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반에 반만 접어주기로 한다-영화 '알라딘'의 지니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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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버킷리스트]반에 반만 접어주기로 한다-영화 '알라딘'의 지니를 생각하며
  • 수필가 소진기
  • 승인 2019.11.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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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나의 버킷리스트
소진기(수필가, 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부산경찰청 총경 소진기
수필가/부산경찰청 총경 소진기

버킷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다. 신문을 만드는 선배로부터 '나의 버킷리스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좀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지나간 세월도 긍정하지 못하는데 어떤 바람을 이야기하기가 계면쩍은 느낌이었고 의외로 나에게 '꼭'이라는 단어가 필요할 정도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하지만 죽어도 못 잊는 일은 생각이 났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난한 두 사람은 사랑이란 걸 했다. 아니 조금 양보해서 사랑이었다고 생각하는 걸 했다. 하지만 뻐꾸기 우는 사연으로 헤어지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게 되었다. 여자는 세 가지 소원을 말했다고 한다. 당신과 여행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한달 쯤만 살아보고 싶어요,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고 한다. 당신과 같은 날에 죽고 싶어요.

그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회한에 잠긴 듯 했지만 곧 의기양양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는 사랑의 귀족이었다. 누구에게 버킷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아무나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어서 말이다.

지구를 다 둘러보고 가지고 싶은 재물을 가지고 원하는 지위에 오르고 가수 하동진의 노래가사처럼 '아주 멋진 여자'를 만나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해변을 걸어본다고 해서 공허한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다. 지구라는 데를 다 둘러 볼 필요도 없거니와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고 높은 지위는 나 아니라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벌떼처럼 많으며 내가 하찮게 될 때 그 아주 멋진 여자는 쿨하게 이별을 고할지 모른다. 조물주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심순애의 마음이 흔들리도록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사람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지구상에서 단 한 명이라도 누군가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연결과 순환이라는 우주의 본질에 닿아 있는 황홀함이요 안락이다. 이에 비한다면 사하라 사막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따위의 버킷리스트는 거스름돈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잠시라도 누군가의 목적으로 여생을 살고 싶다. 그러면 나는 늘 가득 충전된 상태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베사메무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욕망에 허기가 질 때 나는 짙은 고독에 휩싸인다. 아! 그런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내 어머니 말고 누가 나를 목적으로 여길 것인가, 아내는 아이의 어머니일 뿐 내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시고 없다. 그리하여 나는 쓸쓸한 마음으로 유치환의 시구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오래전 바둑을 좋아하는 대학 선배에게 장난기 있는 얼굴로 물었다.

"형! 지금 당대 최고의 여배우랑 데이트하는 거 하고 이창호랑 바둑 한판 두는 거 중에 어떤 거 택하겠수?"

"말이라고 하나! 이창호랑 바둑두는 거."

선배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아, 그랬다. 사람은 통점(痛點)이 다르고 낙점(樂點)도 다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과거에 상처받지 말라고. 그런데 실은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과거를 회상하며 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긍정이 되지 않는 과거가 있다. 기억의 끈이 거기에 가 닿으면 나는 한없이 우울해진다. 하염없이 슬픈 아이가 거기 있다.

"아버지! 시간 지났다고 안된다 캅디더!"

토끼처럼 깡충깡충 기뻐하며 초등학교로 달려갔던 큰형님은 잠시 후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큰형님의 중학교 진학은 좌절되었고 부산 목재공장에 취직한 이후 급성폐렴을 앓다가 부산 백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숨지기 전날 큰형님은 작은 목소리로 선친께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아버지! 저, 안 되겠습니더!"

어머니께서는 급한 전갈을 받고 그 겨울의 새벽을 달려가시며 흐느끼셨다.

"어떻게~ 어떻게~ 니 성아를 묻겠노!"

수필가, 부산경찰청 총경 소진기
영화 알라딘의 '지니'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 '알라딘'의 지니가 내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나는 먼저 큰 형님의 중학교 진학과 푸르고 푸른 꿈을 주문하겠다.

