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9/알코올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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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9/알코올 냄새
  • 서창덕
  • 승인 2019.08.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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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요가는 헌신이다
서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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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으로 들어가다

다음날, 나는 전편에 소개한 매우 귀중한 책 〈쿤달리니 탄트라〉의 저자 스와미 사티아난다 사라스와티가 12년이나 머물렀던 시바난다 아쉬람으로 향했다. 요가 니케탄 아쉬람 바로 옆이기 때문에 담장을 뛰어넘어도 되지만 높이가 5미터쯤 된다. 설사 담이 낮더라도 신이 머무는 아쉬람을 방문하며 담치기를 한다는 것은 경찰서를 터는 일 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아쉬람의 위치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리시케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다리가 있는데 람 줄라와 락슈만 줄라다. ‘줄라’는 인도말로 ‘다리’라는 뜻이다. 람 줄라가 강폭이 넓은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훨씬 길고 락슈만 줄라는 강폭이 좁은 상류에 있어 길이가 짧다.

리시케시를 방문하는 인도인들은 이 다리를 꼭 건넌다. 람과 락슈만은 라마야나 전설에 나오는 형제의 이름인데 다리를 건너면 라마야나의 전설로 들어가는 셈이다.

람 줄라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면 바로 시바난다 아쉬람 정문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아쉬람으로 들어가면 라마야나의 전설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아쉬람의 위치가 이런 의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시바난다 요가가 인도는 물론 세계적인 요가로 뻗어나간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시바난다 아쉬람 정문으로 가려면 내가 머무는 아쉬람 정문을 나와서 100미터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고작 100미터라도 차와 릭샤와 오토바이와 말들이 뒤섞여 빠르게 오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나는 앞뒤에서 돌진해 오는 무리들을 요리조리 피해 빠른 걸음으로 시바난다 아쉬람 정문에 무사히 들어섰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갑자기 역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뭐지? 아쉬람 입구에서 알코올 냄새를 맡기는 처음이었다. 알코올로 만든 향수가 있나? 신성한 곳이니 알코올 향수로 깨끗하게 소독하고 들어와라? 그럴 듯한데. 나는 코를 킁킁대며 원인을 찾았다. 그런데 알코올 향수가 아니었다. 아쉬람 입구 바로 맞은편에 시바난다 병원이 있었다.

“어느 날, 락슈만 줄라를 향해 걷고 있는데 길가에 뭔가 가득 차 있는 마대자루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치다난다가 그 마대자루를 아쉬람으로 가져왔는데 그 안에 한센병을 앓는 노인이 들어 있었다. 시바난다는 목욕과 면도를 시키고 그를 돌봤다. 나 또한 치료에 동참했지만 의무만 다했지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50년 동안 열심히 수행했지만 나의 영적인 자동차는 1인치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과 함께 했을 때 비로소 나의 영적인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사띠아난다 사라스와티

예전에 리시케시에는 한센병 환자가 엄청 많았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사띠아난다 사라스와티의 스승 시바난다는 수행자가 되기 전에 원래 의사였다. 1887년생인 그는 외국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현대의학에 한계를 느껴 37세에 인도에 돌아와 영적인 탐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리시케시에서 스승을 만나 출가를 하게 된다. 출가 3년 뒤인 1927년에 그는 리시케시의 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할 시설과 무료병원을 지었다.

시바난다 덕분에 리시케시의 많았던 한센병 환자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시바난다는 치료와 수행을 겸하며 12년간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1936년 현재의 시바난다 아쉬람을 세웠다. 그는 1963년 77세에 입적했다.

바로 옆에 담장을 맞대고 있는 요가 니케탄 아쉬람을 세운 마하라지는 시바난다와 똑같은 1887년생인데 1985년 99세에 입적한다. 어떤 자료에는 108세에 입적했다고 하는데 구글의 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99세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두 분이 동년배에다 아쉬람이 담장을 맞대고 있어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데 두 분의 인생과 아쉬람을 비교해 보면 더욱 재밌는 의미들이 드러난다.

(사진: 서창덕 제공).
시바난다 아쉬람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사진: 서창덕 제공).

마하라지와 시바난다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아쉬람을 설립한 마하라지는 15세에 집을 나와 히말라야를 떠돌며 여러 스승들을 만나 수행을 시작해 55세까지 무려 40년간 히말라야에서 오로지 수행만 한다. 55세인 1942년, 비로소 티베트에서 온 200세가 넘은 스승을 만나 마지막 가르침을 받고 모든 것을 완성한 뒤, 1951년부터 리시케시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시바난다 아쉬람이 생긴지 15년이나 지나서야 바로 옆에 지금의 아쉬람을 세운 것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두 아쉬람 모두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다.

