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喜壽)넘긴 '뜨르르' 문학소년...“이젠 swan song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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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喜壽)넘긴 '뜨르르' 문학소년...“이젠 swan song준비"
  • 취재기자 이원영
  • 승인 2016.05.1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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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대 걸작 구상 중인 원로 문인,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을 만나다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지난 3월 30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조선통신사 역사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했을 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가 있다. 실질적인 산파역을 맡은 한국 측 학술위원장 강남주(78) 전 부경대 총장이다. 부산 문화계의 원로이며,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강남주 선생은 조선통신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온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조선통신사에 대해 아는 이도 드물다.

다들 아는대로 조선통신사는 조선 조정이 일본의 막부(幕府)에 파견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움직임은 2013년 5월 조선통신사 축제에서 한국의 부산문화재단 측의 제안으로 비롯됐다. 그리고 2014년 4월부터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문화사업 한국추진위원회와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지 연락협의회가 주축이 돼 양국 학술위원이 10명씩 교대로 오가며 열두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추진해 왔다. 유네스코 등재 신청 목록은 총 111건 333점(한국 63건 124점, 일본 48건 209점)이다. 강 선생은 한국측 학술위원장을 맡아 등재 준비 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 강남주(78) 前 부경대학교 총장(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강남주, 그는 누구인가?

부산의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강남주 선생만큼 활발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는 드물다.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총장을 역임했고 부산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부산의 문화예술 지원 정책의 뼈대를 세웠다. 사단법인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집행위원장도 오래 맡았다.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위원회 학술위원장을 맡았던 것.  

그게 다가 아니다. 청년 시절엔 신문사의 민완 사회부 기자로 10년 동안 취재현장을 누볐다. 그리고 시인과 문학평론가로도 오래 활동했다. 9권의 시집과 3권의 시 평론집, 2권의 수필집이 그 결실이다. 그리고 일흔이 넘어서 소설가로도 정식 등단했다. 한 마디로 여느 사람의 몇 곱이나 되는 바쁘고 다양한 삶을 살아 온 셈이다.

시빅뉴스가 지난 17일 해운대의 한 카페에서 강 전 총장을 만나 조선통신사 이야기와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었다.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 사업의 산파역

우선,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 신청 이야기부터 들어 보았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양국의 역사적 관점이 다른 만큼 조율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던 게 사실. 그러나 신청서 내용을 두고 일본 측과의 의견 차이는 예상보다 적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 인식과 언어의 차이로 의견이 대립될 때도 있었지만 충분히 합의가 이뤄졌다. 조선통신사의 문화 교류, 평화의 정신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문화사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가 조선통신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구경하면서 부터다. 부경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1994년부터 이듬해까지 당시 문교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 있었다. 후쿠오카 대학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대마도로 현장 조사를 가곤 했다. 그곳에서 매년 8월 셋째 주 토요일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하는 ‘시모노세키 축제’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첫 도착지였고, 시모노세키가 그 두 번째였다.

“조선통신사는 부산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그리고 부산에는 조선통신사 축제가 없었을까요? 그 점이 참 아쉬웠어요. 그때부터 반드시 부산에서 출발하고 귀국하는 행사를 재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문화부와 부산시의 협조를 얻어 2002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 축제를 개최하게 되었지요.”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통신사 축제에서는 한일 월드컵에 맞춰 1711년의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그대로 재현했다. 용두산 공원에서 출발해 펼쳐지는 거리 퍼레이드였는데, 첫 시도인 만큼 허술한 점도 있었지만 신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이야 조선통신사 축제가 일반 시민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졌고 젊은 학자들도 조선통신사학 연구에 뛰어들어 활기를 띄게 됐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통신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학자는 한국에서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 조선통신사 행렬도(사진: Google 검색).

조선통신사의 의미와 가치

강남주 선생은 2007년 시모노세키 축제에 초대됐을 때 만찬장에서 인사말로 “조선통신사의 의미와 가치는 한국과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며 유네스코 등재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당시 일본 측도 크게 호응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유네스코 등재 신청 작업의 발판이 놓인 셈이다. 강 선생으로부터 조선통신사의 역사에 대해 좀 더 들어보았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2년까지 200여 년간 열두 차례 파견됐다. 1592~1598년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일본은 적대국이 됐다. 그러다가 1603년 일본 천하를 통일하며 에도에 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조선의 사신들을 초청했다. 그 초청을 받아들인 것이 조선통신사의 출발이었다.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떠나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약 6개월에서 10개월이 걸렸다.

