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③] 기자-총장에서 시인-소설가, 그리고 국제 문화 교류의 주창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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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③] 기자-총장에서 시인-소설가, 그리고 국제 문화 교류의 주창자까지
  • 차용범
  • 승인 2018.11.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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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년’ 강남주 작가에게 노년(老年)의 길을 묻다 / 차용범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②]에서 계속. 인터뷰 시점이 5년 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자-대학총장에서 시인-소설가까지

강남주 총장, 그는 사회적 성취 면에서 많은 결실을 거둔 사람이다. 부산MBC와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부경대 교수로 전신, 2000년부터 4년간 총장을 지낸 뒤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엔 조선통신사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과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도 맡았다. 그는 일찍부터 작가였다. <해저의 숲>을 시작으로, 9권의 시집을 낸 원로시인이다. ‘중심과 주변의 시학’부터, 평론집도 3권을 냈다.

Q. 은퇴 후의 노년 공직,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다. 국립대학 총장을 지내고 그 직책을 맡은 것, 세속적으로 또 다른 영달의 자리인가?

“부산시가 초대 대표를 공모할 때 내가 물망에 오르내리는 것을 알았다. 주위의 권유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가 평생을 문화의 언저리에서 살았으니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는 생각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주위의 충고에 힘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부산광역시는 부산의 문화정책을 민간주도로 관장할 부산문화재단을 설립, 2009년 2월 출범에 맞춰 강 총장을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당시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다. 언론은 그를 "온화한 성품에 경륜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언론계 생활과 부경대 총장을 지내며 행정력도 인정받았다면서-.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대중과 소통 노력

Q. 초창기 과제, 어떻게 대처했나?

“재단은 부산 문화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컨트롤 타워다. 특히 관 주도 문화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의성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동했다. 우선 조직의 안정성, 독립성, 자율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이 부분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러나 관행의 혁파는 어려웠다. 부산시의 문화정책과 민간인적 시점에서 생각하는 문화정책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 예산을 쥐고 있는 시의 의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신생 문화재단에 대한 문화계의 다양한 기대와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을 때의 고통도 상당했다. 그의 기억이다.

Q. 주변의 기대심리는 높고 할 일은 산더미 같았을 터, 어떤 사업들을 추진했나?

“종래의 문화예술 지원사업 외에 부산의 문화예술 지형을 다듬을 대중 프로그램부터 가동했다.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열고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부산의 숨은 관광자원을 발굴하는 테마가 있는 여행 프로그램, 문화예술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도 시작했고. 이른 바 대중과의 소통 노력이다.”

기억나는 기획, 우선 '인문학 아카데미', '휴머니티즈 21-CEO를 위한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인문학', '어머니 브런치 인문학' 같은 것이다. 남해안 관광활성화사업의 하나, ‘2010 휴·안·정(休·安·情) 문화관광사업’도 있다. 부산을 찾는 관광객이 마음의 휴식(休)과 안정(安), 정감(情)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이다.

2010년에는 ‘부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개관했다. 지역특성에 적합한 전문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한다.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예술교육과 다양한 학술사업도 힘껏 펼쳤고. 문화예술교육 발전을 위한 기반 다지기도 했다. 문화예술교육계 각 기관간 네트워크 구축사업도 기억에 남는단다. 특히 부산과 중국 상하이, 일본 후쿠오카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조성할 문화교류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

동아시아 협력 주창…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 발족

Q. 부산-상하이-후쿠오카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떤 계기인가?

“아, 2000년, 그러니까 21세기 들어 ‘부샤후 플랜(PuShaFu Plan)’을 주창했던 일이 있다. 동아시아의 주요 항구, 세 도시를 잇는 동북아 학문적 협력체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이 때 중국 상하이 교통대의 고문교수로 위촉받았고. 2002년에는 한․중 수교 10주년을 기념, 부경대-중국 인민대 학생들이 공동참여한 대학생 대장정 프로그램 ‘한라에서 장성까지’를 실시, 새로운 협력방안을 모색했다. 그 때 또, 인민대학 명예교수로 위촉받았다. 요즘 말로 ‘민간사절’ 역할 엄청 했던 것 같다.”

중국 상하이교통대는 11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공학분야 선도대학이다. 강택민 전 총서기도 이 대학 출신. 인민대학은 중국정부의 국장급 관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중국 10대 중심대학 중 하나다.

부경대 총장 시절인 2001년 부경대에서 열린 부산-상하이-후쿠오카를 하나로 묶는 부샤후 센터 개소식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Q. 일찍이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를 발족, 오래동안 집행위원장을 맡아왔다. 어떤 인연인가?