시바난다의 제자들이나 시바난다 요가를 배운 사람들은 약간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두 분이 성취한 수준은 달랐다. 모두 궁극의 세계에 도달한 경지인데 어느 쪽이 높다 낮다 덧붙이는 건 어리석은 비교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일반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보면 마하라지 쪽이 훨씬 높았다. 여러 자료들과 정황적 근거 등을 감안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바난다는 의술과 약으로 병을 치료했지만 마하라지는 전혀 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초능력만으로 치료했다. 불치병, 불구자 등 마하라지가 환자를 치료한 사례는 거의 예수님 수준이었다. 시바난다 아쉬람보다 15년이나 늦게 문을 열었지만 마하라지의 아쉬람에는 매일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능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게 우선 마하라지의 수련기간이 훨씬 길었다. 15세부터 55세까지 무려 40년간이다. 40년 동안 그는 대부분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에서 오로지 수련과 명상과 단식으로 보냈다. 그에 비해 시바난다는 12년간 주로 리시케시에서 수련했는데 그 중에 9년은 병원을 세워 나환자들의 치료를 병행했다.

어떤 일을 10년 한 사람과 20년 한 사람과 30년 한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은행에 10년 근무한 직원은 은행 업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20년 근무하다보면 10년 전의 내가 그때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는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은행에서 30년 근무한 사람은 20년 근무한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인 일도 이럴진대 하물며 도의 세계는 오죽할까.

더구나 마하라지는 이미 갓 스무 살에 12시간을 꼼짝 않고 삼매에 들 수 있었다. 50세가 넘었을 때에는 무려 12일 동안 깊은 삼매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더 높은 공부를 위해 스승을 찾아 히말라야 설산을 뒤졌다. 12일 동안 완전한 삼매에 든다는 것은 이미 그가 호흡과 맥박이 완전하게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야 12일 동안 화장실도 가지 않고 물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다.

잡념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폐와 심장이 완전히 멎어야 한다. 계속 숨을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삼매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왜? 숨을 따라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숨은 쉬는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우리 인체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12일을 완벽한 삼매에 들 정도면 열에 아홉은 모두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마하라지는 엄청나게 철저한 수행자였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전이라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아직 신과의 합일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55세에 히말라야 깊은 산중에서 200세가 넘은 스승을 만나 마지막 공부를 완성한다.

(사진: 서창덕 제공).
시바난다 기둥(사진: 서창덕 제공).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법이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할까? 아니면 스승이 제자를 선택할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결론적으로 제자는 절대 스승을 선택할 수 없다. 왜? 하수는 고수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스승이 여러 가지를 보고 제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55세의 마하라지처럼 스승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물론 이때의 스승은 꼭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만은 아니다.

자, 그렇다면 현재에서 다시 돌아보자. 시바난다는 1936년 현재의 아쉬람을 만들어 27년 뒤인 1963년에 입적한다. 마하라지는 1951년에 현재의 아쉬람을 만들어 34년 뒤인 1985년에 입적한다.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지 30년이 넘었다. 성취한 능력이나 요가를 전파한 기간 등에서 당연히 마하라지의 요가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 하지만, 현 시점에서 두 단체를 결산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요가를 오래 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시바난다 요가는 현재 세계 60개국에 센터가 있으며, 그의 제자인 〈쿤달리니 탄트라〉의 저자인 스와미 사티다난다 사라스와티는 인티그럴 요가를 만들어 세계 40개국에 보급했다. 수제자인 스와미 치다난다는 인도에서 기념우표까지 나올 정도로 성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인도를 대표하는 요가단체로 발전했다.

이에 비해 내가 머물고 있는 요가 니케탄 아쉬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아쉬람의 현 실정을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독자들도 지루할 것이고, 내 건강에도 매우 유익하지 못한 일이다. 궁금한 분들은 앞의 연재물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마하라지의 요가를 배우고자 달려온 갸륵한 구도자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라도 얹어줄 제자가 단 한명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다. 단 한명도.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과 비슷한 기적을 행했던 마하라지의 비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하라지가 가르친 수천 명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구도(求道)의 방향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의 비법을 찾아내 최고로 열심히 수련하면 최고가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며칠 동안 머리 주위에 먹구름이 잔뜩 머물러 있는 듯 머리가 아팠다. 습관성 탈골처럼 또 길을 잃은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차분하게 이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시바난다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요가에 입문한 게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현대교육을 받았던 그는 요가도 현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하게 체계화했다. 특히 그는 현대의학을 접목해 요가가 의학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많은 저술을 통해 설명했다. 몸의 긴장을 풀고 긍정적인 생각과 좋은 음식을 먹고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분석하고 사례를 제시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인들의 구미에 딱 맞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시바난다 요가의 성공배경에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사진: 서창덕 제공).
시바난다 아쉬람 내부(사진: 서창덕 제공).

BE GOOD DO GOOD!

