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13/국선도와 크리야요가 1(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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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13/국선도와 크리야요가 1(상)
  • 서창덕
  • 승인 2019.09.1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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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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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의 세계로 접어들다

나는 늘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 당신도 그런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면 근거가 부족하다. 나는 국선도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국선도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고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스럽고 늘 고맙다.

내가 처음 국선도를 시작한 시기는 1985년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35년 전의 일이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 정신계에 특별한 시기다.

1970년대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마무리되고 1980년대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충족되자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정신문화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 첫 주자로 나선 사람이 바로 인도의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다.

달변가이자 박식한 인도의 철학교수였던 그가 쓴 책들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대한민국 정신계는 가히 라즈니쉬 선풍이 불었다. 나는 당시 번역된 그의 책들을 모두 읽었다. 어떤 책들은 밑줄을 그어가며 몇 번씩 읽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춤꾼 홍신자처럼 인도로 날아가 직접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무리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비슷하게 가르치는 곳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부산시내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가학원은 많았지만 모두 뚱뚱한 아주머니들만 북적거릴 뿐 라즈니쉬처럼 명상요가를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이런 형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바뀐 게 있다면 이상한 종류의 요가학원들이 더 늘어났고 요가 강사나 고객들이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는 정도다.

실망하고 돌아선 내 앞에 ‘국선도’라는 세로로 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국선도? 단어의 어감에서 뭔가 거창하고 짙은 명상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건물 2층에 있는 국선도 도장의 문을 두드렸고 그렇게 나와 국선도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희한한 인연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요가를 배우고 싶어 갔다가 결국은 국선도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국선도를 배우다가 다시 크리야요가를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여겼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내 운명의 각본이 그렇게 짜여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내가 국선도 도장에 갔을 때 이미 스승이 떠나고 없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산중에서 비밀리에 전수되던 국선도를 이 땅에 처음 알리신 분이 바로 청산선사라는 분이다. 그는 12살 무렵에 청운도인에게 지목되어 산에서 18년간 국선도를 배웠다. 1967년에 산에서 내려와 18년간 국선도를 가르친 뒤 1984년에 모든 것을 버리고 홀연히 다시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듬해인 1985년에 국선도에 처음 입문하게 된다. 그 뒤 나는 늘 최고의 스승들과 엇갈려 인연이 없었다. 양익스님도 그렇고 인도의 마하라지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상상이 잘 가지 않겠지만 인도의 라즈니쉬가 들어오기 이전에 대한민국은 국선도의 시대였다. 당시 제대로 된 수련은 국선도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련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때 청산선사라는 분이 홀연히 나타나 라즈니쉬처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는 우리가 예전부터 늘 들었던 도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물속에서도 30분쯤은 거뜬하게 버텼고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다.

지금 수련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국선도를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련암의 벽화를 그리신 무술의 고수 양익스님도 1년 넘게 국선도를 배웠다고 한다. 연정원의 우학도인이나 단월드의 이승헌도 마찬가지였다. 적든 많든 국선도는 많은 학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국선도는 대한민국의 정신계에 주춧돌을 놓았다.

미국의 요가난다 사원(레이크 쉬라인)(사진: 서창덕 제공).
미국의 요가난다 사원(레이크 쉬라인)(사진: 서창덕 제공).

국선도에 실망하다

그러나 처음 국선도를 배우러 갔을 때 나는 많이 실망했다.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신선들의 무릉도원 같은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도장에는 노인들만 바글바글했고 분위기도 신성한 도를 닦는 도장답지 않게 어수선했다. 무엇보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50대 중반쯤의 원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내 아래 위를 훑어보며 자꾸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픈 곳이 없다고 하면 그래도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진짜 아픈 곳이 있어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참 젊은 친구가 이상하다며 다른 질문을 했다가 다시 생각난 듯 솔직히 말해도 된다며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중에 보니 그렇게 집요하게 병을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신성한 도를 닦는 곳이 아니라 불치병 환자들의 치료소였다.

