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17/더 깊은 히말라야 속으로 2(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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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17/더 깊은 히말라야 속으로 2(상)
  • 서창덕
  • 승인 2019.10.0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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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덕
서창덕

텐트를 발견하다

내려갈 시간이 촉박했지만 나는 더 위쪽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약간 오르막이었지만 거의 평지나 다름없어 편안하게 주위를 감상하며 올라갈 수 있었다. 제법 아름다운 길이었다. 작은 수로를 따라 오솔길이 이어졌고 군데군데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어 길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백두산의 꽃들처럼 히말라야 꽃들도 작지만 아름답다. 고산지대에 사는 꽃들은 모두 작다. 그러나 특별함이 있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겠지만 혹독한 환경을 이기고 피는 꽃들은 온실에서 자란 화려한 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단단한 힘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단단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히말라야에서 도를 완성한 사람들이 더 높고 더 멀리 향기를 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오솔길 모퉁이를 돌자 숲속에 사원 하나가 나타났지만 불안정한 비탈에 세워져 있어 그냥 지나쳤다. 절이나 사원은 자리가 중요하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의 천년고찰 중에 명당이 아닌 자리에 세워진 걸 보지 못했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듯이 사람은 절대 땅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사업도 마찬가지다. 내가 은행에 근무하는 동안 좋지 않은 터에 위치한 사업장이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나쁜 터에서 망하는 경우는 너무 많이 봤다. 5년 전 쯤에 부산의 무지개공단에 굉장히 싼 가격에 공장이 나와 거래처 사장과 함께 둘러보러 갔었다. 그런데 그 공장의 사장실에 들어간 나는 채 5분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다. 같이 갔던 사장은 자기는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만류했다.

나는 국선도 수련으로 몸속의 쿤달리니가 갑자기 열리고 난 뒤 땅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고수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은 간단했다. 나는 기운이 좋은 자리에 가면 수련을 하는 것처럼 등 뒤로 기운이 올라갔고 수맥이 많이 흐르는 좋지 않은 자리에 가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체한 것처럼 금방 답답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발을 딛고 있는 땅의 영향을 받지만 일반인들은 그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우디바바의 정문(사진: 서창덕 제공).
우디바바의 정문(사진: 서창덕 제공).

나는 비탈에 위치한 사원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갔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형태만 남은 낡은 다리를 건너자 ‘우디바바(UDDIBABA)’라고 쓴 문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나무를 길 양쪽에 세우고 작은 글씨로 ‘팜 캠프 앤 카페(FARM CAMPS & CAFE)’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캠핑이 된다는 뜻이다.

허술한 정문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사진에서 본 것과 비슷한 몇 개의 텐트가 보였다. 드디어 내가 찾던 목적지였다. 좌우를 둘러보니 완벽한 명당의 자리였다. 이렇게 높이 올라온 곳에 이렇게 넓고 아늑한 터가 있을 줄이야. 흡사 히말라야 최고 수행지인 바드리나트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수세기 전에는 분명 수행하는 아쉬람이었으리라.

세어보니 텐트는 정확히 10동이었다. 여섯 명이서 다섯 개의 텐트를 쓰고 있었고 하나는 주인이 썼다. 마침 가장 좋은 자리에 텐트 하나가 비어 있었다. 하루 자는 가격도 식사 포함 이만 오천 원 정도였다. 나는 짜이 한 잔과 야채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고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택시기사와 약속된 시간은 이제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택시가 기다리는 곳까지 내리막길이지만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30분 쯤 늦을 것이다. 그러면 뻔뻔한 택시기사는 분명 지체된 시간만큼의 요금을 더 내라고 닦달할 것이다.

그러면 그냥 이곳에 눌러 앉아버릴까. 그러면 그는 몇 시간을 더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다 밤이 되면 빈 차로 투덜거리며 내려갈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가서도 그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그의 가족들도 한국에서 왔다던 낯선 여행자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도 그가 나를 먼저 속였으니 나도 그를 속일 권리가 있지 않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우디바바에서 만든 샌드위치와 인도의 전통차 짜이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탁 트인 전망도 좋았고 햇살도 적당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리시케시의 소음을 피해 도망쳐왔다. 먼 계곡 숲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새소리가 또렷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이 정도면 한 달 쯤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나도 여기서 한 달쯤 있으면 마하라지가 스물에 달성한 12시간의 삼매에 이를 수 있을까.

