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8/야곱의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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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8/야곱의 사다리
  • 서창덕
  • 승인 2019.08.09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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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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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달리니를 깨워 달라

“Dear Sir(친애하는 선생님). 저는 브라질에서 요가스쿨을 만들어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도에 와서 열심히 요가를 배웠고 쿤달리니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쿤달리니를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쿤달리니를 깨울 수 있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Please(제발).”

영어로 번역된 내 책(<You‘re the God who got lost>)을 읽은 브라질 청년 티아고가 왓츠앱(Whats App)으로 위와 같은 긴 문장의 글을 보내왔다. 왓츠앱은 카카오톡이랑 비슷한데 무료이고 인도의 웬만한 오지에서도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인도에 장기간 머무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왓츠앱을 쓴다. 티아고는 잘 생긴데다 마음도 착하고 기타도 잘 치는 매력적인 친구였다.

왓츠앱으로 보내온 티아고의 문자가 문득 내 위치를 깨닫게 했다. 인도에 와서 몇 개월 동안 나름 열심히 노력했건만, 결국 나는 인도에 오기 전의 출발점, 쿤달리니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많이 전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답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나라마다 다르게 답이 나온다면 그건 보편적인 인간의 답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한국에서 불교를 익혀 깨달음을 얻은 양익스님이나 인도에서 요가를 배워 피안의 세계에 도달한 마하라지나 마지막 가르침은 몸 안의 쿤달리니를 깨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 티아고의 한탄처럼, 리시케시에서 제대로 쿤달리니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비단 리시케시 뿐만이 아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어디나 누구나 쿤달리니를 강조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쿤달리니를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없다. 그래서 티아고처럼 한탄하고 실망하는 것이다.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쿤달리니에 관한 귀중한 한 권의 책이 있다. 직접 배우는 것 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열정을 가진 사람에겐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인도의 스와미 사치야난다 사라스와티가 쓴 <쿤달리니 탄트라>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내 체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나는 정신병원에 갔을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책의 저자는 지금 내가 있는 아쉬람과 담장을 맞대고 있는 바로 옆 시바난다 아쉬람의 제자였다. 내가 이 책을 구입했던 해가 2003년인데 그때는 내가 평생 인도에 한번이라도 올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나는 그가 있었던 아쉬람과 담장을 같이 쓰는 아쉬람에 와 있다.

사라스와티의 책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 책대로 열심히 따라한다고 해도 쿤달리니를 깨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그럴 바엔 차라리 전편에 나왔던 갠지스강의 두 여자처럼 쿤달리니가 깨어나게 해 달라고 쉬바에게 제물을 바치며 기도한다. 그러나 쉬바가 기도에 응답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친애하는 티아고. 나도 네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물론 나도 너를 간절히 돕고 싶다. 요가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쿤달리니가 깨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하면 쿤달리니가 깨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내 체험은 의도가 아닌 우연이었다.”

티아고에게 환상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실망한 티아고는 연락을 끊었다. 아마 지금쯤 브라질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려서부터 범죄와 마약에 노출되기 쉬운 브라질의 청소년들을 요가명상을 통해 바르게 키우겠다는 그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브라질 청년 티아고(사진: 서창덕 제공).
브라질 청년 티아고(사진: 서창덕 제공).

문제는 쿤달리니다

사라스와티는 삼매, 열반, 해탈 등 어떤 수련이라도 목표는 쿤달리니의 각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강조하지 않는 요가의 스승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쿤달리니는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쉽지 않지만 일단 깨어나게 되면 쿤달리니는 타고난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한다. 효과와 강도 면에서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전편에서 예를 든 비베카난다는 강력한 쿤달리니가 깨어난 대표적인 인물이다. 1862년 인도의 벵골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요가를 처음 전한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신자가 대부분인 미국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물론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을 봤는가? 못 봤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라야 복이 있다. 확신도 없으면서 믿는다는 건 위선이다. 위선자보다는 차라리 무신론자가 돼라.

미국인들은 미개한 나라에서 온 젊은이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신을 봤어? 물론이다. 나는 봤다. 어떻게 봤는데? 요가를 통해서다. 요가를 하면 당신도 당신이 믿는 신과 만날 수 있다. 그의 장담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요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을 볼 수 있게 해줬다.