“당시 조선통신사 사행원부터 가마를 메는 사람, 짐을 드는 사람, 경비를 서는 사람들까지 제반 체재 비용을 일본 막부가 모두 부담했어요. 그만큼 조선의 선진 문화 수용이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이죠. 섬나라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異)문화인 대륙(조선)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는 이 대목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조선통신사 사절을 지원한 것은 평화 유지 비용을 부담한 것이에요.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전쟁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세계 역사를 보면 200년 간 국경을 접한 나라 치고 전쟁을 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벌였고, 또 국경을 맞댄 독일과 프랑스는 10년이 멀다 하고 싸웠으며, 로마제국은 끊임없이 유럽을 침략했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문화를 조공했던 사절로 오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는 “문화 교류에서 두 나라를 단순히 발신자와 수신자로 나눌 순 없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과 조선은 서로의 문화를 주고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 신청 결과는 내년 7월 발표된다. 진두 지휘했던 유네스코 등재 신청이 이뤄졌으니 한국측 학술위원장을 마지막 공식직책으로 은퇴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미련 없이 물러난 데는 '이만큼 했으니 후학들이 나서도 등재 성공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자부심도 숨어 있을 것이다.

▲ 강남주 선생은 부산에서 조선통신사 문화산업을 이끌었다(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학창 시절부터 문예창작에 흥미를 가져

조선통신사 등재 신청 뒷이야기에서 그의 라이프 스토리로 화제를 옮겨 보기로 했다.

강남주 선생은 부산수산대학교(부경대학교 전신) 수산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부산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돌연 전공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짓기에 흥미가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국어시간에 학급에서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이튿날 국어 선생님이 “가장 잘 쓴 글을 읽어 주겠다”고 했다. 그가 쓴 글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학급 친구들에게 물었고, 아이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히 바라 보고 있었다. 부끄러움 많은 시골 소년이었던 그는 책상에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이 글을 쓴 사람이 강남주다. 글을 참 잘 썼다. 박수쳐 주자”라고 했을 때 그는 “하염없이 부끄러웠지만 그때 나에게 글 쓰는 취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이 후 교내 백일장에서 곧잘 당선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용두산 공원에서 한글날을 기념하며 열린 부산시내 전체 고등학교 백일장 대회에 참가했다. 그 때 쓴 글이 상을 받았고, 같이 수상한 친구들과 ‘학생 문학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당시 부산의 '뜨르르한' 문학 소년으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문예 활동을 벌였다. 그 시절 문학 소년들이 지금은 원로 시인이 됐다고 한다.

그가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부산에는 국립대학으로는 부산대학교, 수산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가 있었고, 사립대학으로는 동아대학교가 있었다.

“부산은 삼면이 바다니까 수산대에서 공부해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서울로 유학갈 형편은 안되고, 문학이야 내가 취미로 따로 하면 되겠다 생각했지요.”

부산수산대 수산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다. 문학 콘테스트에 작품을 보내 당선이 되곤 했다. 대학 성적을 보면 A학점을 받은 건 교양 국어와 영어뿐이었고, 교양수학은 D학점, 낙제점이었다. 자신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수산경제학에서는 씨앗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문청'의 열병을 앓았던 시기였다.

“전공 학점은 B와 C 투성이었어요. 말 그대로 비실비실했지요. 학과 교수님들도 수산경제학보다는 문학을 열심히 하는 ‘이단아’로 봤지만 다행히 미움 받진 않았어요. 허허.”

같은 대학 국문학 교수이자 유명 소설가였던 이주홍 은사로부터 “너는 너의 소질을 살려서, 대학원에 가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4학년에 진급한 후에야 대학원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시험이 크게 어렵지 않았고, 영어 성적이 좋은 편이라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산대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부 기자로 종횡무진 활약...

대학원을 마친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언론계. 그는 1964년 부산 MBC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제가 사회에 첫 발을 디뎠던 그 시대에는 공개 채용으로 시험을 쳐서 갈 수 있는 직장이 드물었어요. 생산직 회사는 많았지만 사장의 아들, 딸이거나 조카 등 연고가 있어야 취직할 수 있었죠.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게 선택지는 신문사와 방송사 밖에 없었어요.”

방송사 공채 시험을 보던 당시 그의 실력은 '무엇을 논하라'는 문제에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문장력이 있는 정도였다고. 그는 “대학생 때 4.19혁명이 일어나서 당시 대학은 진지하게 학문을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무리에서 비교적 유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입사 4년 차에 접어든 무렵 1967년 끔찍한 소년 유괴·살인 사건이 터졌다. 그는 16일 간 경찰서 기동타격대에서 잠을 자며 그 사건을 취재했다. 덕분에 특종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TBC로 이직하며 특진에 특종상까지 받을 만큼 그는 1978년까지 10여 년 간 기자로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마누라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저는 젊어서 연애도 열심히 했어요. 그만큼 관심 있는 일에는 굉장히 몰두하는 타입이지요. 돌이켜 보면 기자로 일했을 때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싶어요.”