히말라야의 꽃(사진: 서창덕 제공).
히말라야 꽃(사진: 서창덕 제공).

스승은 떠나 버리고...인생은 늘 혼자다

스무 살의 마하라지가 불과 한달 수련으로 12시간의 삼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히말라야라는 환경 외에 엄청난 능력을 지닌 큰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은 물질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직 식탐을 극복하지 못했던 젊은 마하라지와 친구는 갑자기 델리(Delhi)에 있는 유명한 제과점의 과자가 먹고 싶어졌다. 스승은 웃으며 그 과자를 준비해줄 테니 강에 가서 얼굴을 씻고 오라고 했다.

그들이 강에서 얼굴을 씻고 돌아오는 길에 곰을 만났고 도망치듯 동굴로 돌아왔을 때 동굴에는 접시에 막 구운 따듯한 과자가 놓여 있었다. 맛을 보니 델리의 유명한 제과점의 과자와 비슷했지만 약간 달랐다. 만약 과자의 맛이 똑같았다면 스승의 능력은 물질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물질을 이동시키는 능력이다.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하는 것과 물질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능력이다.

그들이 다시 강으로 가 입을 씻고 왔을 때 접시와 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의 스승은 원소를 자유로이 지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절정의 단계에 도달한 스승 옆에서 수행을 쌓는 일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즐거움이었다. 스승의 이름은 파라마나다 아바드흐타로 불리며 펀잡(Punjab) 지방에서 태어난 수행자였다. 스승은 가끔 깊은 물속에 들어가 몇 시간씩 삼매에 들곤 했다.

그러나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의 수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행이 20일쯤 되었을 때다. 그들의 소문을 듣고 산림청의 관리가 찾아와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도가 높은 수행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최고의 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은 그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오기로 한 날 스승은 깊은 물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산림청의 관리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부르러 왔지만 스승은 1시간이 넘도록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오래 물 안에 있는 건 뭔가 분명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불안해했고 덩달아 불안해진 두 제자들도 마을사람들과 동조해 스승이 삼매에 빠져 있는 깊은 물속을 뒤져 겨우 스승을 끄집어 올렸다.

결가부좌를 한 채로 물가로 올라온 스승은 한참이 지나자 심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이때 스승의 눈은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관리와 마을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서서히 입을 뗀 스승은 두 제자를 향해 강하게 질책했다.

“내가 혼자서 물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희들은 무슨 연고로 나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느냐? 오늘은 일절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마을사람들과 관리가 나서서 용서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스승은 화를 거두지 않았고 모두에게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스승은 4일 동안 두 제자에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31일째 되는 날 밤 11시가 되자 둘을 앞에 앉게 하고 다음날 새벽 2시까지 행법을 가르쳤다. 2시가 넘자 스승은 둘에게 잠깐 눈을 붙이라고 하고 자신은 늘 머물던 강가로 갔다. 제자들은 평소와 다른 낌새에 불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4시 기도시간이 되자 그들은 스승이 늘 머물던 강가로 갔다. 그러나 스승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하라지는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큰 스승을 만나 불과 한 달 만에 12시간 삼매에 들 정도로 엄청난 진보를 이룬다. 아마 그 스승 밑에서 계속 수행을 쌓았다면 히말라야에서 영원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바바지처럼 신의 화신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렵게 만난 스승은 어떤 설명도 없이 떠나버렸다.

둘은 몇 달 동안 히말라야를 뒤졌지만 스승을 찾지 못했다. 늘 강조하듯이 절대 제자는 스승을 찾을 수 없다. 처음에 그들이 우연히 스승을 만난 것 같지만 사실 우연도 스승이 미리 준비한 것이다.

친구와도 헤어졌다. 모포 한 장을 들고 집을 떠날 때처럼, 스무 살의 젊은 마하라지는 히말라야 눈밭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그때 그가 한번쯤 머물렀을 것 같은 히말라야 기슭에 앉아 식은 짜이를 마시며 생각했다. 인생은 늘 혼자다. (하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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