여든 두 살이라는 기골이 장대한 할아버지가 제일 연장자였는데 항상 맨 앞에서 수련을 했다. 물구나무도 잘 서고 무엇보다 방귀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그는 늘 자신의 큰 방귀소리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가스를 모아 놓았다가 한꺼번에 발사를 하는 바람에 뒤에 앉은 할머니가 늘 깜짝깜짝 놀랐다. 그 할머니는 다른 곳에 앉아 수련하면 될 텐데 항상 그 할아버지 뒤에서 수련을 했고 항상 할아버지는 수련 중에 방귀를 발사했고 할머니는 늘 ‘하이고, 이놈의 영감탱이’를 연발했다.

그 할머니의 병명은 기억에 없지만 그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처음에는 며느리에게 업혀서 왔다고 했다. 기운이 왕성해진 할아버지는 젊은 아가씨에게도 관심이 많아 수련이 끝나면 늘 원장에게 아가씨를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믿게 되었다.

당시 나는 스물 한 살이었는데 나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오십대 중반의 투자금융에 다니는 지점장이었다. 탈의실에서 둘만 남았을 때 그는 자신의 병명은 발기부전증이라고 고백했다.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나이 오십에 갑자기 발기부전증이 왔는데 국선도를 하게 되면서 말끔하게 치유되었다며 나보고 평생 동안 국선도를 놓지 말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도장에서는 자기의 병을 고백하는 게 곧 자기 소개였다.

그러나 나는 아픈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라즈니쉬처럼 명상의 세계에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실망이 컸다. 그래도 이왕 회비를 냈으니 싫어도 한 달은 다녀야 했다.

그런데 수련방법도 영 시원찮았다. 라즈니쉬의 책에 나온 것처럼 가부좌를 한 채 가만히 앉아서 깊은 선정에 들어가야 하는데 녹음기에서 나오는 이상한 노랫소리에 맞춰 자꾸만 동작을 바꾸게 했다. 이렇게 해서는 백년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한 달만 다녀보려고 했는데 당장 다음날 나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반전-국선도가 나를 살렸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도장은 부산 서면의 옛 문화관광호텔 옆에 있었는데 집이 연산동이라 버스를 타기 위해 옛 부산상고 앞까지 걸어가야 했다. 나는 내일 다시 도장에 나와야 할지, 아니면 원장에게 하루만 나왔으니 회비의 절반쯤을 돌려달라고 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200미터쯤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발이 뭔가 이상했다. 내 발은 걷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치듯이 사뿐사뿐 날아가고 있었다. 우와, 이건 뭐지?

단, 하루. 불과 1시간 20분의 수련으로 나는 지면을 스치듯이 거의 날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단 하루 만의 수련으로 이 정도라면 조금만 더 하면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축지법이구나. 더 이상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일단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휩쓸어 연금부터 확보해 놓고 하고 싶은 걸 하자. 갑자기 내 앞에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미래가 펼쳐졌다. 깨달음을 얻으러 갔다가 팔자를 고치게 됐다. 나는 열심히 국선도 도장에 나갔다.

벌써 결과를 짐작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내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불과 한번 수련에 그 정도의 진도를 나갔으면 3개월 정도면 하늘을 날아가야 되는데 3개월이 지나도 내 발은 여전히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운이 사지에 뻗쳐 발차기를 하면 팡팡 소리가 났지만 하늘을 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원장의 말대로 오기 전에 아픈 곳이라도 있었으면 병이 낫는 재미로 다닐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상은 20대 초반의 나이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재밌는 일과 유혹이 많았다. 그렇게 내 첫 수련은 기초단계인 중기단법에서 멈췄다.