유품이었던 큰형님의 두꺼운 대학노트가 생각난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밤마다 볼펜으로 긁적였을 그 노트에는 희망과 사랑, 슬픔과 고통, 별과 바람과 구름이, 그리고 한 소년의 짧은 생애가 모두 들어 있었다.

얼마 전 큰 외삼촌의 장례식장에서 법무사 일을 하시는 칠순의 작은 외삼촌께서 말씀하셨다.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생선장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어느 날 동네 어귀에서 외할머니를 마주쳤는데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 외면했던 기억이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삼촌의 눈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그때 기러기가 줄을 지어 김해 가락의 겨울밤 하늘을 넘어가던 날, 세상의 슬픈 인과율(因果律) 한 조각은 우연히 우리 집에 떨어졌었고 그 조각을 가슴에 품게 된 나는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큰형님이 너무 불쌍하고 죄송스럽다.

더더욱 가슴이 아리는 건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들고 집에 올 때마다 동백꽃 울타리에서부터 큰 소리로 '아버지!'를 외치던 그 효자의 음성과 나를 보면서도 늘 웃던 그 소년의 미소 때문이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나머지는 욕심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들이며 어쩌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왕 지니를 불렀으니 나머지 소원은 말해 보려 한다.

나는 안중근 장군을 존경한다. 스스로를 버리고 고귀함을 얻은 역사의 인물은 많지만 안중근 장군은 의무자(義務者)가 아니었으며 담당 간수 치바로 하여금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청년이었으며 사형 직전 미세한 떨림도 없이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을 붓글씨로 써 내려간 사람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장군의 존안을 모셔 두고 가끔씩 기도를 한다. 내 욕심이 얼마나 헛되고 뜬구름 같은 것인지 내 마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내 두려움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자각하기 위해서다.

내가 쓴 '다시 안중근을 위해'라는 졸시는 ’다시 또 안중근이 오면/ 지나간 일이 어찌 되었냐고/ 누가 답하리‘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나는 지니에게 안중근 장군과 술 한잔 나누며 그의 눈빛과 숨결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 한 끼에도 수십억이 매겨지는 걸 감안하면 이 소원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역사의 창문에 던진 불멸의 눈빛을 바라보는 눈부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장군은 나에게 악수를 청할 것이다. 그가 돌아서서 다시 불멸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 나는 거수경례를 해야 할지 굴신경례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손을 흔들어야 할지도 미리 생각해둬야겠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가 탁자에 두고 간 만년필이나 지퍼라이터 등의 소지품 하나를 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알라딘은 세 번째 소원으로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은 나도 고마운 사람들에게 뭔가를 베풀고 싶지만 나의 소원이기에 그냥 접고 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짓달 기나긴 밤의 황진이나 이화우 흩뿌릴 제의 기생 매창을 옆에 앉히고 거문고 듣는 밤의 풍류에 젖고 싶기도 하고 당나라로 날아가 양귀비의 술잔을 받아보고 싶기도 하다.

어차피 남는 것은 추억,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아니던가. 조선으로 날아가 이순신 장군과 차 한잔 나누며 장군이 후세에 성웅(聖雄)으로 일컬어진다는 것과 그렇지만 여전히 영웅에 대해 이치를 따지는 신문(訊問)이 지지를 얻고 서릿발 같은 증오를 가진 좀팽이들이 득세함을 일러바치고 싶기도 하다. 명량해전을 지켜보는 것은 필수 옵션이 될 것이다.

'접기로 한다'는 시가 있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그래, 접어야 한다. 아니 한 수 접어줘야 한다. 알라딘의 램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강자는 역시 한 수 접어 줄줄 안다. 한 수 물어달라는 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한 수 물어줄까?"라며 여유를 던진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아량을 가진 강자는 드물다. 약자인 내가 접히고 접어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여유가 없고 각박하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알고도 져주는 사람이 많기에 은혜와 관용이라는 말이 별처럼 반짝인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다시 살 순 없지만 새로 살 수는 있다. 반에 반만 접어주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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