사실 비베카난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거짓과 위선을 용납하지 않는 칼 같은 성격이었다. 심지어 위대한 스승 라마크리슈나가 늘 본다는 신도 자기 마음이 꾸며낸 환상이라며 비난했다. 그랬던 비베카난다는 어느 날 쿤달리니를 경험했고, 자신의 몸이 사라졌다며 스승에게 찾아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가르쳐 달라며 울면서 애원했다. 무신론자인 비베카난다를 단번에 바꿔 놓은 게 바로 쿤달리니다.

쿤달리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다. 쿤달리니라는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똘똘 감겨진 에너지’라는 뜻이다. 감겨진 형태가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과 비슷해 뱀의 형상으로 표시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환상이 아닌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짜 에너지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나며 매일 조금씩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간다. 쿤달리니의 핵심은 에너지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면서 왔던 곳으로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밖으로 흐르는 에너지를 차단하면 에너지가 척추를 타고 머리로 상승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요가의 나디(Nadi)현상이다.

인도 사람들은 이 에너지의 원천이 성기 부근에 있다고 하여 남성의 성기를 닮은 돌에다 위로 올라가는 뱀을 조각한다. 이 에너지가 상승하면 쉬바의 삼지창처럼 육체와 마음의 나쁜 것들을 모두 파괴하고 맑고 깨끗하게 재생시킨다. 뿐만 아니라 많은 초능력도 생기게 되고 나중에는 신과도 만나게 해준다.

쿤달리니 뱀(사진: 서창덕 제공).
쿤달리니 뱀(사진: 서창덕 제공).

문제는, 에너지를 보존하고 축적하는 일이다

쿤달리니 원리의 핵심은 밖으로 흐르는 에너지를 극도로 아끼고 키워서 처음 흘러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이때 의식도 함께 되돌아가서 본래 자신의 자리를 보게 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다. 에너지와 의식은 같은 것이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깨달음도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것은 과도한 에너지 낭비를 차단하고 내부에 축적하는 일이다.

우선, 우리가 가장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곳부터 차단해야 하는데 첫 번째가 바로 뇌다. 물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는 충분히 에너지를 써도 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쓸데없이 낭비되는 에너지가 매우 많다. 필요 없는 걱정, 필요 없는 비판과 간섭, 컴퓨터 게임, 오락 등등. 대개 과한 걱정이나 스트레스는 과한 욕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욕심을 덜어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뇌가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는 명상이 최고다.

그 다음으로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곳이 성에너지다. 동물들은 번식할 때 외에는 섹스를 하지 않는데 사람만이 번식과는 상관없이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한다. 그만큼 태어날 때 많은 에너지를 갖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많은 에너지를 준 것은 섹스를 즐기라고 준 것이 아니다.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라고 준 연료다. 그러나 대부분 쓸데없는 곳에 연료를 소진하고 어두운 곳에서 방황한다.

가짜 쿤달리니를 조심하라

인기상품에는 늘 가짜가 판을 치듯 쿤달리니에도 유사품이 많으니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유사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본인이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작년에 나는 내 책을 읽은 독자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매우 과도하게 예의가 바른 듯 존경한다느니 등등의 낯간지러운 표현으로 접근하더니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론은 자기가 나보다 훨씬 단수가 높은 사람이라며 내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자기가 일부러 아까운 시간과 전화비를 들였으니 내가 고마워해야 한다는 뉘앙스까지 풍겼다. 불쾌했지만 나는 늘 배울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 왔다. 혹시 진짜 엄청난 고수일지도 모르니까. 늘 겸손해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만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쿤달리니를 깨웠습니까? 하하, 물론이죠. 어떻게 되던가요? 그냥 회음부위에 집중하니까 금방 되던데요. 회음부위 아시죠? 아, 예, 물론이죠.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되셨죠? 어떻게 되긴요. 회음부위에서 뜨거운 기운이 태동하더니 곧바로 척추를 타고 머리에 있는 사하스라 차크라로 올라갔죠. 곧바로요? 예. 곧바로요. 사하스라 차크라 아시죠? 예, 알다마다요. 예,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럼 이만 바빠서 전화를 끊어야 되겠습니다. 예? 은행이라는 곳이 원체 바쁜 곳이지 않습니까.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그때서야 자칭 고수는 자신이 뭔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니, 저 선생님, 선생님 잠깐만요, 처음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처럼 다시 지나친 존경심으로 선생님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은행의 지점장이지 학교의 선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본인이 만든 쿤달리니의 유사품이다.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이 사람의 표현처럼 금방 사하스라 차크라로 올라가지 않는다. 엄청난 과정과 아픔과 우여곡절이 있어야 한다. 쿤달리니가 준비 없이 깨어나는 바람에 죽을 뻔 했던 인도의 고피 크리슈나는 무려 17년이나 걸렸다. 내가 보기에 최소한 12년 이상은 걸리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쿤달리니가 가동되었다는 것은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앞에 전화를 건 사람처럼 금방 사하스라 차크라에 올라가서 모든 걸 깨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 사람도 나름 진실일 수 있다.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즉, 본인이 만든 유사품이다.