그러나 세상에 의미 없는 인생은 없듯이 인생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나는 10년 뒤인 30대 초반에 다시 국선도 도장을 찾았다. 이유는 드디어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20대의 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만큼 체력이 좋았다. 오죽하면 직장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는 취한 연기를 해야 했다. 평생 그럴 줄 알았는데 30대 초반이 되자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졌다. 소주를 한 병만 마셔도 하늘이 뱅글뱅글 돌았다. 갑작스런 체력저하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늘 가슴 깊숙한 곳에 갑자기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어떡하지? 그때 문득 10년 전에 다녔던 국선도 도장이 떠올랐다.

다시 국선도 도장에 나가 수련을 했더니 불과 3개월 만에 체력이 살아났다. 체력이 살아나자 다시 나는 국선도 도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5년 뒤에 다시 내 체력이 급전직하했다. 당연히 나는 병원으로 가지 않고 국선도 도장에 갔다. 그리고 또 당연히 회복되었다. 그런데 회복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번에는 6개월쯤 다녀야 했다.

6개월 뒤 몸이 회복되자 다시 나는 국선도 수련을 멈췄다. 다시 음주가무가 이어졌다. 그런데 3년 뒤에 고장이 났다. 점점 망가지는 시간은 짧아지고 회복하는 시간은 길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 내 몸은 완전히 망가졌다. 겨울이 아닌데도 열 개의 손가락 끝이 떨어져나갈 듯 아팠다. 마치 시골에서 얼음 위에서 놀다 집에 돌아와 언 손가락을 따듯한 이불 속에 넣으면 처음에 떨어져 나갈 듯 고통이 오던 것과 똑같았다.

무엇보다 피곤한데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흘린 땀으로 이불이 축축해 매일 햇볕에 널어야 했다. 병원에 갔더니 젊은 의사가 한심하다는 듯, 또는 약간 비웃는 듯, 이제 너는 내 ‘호갱’이라는 듯, 아무튼 그런 복잡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가면 죽습니다.

그럼 약을 먹으면 됩니까? 약도 죽어가는 상태를 늦출 뿐 완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내게 약을 한 아름 안겨줬다. 술도, 담배도, 고기도, 쌀밥도 안 되고 절대 무리하면 안 되고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했다.

한 아름의 약봉지와 주사기들을 방바닥에 부어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당연하다. 내 앞에 국선도가 다시 나타났다. 과연 이번에도 국선도는 나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완치도 안 된다는 한 아름의 약과 모든 치료기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기서 치료가 되지 않으면 죽자. 살아도 죽은 인생은 의미가 없다. 나는 배수의 진을 쳤다.

쉽게 나을 병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죽기 살기로 국선도에 매달렸다. 노조위원장까지 10년 동안 해왔던 노동조합 일과 관련된 단체와 모임을 완전히 청산했다. 20년 동안 하루 네 갑씩 피웠던 담배도 끊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생식가루와 야채만 먹었다.

당시의 나는 중소기업청에 파견 나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새벽에는 국선도 도장에 나가 수련을 했고 낮에 근무하는 중에도 손님이 없으면 몰래 호흡을 했다. 퇴근 후에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국선도 도장에 들러 선도주를 무한대로 틀어놓고 하기 싫어질 때까지 했다. 저녁 9시쯤 집에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개성고등학교 운동장에 나가 밤 12시까지 걷거나 뛰었다. 또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화왕산이나 영축산에 가서 하루 종일 국선도를 했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6개월 쯤 지났을 무렵 부산 가야동에 있는 홈플러스 안에 내과병원이 생겼다. 집사람과 아이가 독감 예방주사를 맞는다고 하여 따라갔다가 간호원이 3만 원만 내면 피를 뽑아 서울로 보내 50가지나 되는 검사를 해준다며 싸니까 해보라고 했다. 아내도 내가 6개월 만에 20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지자 불안했는지 자꾸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피를 뽑았다. 보름쯤 뒤에 결과가 나왔다. 내 모든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뒤에도 내 몸의 모든 수치는 더욱 좋아져 거의 20대 수준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매년 종합검사를 받은 모든 병원의 기록을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하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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