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집안 설거지’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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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버킷리스트]‘집안 설거지’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
  • 박태성
  • 승인 2019.10.12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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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나의 버킷리스트⑥
박태성(전 부산시민회관 본부장, 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박태성 전 부산시민회관 본부장, 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설거지의 행복

가장 부유한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최인호 소설가의 ‘아이 치아가 크는 모습에서 우주를 느끼는’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

많은 사람들이 즐겨 하는 요가 수련의 꼭대기 단계가 ‘집안 설거지’란다. 아내와 가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지닌 채, 그릇을 닦으면서 마음을 닦는 묵언수행, 이것이야말로 요가 동작과 호흡법, 명상 그 이상의 단계란 뜻일 게다. 요컨대, 우리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결국 궁극적인 기쁨과 행복을 준다는 것.

지난 시절, 가까운 것들의 소중함을 모른 채(그 가까움을 늘 누릴 것이란 막연한 생각 속에)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구실로 술을 마시면서 비틀거려도 봤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적막 속의 심심함이 ‘평화며 진리’란 것을 철이 조금 들자 새삼 깨닫는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은 같은 것이다

지난 시절, 늘 알고 싶었다. 지는 해는 다음에 뜨는 해인지…. 만남은 헤어짐이며,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인지…. 저 먼발치서 날갯짓 하는 고니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기서 고니들을 만났는데, 출발지였던 시베리아의 어느 사람은 고니와 헤어진 것인지….

긴 산책 끝에 숨이 턱밑에 차올라 다다른 집 근처 모서리가 나로서는 종착지점이다. 그런데 저기 반대편에서 가볍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은 출발지점이 아니던가…. 한 사람의 출발지는 다른 사람의 종착지인가?

찰랑찰랑거리며 흐르는 강 물결은 계속 이어지는 것인지 그치는 것인지…. 그치는 것은 다시 이어지는 것인지? 어떤 곳을 올랐다는 게 결국은 거기에서 내려오는 것인지…. 슬픔은 기쁨으로 이어지고, 기쁨은 슬픔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인지….

극과 극은 늘 함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의 신비스런 여행, 그게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그것은 지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전혀 다른 차원을 느끼며 경험한다는 것, 가능하면 아주 멀리멀리 떠나고 싶다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어린아이 같이 우주선에 실려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우주에는 1천억 개의 은하수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수에는 1천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하는데, 그 광활한 우주로의 여행,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 아닌가.

그런데 그 버킷리스트가 아주 가까운 곳,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능한 일이란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다. 멀리 있는 저 별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으로서가 아닌, 구체적으로 현실화시켜준 경험 덕분이었다.

어느 날, 노을구름이 번지는 황혼녘을 넘기면서 별빛이 출렁이는 밤하늘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그 별들 사이사이로 비행기 한 대가 마치 우주선 같이 항해를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 바로 곁에서는 홀연히 별들이 반짝였다. 저 먼 거리와 가까운 거리가 일치하는 착시 현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현상이 꼭 착시 현상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기와 별들은 함께 있었다.

고흐가 프랑스 아를의 론 강변에서 별빛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 남겼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작품 역시 이러한 경험 덕분 아니었을까?

별과 비행기의 오버랩, 그것을 관찰하면서 ‘저기 먼 곳’과 ‘여기 이쪽’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기를 넘으면 여기, 여기를 넘으면 저기란 것….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축지법을 발명했는가. 아마 시간의 축지법을 사용하면 먼 별여행을 동남아 여행하듯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행성인들은 시간의 축지법을 이미 사용해 냉동상태로 우주선에 실려 지구별로 향하고 있을지도….

헤스만 헤세에게도 나와 비슷한 버킷리스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알프스 산자락의 언덕에 누워 온종일 멍하니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았던 적이 많았다. 천상과 지상이 오버랩 되는 알프스 산의 한 언덕에서 하늘을 마냥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의 모두였던 것이다. 그는 천상과 지상의 중재자로서 하늘과 구름을 오버랩 시키면서 그가 꿈꾸던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방법을 터득했을까.

이러나저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버킷리스트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마음의 축지법을 사용해 ‘가장 가까움의 진리’를 읽는 방법을 차츰 깨달아 가고 있다고나 할까. 가장 가깝다는 것은 결국 가장 먼 곳의 파라다이스와 일치하니까…. 가장 가까움은, 적어도 가장 먼 곳의 전 단계이니까….

가정이란 ‘우주’를 과거에는 잘 몰랐다. 이곳은 <삼국지> 이상의 것들이 우주의 파노라마 같이 펼쳐지는 장소였다. 변화무쌍함, 희로애락, 요동치는 격랑과 평온, 성찰, 깨달음 같은 것들이 바로 곁에서 펼쳐진다는 것….

지난 날, 나의 버킷리스트는 우주, 시베리아횡단열차 내지는 오로라의 장관이 황홀하게 펼쳐지는 북유럽 여행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생각이 달라졌다.

나의 버킷리스트, 가족과 '평범한' 일상 보내기

요즘의 버킷리스트? 사색의 산실이었던 작은 산, 부산 남구의 황령산, 거기서 아내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고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 아래에서 ‘미소와 눈물’을 함께 짓는 것, 그 속에서 마음의 평온과 깊은 본질을 찾는 것, 그게 ‘일상적인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그 다음의 버킷리스트? 다른 낯선 곳이 아니라 20년 전 가족들과 2년 동안 함께 지내는 동안 유쾌한 추억을 안겨주었던 영국으로의 여행이다. 그것도 우리가 살았던 동네를 다시 찾고 싶다.

광활한 우주, 시베리아횡단열차, 북유럽 여행은 그 다음 순서가 되었다. 그것은 설령 실행하지 못해도 괜찮은 부수적인 일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곳을 변화무쌍하게 이미 여행하고 있으므로….

나를 감동시키는 시 구절 가운데 하나는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음악 가사다. ‘헤어짐은 단지 멀리 있는 것일 뿐….’

헤어짐은 단지 멀리 있는 것이며, 가까운 게 결국 파라다이스란 사실을 깨닫는 데 참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이제 나의 버킷리스트는 가까움의 소중함을 느끼며 무언가를 깨달아 가는 것, 거기서 절정 체험을 얻는 것이 되었다.

깊어가는 가을. 가을은 ‘가까움’의 의미를 다채롭게 살펴보도록 하는 계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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