사람은 절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의식이 바뀌고 세포가 다시 자리를 잡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쿤달리니는 환상이 아닌 생생한 실제다. 실제가 아닌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특히 명상이나 종교는 더욱 그렇다. 버리지 않으면 아까운 인생을 망친다.

다른 사람이 만드는 유사품도 본인만큼이나 주의를 해야 한다. 3개월 속성, 또는 6개월 속성으로 쿤달리니를 열고 차크라를 뚫어 주겠다는 사람은 100% 가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못했던 경지다. 어떤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자기보다 한참 아래라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타인도 고통을 주지만 결국 본인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유능한 변호사를 산다고 하더라도 지옥행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무지한 사람들도 주의가 필요하다. 주위에 보면 자신이 쿤달리니가 가동되었는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소모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떤 사람은 그게 뭔지도 몰라 맘껏 에너지를 쓰면서 이미 소진한 뒤였고,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이유로 쿤달리니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쿤달리니가 피해가라는 법은 없다. 준비된 사람은 때가 되면 누구나 깨어난다. 양익스님이 말씀하신 ‘시절인연’이다. 야곱이 본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바로 이것이고,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의사협회의 상징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도 바로 쿤달리니다.

아쉬람 도서관(사진: 서창덕 제공).
아쉬람 도서관에 소장된 나의 책(사진: 서창덕 제공).

갠지스강에 발을 담그다

“때때로 기억이 떠오른다. 스승과 함께 리시케시에서 살 때, 아침마다 갠지스 강가에 나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강물 속에 들어가 왕복으로 다섯 번씩 헤엄을 치곤했다. 한번은 스승인 스와미 시바난다가 나를 불러 ‘헤엄을 계속 칠래, 아쉬람을 떠날래’ 하고 크게 꾸짖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스와미 사티아난다 사라스와티

<쿤달리니 탄트라>를 썼던 스와미 사티아난다 사라스와티가 건넜다는 갠지스강 바로 그쯤에서 나는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갔다. 겨울이 아닌데도 물이 찼다. 빙하가 녹아 있고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리시케시의 강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울 수밖에 없다. 강폭이 대략 1km는 될 것 같다.

20년 전만 해도 강폭은 지금보다 좁았다고 한다. 그때 갠지스강을 수영으로 건넜던 분은 만만하게 봤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고 한다. 겉으론 잔잔해 보여도 속에는 물살이 엄청 빨랐던 것이다. 그런데 사라스와티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겨울에 이 강을 왕복으로 다섯 번씩 다녔으니 쿤달리니의 에너지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헤엄만 치며 소모해 버리면 끝이기 때문에 스승인 시바난다는 수영을 멈추지 않으면 아쉬람에서 내쫓겠다고 야단을 친 것이다. 스승 시바난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그는 12년 동안 아쉬람에 머물며 쿤달리니 에너지를 신으로 향하게 해 마침내 신과 합일할 수 있었다.

금방 차가운 강물에 발이 아려 왔지만 나는 사라스와티처럼 수영으로 강을 건너지는 못할망정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며 눈을 감았다. 강에서 올라온 서늘한 기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시원한 감로가 되어 흘러내렸다. 마음은 더욱 맑고 고요해졌다. 하늘에서 수백 개의 별이 쏟아졌다. 갠지스강에 발을 담그고 명상을 한다고 하여 인도에서는 아무도 쳐다보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언제나 모든 종교적 행위가 가능한 곳이 인도다. 더군다나 여긴 신성한 갠지스다. 나는 밤이 저물도록 마음껏 외쳤다.

옴 나마 쉬바야(Om Namah Sivaya, 내면의 참나로 계시는 신을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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