가파르게 이어진 시바난다 아쉬람의 입구 계단을 올라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탑처럼 생긴 시바난다의 기둥(Sivananda Pillar)이다. 카메라를 갖다 대니 어디선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기둥에는 시바난다의 생애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중간에 큰 글자로 봉사, 사랑, 명상, 깨달음(Serve, Love, Meditate, Realize)을 새겨 놓았다. 이것이 바로 시바난다 요가의 핵심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국선도 수련을 하다 몸에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들을 해결하려고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크리야 요가를 배우게 되었다. 요가를 배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바로 헌신과 봉사다. 나는 수련을 하고 싶었지 봉사나 헌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명상과 전혀 관련이 없는 교회나 시민단체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봉사와 헌신이 어떻게 명상과 연결되는지 이해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사띠아난다 사라스와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승인 시바난다의 지시에 의해 마대자루 속에 있던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지만 환자의 고통과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인 자동차가 1인치도 전진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에이 설마? 이미 쿤달리니가 두 번이나 열린 사람인데. 그렇다면 사띠아난다의 고백은 과장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왜 그런 것일까? 나처럼 궁금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띠아난다는 이런 말도 했다.

“모든 것이 신이다. 하늘의 제단에서만 신을 찾지 말라. 개, 돼지, 병든 자, 가난한 자를 섬겨라. 봉사하고 희생하며 도움이 되는 삶을 살라. 그것이 요가의 비밀이다.” -사띠아난다 사라스와티

병든 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면 그들이 어떤 작용을 해서 내 영적인 진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 병든 자와 가난한 자도 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신에게 봉사하듯이 돌보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신을 느낀다는 것은 나의 주관, 나의 아집, 나의 에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신에게 완전하게 맡기는 것이 바로 헌신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완전한 헌신은 만물에 대한 봉사로 이어진다. 그래서 봉사는 헌신과 같은 의미이고, 이것이야말로 최고 요가의 비밀이다.

국선도를 최초로 보급한 청산선사께서는 자연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높은 단계의 수련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위와 같은 의미다. 단전호흡에 집중하는 것보다 내 마음을 완전하게 비웠을 때 비로소 우주의 진기가 내 몸에 들어온다는 원리를 체득하지 못하면 진기단법의 진입은 불가능하다.

시바난다 기둥을 카메라에 담고 나는 곧장 아쉬람 안으로 들어갔다. 아쉬람의 명성과 큰 넓이에 비해 내부는 너무 한산했다. 오전 11시가 되어 두 명의 사제가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고 세 명의 나이든 할머니가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맨 뒤에 서서 합장을 하고 의식에 동참했다. 합장은 늘 언제 어디서나 평화와 동의의 강력한 의사표시니까.

그들도 외국인인 내가 약간은 신경이 쓰이는 듯 했지만 진지하게 합장을 하고 있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시바난다 아쉬람은 외국인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내국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바난다 아쉬람에는 외국인 방문객이 매우 드물다.

긴 홀의 양쪽에는 시바난다가 살았을 때의 행적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주로 한센병 환자들을 수술하거나 봉사하는 장면이다. 그때 정면에 크게 쓴 글자 'BE GOOD(베풀라), DO GOOD(선한 행동을 하라)'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것이다. 좋아지고 싶으면 좋은 행동을 하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주된 의미는 행동이다. 신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신처럼 행동하라. 당신이 신이라면 신의 모든 창조물의 고통에 태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오래 수련해야 저 그림처럼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그들에게 면도를 해주고 목욕과 치료를 해줄 수 있을까? 30년쯤 열심히 수련하면 살이 썩는 냄새와 떨어지는 진물을 거부감 없이 내 몸처럼 아끼고 껴안을 수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사성제와 팔정도만으로 불교가 그렇게 많은 나라에 전파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지금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시바난다의 수행의 시작은 늦고, 수행기간도 짧았지만, 신에 대한 완벽한 헌신과 봉사로 많은 우수한 제자들이 모였고, 그의 요가는 더 멀리 더 넓게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불교에는 대승과 소승의 해묵은 논쟁이 있다. 흔히 소승은 자기만의 해탈을 추구하고 대승은 중생의 구제가 목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느 한쪽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 않다. 해탈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설치는 것도 위선이고, 자기만 해탈하면 끝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다. 왜? 이기적인 것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탈과 중생의 구제가 함께 가야 한다.

40년간 오로지 해탈만을 추구했던 마하라지가 헌신과 봉사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무려 45년간 매일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헌신과 봉사를 몸소 실천했다. 그것도 약이 아닌 그가 힘들게 쌓아 올린 영적인 힘으로 치료하고 도움을 줬다. 자신의 기력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본인에게 힘들고 고통을 주는지를.

그의 제자였던 일본인 기무라는 만약 마하라지가 사람들을 조금만 적게 돌봤다면 충분히 200세 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마하라지는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영적인 도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이러한 헌신을 그 많은 제자들은 배우지 못했다. 배우지 못 했다기 보다는 실천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헌신을 최고의 요가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최고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닐까.

“수행이 진척되는 것은 단순하게 수행을 계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생에 지은 업을 포함해 모든 선한 업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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