“지난 94년 즈음이다. 우리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 쓰시마에 갔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관심밖에 있던) 조선통신사 행렬을 일본인들이 재현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자료를 수집, 2002년 조선통신사문화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초기에는 행렬을 재현하는데 치중하다, 이제 문화교류행사를 많이 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1607년부터 204년 동안 12차례 일본을 왕래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집안의 에도 시대(1603~1867년). 한-일 두 나라가 사신을 주고받은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섰지만, ‘조선통신사’의 기점을 1607년으로 잡은 까닭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대규모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고 행렬을 재개한 때가 이 때다. 두 나라의 평화▫화해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현대의 관점으로 불러낸 아이콘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Q. 조선통신사, 지금 어떤 의미인가?

“과거 역사는 이제 현재의 문화로 거듭나야 한다. 복원은 이를 위한 차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통신사 행렬의 온전한 재현도 시도해 볼 만하다. 결국 경색된 한일관계에도 이렇게 통신사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양국 선조들의 '성신교린(誠信交隣: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로써 교류하는 것)' 정신을 본받기 위한 것 아니겠나.”

그는 한·일 문화교류 및 우호친선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9년 일본의 외국인 서훈인 욱일중수장을 받았다. 400년 전 조선-일본 간 우호협력을 이끈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되살린 그의 공로를 일본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은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와 조선통신문화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 문화행정의 전환기적 변화를 이끌었다. 사진은 2011년 일본 대마도에서 열린 '제18회 조선통신사 연고도시 전국교류대회'에서 정사로 행렬에 참가한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모교 교수에서 총장까지…‘학문의 자세’ 강조

그는 부경대 제2대 총장 출신이다. 모교 출신으로, 교수를 거쳐 총장을 맡은 영광은 참으로 가볍지 않을 터. 2000년 7월 취임 때 “21C 아시아적 학문관 및 문화관을 확립할 것”을 선언했다. 역시, 늘 ‘문화의 힘’을 강조해 온 그다운 취임 일성이다.

Q. 2004년 6월 교단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며 고별강의를 했다. 그 강의 제목이 ‘감나무에는 감을, 배나무에는 배를’이던데...?

“학생들은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한우물만 파는 자세가 필요하다. 학문에 인기학문과 비인기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그는 '취직 잘 안 되는 학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제자에게 '학문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한 학문에서는 모든 학문의 알파와 오메가를 발견할 수 있다, 국문학과가 취직이 썩 잘 되지 않는 학과지만, 사실 국문학과만큼 모든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학과도 흔치 않다, 그런 얘기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도 "사람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규정한 뒤 "항상 다른 사람의 사고를 인정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Q. 퇴임하며, 부경대 울산이전 무산에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말은 어떤가?

“그렇다, 참 아쉬웠다. 사실 부경대로선 결정적 도약의 기회라고 봤지만, 교수들의 반대로 이전에 실패했다. 이 문제, 시동을 건 것은 울산시다. 박맹우 울산시장이 지방선거 공약으로 ‘국립대 울산 유치’를 내걸었고, 특히 부경대에 큰 관심을 갖고 이전에 따른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물을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당시, 강 총장으로서는 도 단위 중심대학이 되는 것과 의과대학의 설립, 연구비의 확보 등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공론화 조건으로 *부지 100만 평 제공, *1000억 원 발전기금 제공, *아카데미폴리스 건설 및 초·중·고교 신설 등을 제시했다. 울산시는 초·중·고교 신설은 광역시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 노력을 조건으로 하고, 나머지는 이내 ‘전격 수용’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부산을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교수들의 움직임도 본격화, 울산이전 졸속추진 반대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끝내 백지화에 이른 것이다.

한․일 갈등, 문화로 극복하려 노력

Q. 총장 재임 때, ‘조선통신사와 한일관계’를 주제로 일본 국회 강연을 하고, ‘역사왜곡 잘못 직접 알리겠다’며 일본 대학 강연도 갖곤 했다.

“지리적▫역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두 나라가 언제까지나 지금 같은 갈등관계를 유지할 수야 있나. 정치적 이유로 경색된 양국관계를 문화의 힘으로 극복해보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이 때, 조선통신사들이 머물렀던 시즈오카(靜岡)의 세이켄지(淸見寺)에 있는 통신사들의 서화와 한시, 필담자료 등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실상 소문난 일본통이다. 그가 부경대 총장 퇴임 때, 한 일본 언론인이 <부샤후의 깃발을 휘날리며-한국 대학인 강남주의 세계>라는 책을 발간했을 정도다. 일본의 대표적 지방지 서일본신문의 편집위원 시마무라 하츠요시 씨의 역작이다. 그는 1995년 문화부 차장 시절, 당시 일본 후쿠오카대학에서 외국인 연구원으로 한일문화교류 관계를 연구하던 강 교수를 만난 이래 오랫동안 이웃나라 기자의 시각으로 지켜본 모습을 이 책에서 소개했다.

시마무라 씨는 서문에서 “강 총장은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추진해 온 부경대 총장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인, 조선통신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해왔다”면서 “강 총장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부산-중국 상하이-일본 후쿠오카를 잇는 삼각벨트를 만들어 동북아 3국이 문화와 학문을 교류하자는 '부샤후 플랜' 같은, 강 총장이 펼친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소개했다.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④]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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