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소울푸드 ‘짜장면’의 원류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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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소울푸드 ‘짜장면’의 원류를 찾아가다
  • 취재기자 김지은
  • 승인 2019.10.1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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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안 공화춘...최초의 중화요리점
중국인 부두노동자 '쿨리' 음식이 짜장면 원조

짜장면은 한국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중국 음식으로 유명하다. 쫀득한 면발과 함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짜장면은 돼지고기와 양파, 호박 등을 다져 중국 된장(춘장)과 함께 볶은 양념을 국수에 비벼 먹는 한국식 중화요리다.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안에 위치한 ‘짜장면 박물관’에서는 낯선 중국음식으로 시작해 현재 한국인의 소울 푸드가 된 ‘짜장면’의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천역에서 현란한 중국풍 건물을 지나 안쪽으로 10분 걸어가면 고풍스런 옛 분위기에 ‘짜장면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현 ‘짜장면 박물관’의 건물은 청관지역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246호)으로, 옛 ‘공화춘’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공화춘’은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을 식당에서 처음 팔기 시작한 중화요리점으로, 우리나라 짜장면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란한 중국풍 현판이 돋보이는 ‘짜장면 박물관’의 정문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현란한 중국풍 현판이 돋보이는 ‘짜장면 박물관’의 정문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짜장면 박물관’은 2012년 4월 28일에 개관 했으며, 내부는 2층으로 돼있다. 총 6개의 전시실로 구성돼있으며, 특이하게도 2층부터 관람을 시작하여 1층에서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2층에서는 짜장면의 탄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짜장면의 역사에 대해서 전시돼있고, 1층에서는 1960년대의 ‘공화춘’의 주방모습과 다양한 기획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화교의 역사와 짜장면의 탄생-제1전시실

2층으로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제1전시실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식인 짜장면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처음 들여온 화교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화교란,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말한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광동성 수사제독 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 4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역을 한 것으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곧이어 청국이 1883년 말부터 한국에서 영사 업무를 시작해 이때부터 많은 중국인들이 건너와 인천지역에 대규모 화교사회를 형성했다.

2층에 올라서면 제1전시실 입구가 바로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2층에 올라서면 제1전시실 입구가 바로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화교들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했던 인천지역에서 식료품과 잡화류 등을 본국에서 수입하고 해산물류를 본국에 수출하는 일들을 했다. 무역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에서는 ‘쿨리’가 등장했다. ‘쿨리’란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에서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산둥지방 출신의 노동자들을 일컫는 단어다.

‘쿨리’는 배의 물건을 싣고 나르는 짐꾼 및 인력거꾼으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일 때문에 식사를 빠르게 해결해야했다. 이에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자주 먹었다. 이들을 상대로 음식을 팔기위한 노점상들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짜장면’ 보급이 시작됐다. 당시 쿨리들과 짜장면을 파는 노점상들의 모습이 박물관에 모형으로 제작돼있다.

1930년대의 ‘공화춘’의 모습-제2전시실

쿨리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짜장면은 인천에 사는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공화춘’이 1912년에 지금의 ‘짜장면 박물관’ 자리에 중국 음식점을 열었고 최초로 짜장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원래 ‘공화춘’은 ‘짜장면 박물관’ 건물의 동쪽 부분만을 사용했지만, 짜장면의 인기와 함께 1968년 서쪽 건물까지 매입하여 1983년 폐업할 때까지 영업했다.

과거 쿨리들이 짜장면으로 끼니를 해결했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과거 쿨리들이 짜장면으로 끼니를 해결했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제2전시실에는 당시 ‘공화춘’에서 수습된 유물을 활용해 1930년대 공화춘의 접객실을 볼 수 있다. 짜장면과 함께 당시 음식과 함께 나갔던 밑반찬들과 원형탁자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실감나게 재현해 당시의 식당의 모습과 상차림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다. 당시 사용했던 집기들도 전시돼있다.

1930년대 당시 ‘공화춘’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 의 상차림을 재현해 놨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1930년대 당시 ‘공화춘’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의 상차림을 재현해 놨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대학생 강 모(인천시 연수구) 씨는 “정말 실감나게 모형물을 잘 꾸며 놓은 것 같다”며 “짜장면의 역사가 생각 보다 오래된 것 같아서 신기하고 놀랬다”고 말했다.

모형의 바로 옆 편에는 동아시아의 젓가락에 관한 이야기도 볼 수 있다. 중국은 나무젓가락을 주로 사용했으며, 원형에다가 상이 크기 때문에 중앙에 놓인 음식을 먹기 위해 젓가락이 길다. 일본도 중국과 같이 주로 나무재질의 젓가락을 사용했지만, 작은 독상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젓가락이 짧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속으로 된 젓가락을 주로 사용했으며, 중국과 일본에 비해 젓가락이 중간크기다.