"그 바닥에서 유수한 사람이 되어라”

1978년 기자를 그만두기 전까지 4년 동안 그는 부산에 있는 여러 사립대학에서 영문학 시간강사 일을 병행했다. 전임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도 썼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핸디캡은 전공을 바꿨기 때문에 학부부터 전공을 한 사람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는 그는 "덕분에 새롭게 개척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꼈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대학 교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도 자연히 먹게 됐다”고 덧붙였다.

TBC 보도국 차장에서 물러난 후 부경대 국어국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26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비로소 천직을 찾은 셈이다. 2004년 6월 고별 강의 때까지 강 선생이 학생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강조했던 가르침이 있다. “어느 분야든 뛰어난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든 선택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 그러면 여기서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느 분야든 유수한 사람을 찾게 돼 있다. 학문적,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 국어국문학과가 취업이 안되는 학과로 꼽히던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자극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전기 밥솥이 잘 팔리고 있어요. 우리 회사에서 B라는 신제품을 개발했는데 A보다 뛰어나다는 건 개발팀만 아는 사실이죠. 이걸 알리려면 마케팅이 필요해요. 그럼 광고업체가 필요하고 뛰어난 광고 문구를 만들어 낼 사람을 찾게 되죠. 내가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하든지 두각을 나타낸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반드시 있다는 얘깁니다. 국어국문학 전공자가 꼭 문예 창작의 길을 걷지 않아도 광고 기획자로서도 이름을 날릴 수 있어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 '문청'기질을 잃지 않았던 강남주 선생은 2013년 소설가로 등단했다(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75세의 나이에 새내기 소설가로 등단

강 선생은 1972년  <신문학> 천료로 등단해 44년 간 시를 써온 원로시인이다. 시집도 9권이나 낸 터다. 시업(詩業)으로 이미 일가를 이뤘으니 유유자적할 만한 한데도, 그는 천생 '문학청년'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또 일을 저질렀다. 늦깎이 소설가가 된 것. 그것도 슬쩍 책을 낸 게 아니라 정식으로 등단 절차를 밟았다.   

4년 전 그는 서울의 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소설을 보냈다.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는 “이 정도면 되겠거니 했는데, 내 감각이 떨어졌구나 싶었다”고 했다. 오기가 생겨 이듬해 3월 낙선작을 손을 봐서, 한 문학잡지사에 다른 작품과 함께 2편을 보냈다. 그러나 마지막 심사에서 또 아쉽게 떨어졌다.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잡지에 투고했다. 드디어 성공했다. 2013년 계간문예지 <문예연구> 제61회 신인문학작품 공모전 소설 부문에서 단편소설 <풍장의 꿈>으로 당선됐다. 일흔 다섯의 나이에 신인 소설가로 등단한 것. 그는 “사실 낯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래도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을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후 문학잡지에서 여러 편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의 데뷔작 <풍장의 꿈>은 추모곡으로 유명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와 닮았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그곳엔 내가 있지 않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라는 노래 가사처럼 자식에게 신세지지 않으려는 늙은 부모의 정서를 담고 있어요. 풍장의 꿈은 ‘빈 둥지 증후군’에 대한 이야기에요. 자식들이 커서 떠난 둥지에는 늙은 새만 남아 있죠. 그 새는 향수만 먹으며 늙어 가요. 둥지 떠난 새들이 돌아와서는 부모의 노망을 걱정하지요. 효(孝)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요. 우리사회도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가고 있어요. 인생 경험이 축척되어 삶을 되돌아보는 깊이를 가진 ‘노인’을 문학의 주체로 끌어 오고 싶었어요.”

'백조의 마지막 노래’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

강남주 선생은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근황은 소설 쓰기에 열중하는 것이다. 젊어서는 기자로서 취재하는 데, 대학 교수로서 논문을 쓰는 데 집중해 왔다. 이제는 은퇴했다. 자신의 말마따나 백수다. 그는 “시간이 가장 많은 지금, 가장 하고 싶었던 소설 쓰기를 마음 껏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단순히 노후를 보낸다기보다는 열정을 쏟고, 애를 써보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살고 싶어요. 백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하지요. 그만큼 혼을 쏟아낸 소설을 쓰고 싶은 의욕이 넘칩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노령 세대가 겪는 삶에 대한 이야기. 지금 쓰고 있는 작품도 그것이다. 장편 소설을 600매까지 썼다가 컴퓨터에서 날려 버렸고, 다시 1000매까지 썼는데 출판사 사정으로 보류가 되는 바람에 지금 다시 새로 240매까지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의 모티프는 조선통신사와도 관계가 있어서 1년 후 유네스코 등재 결과가 발표되는 때에 맞춰 출판을 하고 싶다고 한다.

“물론 젊었을 때 만큼 에너지가 넘치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즐거움으로 도전하는 것이지요. 출판이 되든 안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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