져가는 기억을 한껏 살린 작업이다. 그는 ‘고향’의 뜻, ‘나의 과거가 있고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형성된 하나의 세계‘를 되새기며, “나는 ‘울말섬 찬가’에 발심(發心)을 둔 세월 동안, 젊은 날 삶의 기억과 향토의 흔적을 끌어모아 키질하며 정성을 다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이 책은 프롤로그 ‘고향을 노래하다’부터, *‘아이야 깨어나라 새날이 밝았다’(명지의 과거와 미래), ‘울말섬 모래톱 이야기’, ‘고대국가의 흔적, 고인돌’(역사), *‘명지 염전은 조정의 국고’(산업), *‘명지의 문화유산’(문화),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 *‘울말섬의 현주소’, *‘고향은 영원한 그리움’까지, 총 9부(部)에 걸친 대작이다.

그의 전문적 식견과 객관적 논리에 바탕한 ‘고향사랑’은 제1부 ‘아이야, 깨어나라 새날이 밝았다’부터 뚜렷하다. 최근 지구를 뒤덮는 온난화 현상 및 극한의 기상재앙 속, 지금 해수면이 차오르고 있고, 명지 역시 곧 물속에 잠길 것, 그 결과 고향을 잃을 우려를 한탄하고 있다.

그런 이 얘기를 하며 숨 가빠진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보고서의 흐름과 글로벌 기후대응 단체, 전문 과학저널의 동향까지 샅샅이 점검한다. 대동여지도 1861년판에 나타난 낙동강 삼각주의 지형과 1972년 인공위성 랜드샛이 촬영한 낙동강 하구 사진도 제시하며, 어제-오늘의 변천을 비교했다. 그는 근래 분별없는 해안매립 끝에 낙동강 하구가 변화하는 흐름을 ‘생명의 곡선 죽음의 직선’으로 표현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저자는 고향 명지 낙동강 하구의 지형변화를 추적하며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지형지도와 인공위성 랜드샛이 쵤영한 위성사진도 게재, 서술의 논리성과 객관성을 드높이고 있다(사진; 저자).
저자는 고향 명지 낙동강 하구의 지형변화를 추적하며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지형지도(위)와 인공위성 랜드샛이 쵤영한 위성사진도 게재, 서술의 논리성과 객관성을 드높이고 있다(사진; 저자 제공).

그래서일까. 책의 에필로그 ‘고향은 영원하리라’의 문맥은, 더러 처절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전하며 알리려 평생을 다짐하며 산 저널리스트로서 내 생각과 삶은 아직껏 고향 생각에 머물러 있다. 고향의 품에 안기지 못한 나그네는 제자리를 서성이며 하늘을 우러러볼 뿐이다. 체험적 저널리즘은 오늘과 내일의 현실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성찰의 기회를 얻는다….”

“순수한 고향의 전원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느끼고 싶다. 나에게 있어 고향은 영원한 첫사랑, 그 순박하고 우아한 추억이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고향을 다시 그린다….” 그 문맥에 담긴 팔순(八旬) 노년작가의 생각을 읽으며, 오늘 우리는 ‘정든 고향을 떠난 외로운 난민’ 같다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최화웅 작가, 그에게, 오늘의 글쓰기는 수행이다. 그는 1997년 MBC를 퇴직,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앉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내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냈다. 오후에는 글을 쓰지 않고 KBS의 클래식을 들으며 쓴 글을 퇴고하거나 산책을 즐긴다. 그 수행의 과정은 그 강도가 다르나, 쉬지 않는 수행의 정신을 가다듬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저자의 근래 표정(사진: 저자).
저자의 근래 표정(사진: 저자 제공).

저서로는, 사회비평서 ‘MBC News 최화웅입니다’(1992), ‘부산에 산다’(1993), ‘누가 호루라기만 부는가’(1994), ‘철제 새장’(2002), 에세이·수필집 ‘하늘 향해 서다’(2009), '집은 돌아오는 곳'(2015), ‘강화 제주 그리고 부산’(2016), ‘쏟아지는 그리움’(2016),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2017), ‘사랑 황금빛에 물들다’(2019), 언론 연구 ‘탈TV시대의 이해’(1997), ‘한국민방개척사(2011) 등이 있다.

최화웅(지은이)/육일문화사(이종형)/2023-11-30

 

[덧붙여]

말한 대로, 그는 2011년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고 2014년부터 혈액 투석으로 일상을 감당하는 만성질환자다. 그는 투병생활 중에도 더 부지런히 생각 깊은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일주일을 두 번으로 나누어 사흘과 나흘로 나누어 산다. (…) 사흘은 화, 목, 토요일에 투석 치료를 받고 나흘 중 일요일은 미사 참례, 월요일은 인문학 강의, 나머지 이틀은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을 만난다. 그 속에서 하루 100페이지의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한두 편의 글을 쓴다. (…) 나는 글을 쓰며 세상을 돌아보게 되고,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글을 쓰며 병을 치유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글쓴이는 차마 눈물이 난다. 그와의 각별한 인연을 생각하며, 그가 감내하는 고통과 그조차 무심한 듯 받아들이는, 치열하기까지 한 그의 일상을 못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 인연을 되새기며 저자에의 이해를 도울 글쓴이의 페이스북 글 한 토막-.

