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내음 그리워 부산을 떠나지 못하는 '공부하는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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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내음 그리워 부산을 떠나지 못하는 '공부하는 국악인'
  • 취재기자 황지환
  • 승인 2022.12.2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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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 김준호 씨를 만나다
신간 '미역국에 밥 한그릇' 출간...우리 문화 연구 40여년 궤적 담아내
“국악교육 축소보다 더 심각한 것은 형식적인 국악교육... 성찰 필요”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에 부산 전통 예술 공연 들어가길 기대"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 길, 매일 아침 6시면 인근 산책로를 따라 청사포 등대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남자가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지 않고 시간 맞춰 나오는 덕에 인근 거주민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복이 아부지'라 부른다. 복이는 그가 기르는 반려견이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인다. ‘국악인’ ‘민속학자’ ‘인간문화재’ ‘방송인’ ‘작가’ ‘국문학자’ 등이 그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사나이. 그는 바로 한때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는 구성진 입담으로 대한민국 안방을 주름잡았던 국악인 김준호 씨다.

김준호 씨가 새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났다. 지난해 출간한 ‘바늘 같은 몸에다가 황소 같은 짐을 지고’(학이사, 2021)에 이어, 11월 중순 신작 ‘미역국에 밥 한 그릇’(학이사, 2022)을 세상에 내놓았다. 신작의 부제는 ‘미역과 쌀과 보리의 문화원형에 대한 담론’이다. 지난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 우리 전통문화를 엮어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신작 ‘미역국에 밥 한 그릇’은 김준호 씨가 까까머리 고교 시절부터 관심 가졌던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40여 년 간 필자의 노력으로 건져올린 자료들이다.

인터뷰 후 김준호 씨와 함께 점심으로 국밥을 먹었다(사진: 취재기자 황지환).
인터뷰 후 김준호 씨와 함께 점심으로 국밥을 먹었다(사진: 취재기자 황지환).

김준호 씨는 “인류 DNA가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정보가 음식문화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음식 중에서도 미역국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냈다. 미역국은 흔히 산모가 아이를 출산한 다음 처음 먹는 음식, 생일마다 먹는 음식이다. 우리 선조들은 대를 이어 중요한 날 미역국을 먹어왔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미역국의 근원에 대해 김준호 씨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평생을 바쳤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김준호 씨에게는 글쓸 때 귀중한 사료가 됐다.

김준호 씨는 “책을 구성하며 지난 40여 년 동안 모아왔던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쓰되, 최종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책 속에 풀어낸 여러 나라들을 직접 가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국악인 김준호 씨의 신작 ‘미역국에 밥 한 그릇’ 표지이다(사진: 김준호 씨 제공).
국악인 김준호 씨의 신작 ‘미역국에 밥 한 그릇’ 표지이다(사진: 김준호 씨 제공).

이번 신작에서도 표지를 포함한 책 곳곳에 나오는 그림들은 아내 손심심 씨가 맡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작권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손심심 씨 그림은 그림 같지 않았다. 사진 같았다. 스케치부터 색감까지 김준호 씨 글을 풍성하게 뒷받침했다. 환상의 콤비라는 건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 강연과 무대에도 항상 혼자 서는 법이 없다. 공연이든 강연이든 마찬가지다. 김준호 씨가 소리를 할 때 손심심 씨는 장구를 치고, 손심심 씨가 춤을 출 때는 김준호 씨가 장단을 맞춘다. 이제 김준호·손심심은 국악계의 대체 불가한 브랜드가 됐다.

김준호 씨는 196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평생 부산에 살고 있다. 그는 국악계 아웃사이더로 통한다. 혼자 적응 못한 채 주변만 맴돈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애정을 쏟고 평생 연구 중인 ‘우리 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김준호 씨는 흔히 대중에게 잘 알려진 ‘판소리’, ‘민요’보다 유독 ‘사라져가는’ 또는 ‘이미 사라진’,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우리 소리에 매력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김준호 씨가 가장 애착을 갖는 것은 노동요다. 논에 모심을 때 부르던. 들일 하다 잠깐 흥얼대던. 밭고랑마다 씨 뿌리다 지쳐 신음하듯 내뱉는, 멸치 건져 올리던 뱃사람들의 한탄 소리에 빠져들었다. 팔도에서 소리깨나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산이고 들이고 인적이 드문 섬마을까지 찾아다녔다.

그렇게 원하는 소리를 찾아다니길 십 수년, 김수악, 문장원, 양극수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명인들을 은사로 모셨다. 인복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는 김준호 씨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은 진도들노래 예능보유자였던 고 조공례 선생이라고 했다. 김준호 씨는 “인간문화재라는 말만 듣고, 잔뜩 기대를 품고 무작정 진도로 갔는데, 조 명인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몇 시간을 찾아 헤맸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들판서 두건 매고 일하던 할매 들 중에 제일 문화재로 안 뵈는 할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조공례 선생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준호 씨는 국악판에서 구음 전문가로 손꼽힌다. 구음으로 그를 따라올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구음은 사람 목소리로 악기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화도 많다. 

1997년 또 한번 김준호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MBC 10시 임성훈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강연 요청을 받은 것이다. 아내인 손심심 씨와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는 강렬한 주제로 45분을 강연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방송 끝나자마자 김준호 씨 섭외 전화가 방송국에 끊이질 않았고, 김준호 씨 집 앞에는 취재진과 연예기획사 관계자들로 넘쳐났다. 김준호 씨는 “그때 생각하면 정말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진짜 소설 속에 나오는 한 문장 같았다”며 “하루아침에 사람이 이렇게 스타가 될 수 있구나”라는 기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준호 씨는 알았다. 대중의 관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듯, 다시 내려가는 것도 한순간임을.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그 무렵 그의 일과는 늘 집 근처 도서관에서 마무리했다.

울주 초천리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그 동네에서 불리던 모내기 노래를 분석하는 모습이다(사진: 김준호 씨 제공).
울주 초천리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그 동네에서 불리던 모내기 노래를 분석하는 모습이다(사진: 김준호 씨 제공).

올 상반기, 교육부는 ‘2022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 시안’에서 국악 교육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악계는 물론 트로트 가수 송가인 씨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해 김준호 씨는 “국악 교육 축소하겠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국악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 풍토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대한민국 초·중·고 음악 교사 중 국악 전공 한 교사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느냐”며 “형식적으로 교과서에 끼워 넣은 국악 교육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준호 씨는 국악 전반에 걸친 우리 사회 인식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는데,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를 빗대 설명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더라도, 전야제 무대에 오른 이는 대중가수, 트로트가수, 서양 오케스트라가 전부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산에서 17회째를 맞았는데, 정작 우리 부산에 관한 어떤 게 거기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부산에도 동래학춤이나 지신밟기와 같이 훌륭한 전통음악이 있음에도 전야제 무대에 부산 전통 음악 공연이 하나도 없는 것은 매우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김준호 씨는 몇 달 전 막을 내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감명깊게 시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배우 박은빈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종영할 때까지 감탄을 거듭했다”고 했다.

기자가 만나본 김준호 씨는 마치 드라마 속 우영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준호 씨는 드라마 속 우영우와 같이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로에게 상처 될까 말 한마디도 거르고 걸러 입밖에 겨우 내놓는다. 말 한마디 하기 위해 열 사람 눈치를 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영우의 거침없는 성격처럼 여과 없이 술술 풀어내는 그의 말은 답답한 한국사회를 시원하게 해 주는 측면이 있었다. 활화산 같은 열정을 품은 그가 어떤 새로운 활동을 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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