‘1970년’ 짜장면의 전성기-제3전시실

둥그런 벽돌문을 지나면 단란한 4인 가족이 짜장면을 먹고 있는 모형이 나온다. 짜장면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중국음식점을 재현해 놓은 제3전시실이다. 이 시기에 짜장면이 우리나라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6.25전쟁 후에 미국의 밀가루 원조 때문이다.

과거에 특별한 날만 짜장면으로 외식을 하던 가족들의 모습을 재현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과거에 특별한 날만 짜장면으로 외식을 하던 가족들의 모습을 재현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짜장면은 원래 중국에서 삶은 면에 볶은 면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베이징(北京)과 산둥(山東) 지역의 가정식 요리로, 지금도 현지에서 즐겨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윤기 나고 단맛이 강한 짜장면과는 다르게 중국의 짜장면은 단맛이 없고 짠맛이 강하며, 삶아서 식힌 면을 사용해 면이 마르고 차갑다. 하지만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식성을 파악한 산둥성 출신 화교 왕송산(王松山)은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갈색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하여 ‘사자표 춘장’을 만들어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 회사를 차려 판매했다. 이는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짜장면이 국민음식이 되었다.

1940년대 당시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에서 판매했던 ‘사자표 춘장’의 모습을 재현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1940년대 당시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에서 판매했던 ‘사자표 춘장’의 모습을 재현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이와 함께 6.25전쟁이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미국의 ‘밀’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쏟아져 나오자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작했다. 주요 곡식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국민에게 쌓여가는 밀을 더 먹게 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였다. 이로 인해 밀을 활용한 제과업, 제빵업, 제면업이 빠르게 성장했고, 밀가루를 사용하는 짜장면 또한 이런 분위기를 따라 판매량이 급증했다.

6.25전쟁이후 정부에서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작할 때 내걸었던 표어를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6.25전쟁이후 정부에서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작할 때 내걸었던 표어를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철가방'의 민족 한국-제4전시실

단란하게 외식하는 가족모형을 등지고 걸어 나오면 일렬로 서있는 사각형의 가방들을 볼 수 있다. 바로 철가방의 변천사다. 광복 후 짜장면, 짬뽕 등의 중국음식은 배달의 대명사가 됐다. 사람들의 짜장면에 대한 소비가 많아지면서 짜장면을 먹고 싶지만 음식점과 거리가 멀어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철가방의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으로, 음식물이 넘치면서 나무에 스며들어 위생문제가 생겨 오래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그 뒤에 플라스틱 가방도 금형비용이 비싸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알루미늄 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하면서 오늘날의 배달의 상징인 ‘철가방’이 탄생하게 됐다.

제 4전시실에서는 나무로 재작된 배달가방부터 지금의 철가방에 오기까지 역사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제4전시실에서는 나무로 재작된 배달가방부터 지금의 철가방에 오기까지 역사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가방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 속 디자인중 하나로 선정됐다. 알루미늄소재로 외형상 깨끗하며,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이 쉽게 닦이는 편의성, 약간 찌그러져도 원상복구가 쉬운 가변성과 같은 장점으로 후대에게 물려 줄 우리시대의 생활문화유산이 됐다.

197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짜장 라면의 변천사-제5전시실

2층 마지막 제5전시실에서는 짜장 라면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가족구성원의 축소, 식사시간의 부족 등의 바쁜 생활로 인해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게 됐다. 이에 많은 식품회사들이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과 레토르트식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짜장면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선호에 맞춰 짜장 라면이 탄생하게 됐다. 더욱더 쉽게 짜장면을 접할 수 있고 짜장면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풍미마저 똑같아 나오자마자 큰 호응을 얻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출시됐던 짜장 라면 포장지가 전시돼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출시됐던 짜장 라면 포장지가 전시돼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1960년대 ‘공화춘’ 주방-제6전시실

2층을 다 관람하고 1층으로 내려오면 1960년대의 ‘공화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크게 3가지로 주방을 분류했다. 수타면을 뽑고 삶던 수타 주방, 각종 야채를 썰었던 칼판 주방, 짜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불 맛을 내는 화덕 주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또한, 짜장면에 들어가는 재료설명과 함께 짜장면 조리방법, 음식을 보관하던 장독대, 음식을 운반하던 이동수단 등을 관람할 수 있다.

1층에 전시돼있는 1960년대 ‘공화춘’의 칼판 주방의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1층에 전시돼있는 1960년대 ‘공화춘’의 칼판 주방의 모습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은).

대학생 정 모(부산시 남구) 씨는 “평소 좋아하는 짜장면에 이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앞으로 더 맛있게 짜장면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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