코로나19가 제아무리 기세등등하다 한들, ‘대한민국 명절’ 설날마저 밟을 순 없다. 비록 세배 길과 성묫길은 막혔을지언정, 잊지 못할 어른-친인척-동료와의 설 인사까지 막을 수 있겠나. 그 수단, 전화 통화로, 문자 메시지로, 거기에 카톡을 동원한 동영상 나누기도 유용하다.

어젯밤, ‘잊지 못할 형’, 그가 동영상 한 편을 보내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 중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소재 삼은 4분 47초 길이의 잔잔한 영상이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곧 이 세상 속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는 말이다.

영상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과 ‘한국 여성문학의 대표적 작가’ 박완서 선생이 등장했다. 박경리 유고 시집의 한 구절,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완서 작가의 말,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을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분이다, 흐르는 물처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살았다, 많은 것을 빌려주지만 공을 과시하지 않는 상선약수의 삶을 살았다, 그런 설명이다.

박경리-박완서 두 작가는 우정을 넘어 모녀 같은 정을 나눈 사이다. 남편을 잃고 총체적 슬픔에 잠긴 박완서를 박경리가 배추속댓국을 끓여 먹이며 보살폈던 일화, 박경리의 장례 때 박완서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추도사를 하기까지, 두 작가의 인연은, 참 길고도 절절하다.

두 분의 인연은 최근 내가 관여한 한 책자에도 나와 있다. 박경리문학관장 최영욱 시인의 글에서다. 두 분의 얘기를 먼저 읽은 뒤, 새삼 그들의 삶을 관통한 ‘상선약수’ 얘기를 대한 감흥은 컸다. 그리고, 그 ‘형’이 설날 저녁, 굳이 두 작가의 삶과 문장을 되새긴 뜻을 간취하니, 그 느낌은 참 처연했다.

‘형’은 부산 언론계에선 대략 기억할 만한 분이시다. 나름 올곧은 기자정신에다, 불같은 열정에 바탕한 취재며 문필활동으로 쟁쟁한 분이시다. 그는 기자 생활 때도 적잖은 특종을 기록한 민완기자였고, 쉼 없이 우리 주변의 삶과 현상을 시와 수필로, 또는 문집으로 기록하는 우뚝한 글쟁이셨다.

내가 형을 만난 건 기자 초년시절이었지만, 우린 1990년께 부산시정(市政) 출입 때 ‘형제’의 연을 맺었다. 그와 나는 사물과 현상을 보는 눈이 비슷했고, 그래서 해외출장도 자주 동행했다. 나는 직군과 회사는 달랐어도 그를 존경하며 따랐고, 그는 그런 나를 아끼며 품어줬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출입처에서 ‘형’이라는 호칭을 쓴 것은 그가 처음이다. 우리 둘은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주변 동료-후배 셋을 더 포용, ‘형제 관계’를 맺었다.

우리 형제들은 정말 ‘끈끈한 관계’였다. 나는 남매여서 형-동생이 없었지만, 이들과 어울리며 그런 아쉬움을 잊고 지냈다. 우리는 계절을 따라, 하동 지리산 계곡, 무주 스키장, 함양 산천을 찾아다녔고, 연말연시 시즌이면 경주라도 가서, 힐튼이며 현대 호텔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5형제의 아이들은 비록 어렸으나 그 가족 같은 분위기에 잘 어울려 주었다. 그 5형제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만도 만만찮은 양일 정도로-.

그 시절의 우리는 정말이지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세월은 가고, 삶은 무심했다. KBS S형과 J일보 L, K일보 K는 서울 본사로 옮기며 부산과 멀어졌다. 더러 그들이 부산을 찾기도, 전화 통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함께 어울릴 적만 할 것인가. 어느듯 형도 보도국장을 지내고 퇴직한 지 오래다. 그리고, 형은 건강을 잃고 있다. 벌써 십수 년, 신장 투석 치료 중이니, 그와 형수님의 나날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래도 형은 기질 대로였다. 연전 코로나19 속에서 내가 아이의 혼례를 치를 때, 형과 형수님이 예식장을 찾아 우리 부부와 아이를 축하해 줬고, 난, 반가움 반 놀람 반으로 그들을 맞았다. 형은 나보다 12살 연상에, ‘고위험군’의 환자 아닌가? 그뿐 아니다. 형은 꾸준하게 문집들을 내며 끈기와 활력을 과시했고, 최근엔 고향 명지의 역사를 찾는 만만찮은 작업에 매달려, 벌써 200자 1,500매를 완성한 상태다.

그는 천생 기자요 문필가다. 그래서 지역사회를 더듬고 삶을 관조하며 글을 쓰는 건 그에게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요 외면할 수 없는 과업이기도 하리. 그가 나의 설 인사를 받곤, 다시 “식사 약속 함 잡자”고 말씀하신다. 그 약속 잡기, 이 어수선한 세월이 얼마나 뒷받침해 줄진 모르겠다.그와의 통화를 마치곤, 연전 그가 보내준 에세이집 한 권을 찾아 든다. 그의 서명이 선명하다. “내 그리운 용범 동생에게···” 우리들의 ‘그때 그 시절’은 그처럼 찬란한데, 우리네 삶은 참 외롭고 모질구나. 아, 우리는 형-동생으로, 언제쯤, 다시 가족처럼 어울리며, 물처럼 살았던 그 시절을 되찾을 수 있을까․․․.(2022-2-2)

저자가 연전 글쓴이에게 보내준 에세이집 ‘황금빛에 물들다’의 표지와 속지 서명.
저자가 연전 글쓴이에게 보내준 에세이집 ‘황금빛에 물들다’의 표지, 속지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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