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한 주의 핫뉴스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일 터이지만, 내 생각에 뉴스의 표면에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봐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문빠 논쟁’이 그것이다. 이런 이야기이다.
문 대통령의 방중 기간에 대통령의 동정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중국 측 경호원들에게 끌려가 뭇매를 맞은 건 다들 알 거다.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따를 수도 있는 ‘옥의 티’라기엔 기자들의 부상 정도도 심했고 그 경위도 좀 고약했다. 신문 방송이 연일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 때문에 본질이라 할 문 대통령의 방중 성과가 일정 부분 가려지기도 했다.
경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국 기자단이 억울하게 폭행당했을 수도 있고, 막무가내로 VIP에게 밀고 들어가는 ‘한국식 취재 방식’이 불러일으킨 춘사(椿事)였을 수도 있겠다. 설사 후자였다 해도 격리하는 수준을 벗어나 끌고 가 때리고 짓밟는 정도였다면 문제가 아닐 수는 없다. 어쨌든, 한국 기자들은 국빈을 수행한 손님이지 않은가. 국민들도 크게 봐선 대통령의 수행단이랄 수도 있는 기자들을 두들겨 팬 중국 측의 무례에 불쾌해 했다.
그런데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반응은 대개 이랬다. 중국까지 가서 오죽 극성을 떨었으면 맞았겠느냐,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게 아니냐는 것. 심지어 기자 폭행을 전하는 보도에 “기레기 새끼들 중국에까지 가서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설쳤으니 쳐맞았지” 하는 날선 댓글을 올린 이도 있었다. 글쎄, 자국민이 외국에 가서 설사 좀 무리한 일을 했더라도 얻어맞았다면 일단은 같이 흥분해 주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오히려 고소하다는 식이니 좀 얼떨떨하긴 하다. 아마 문 대통령에 대한 언론 보도에 평소 잔뜩 불만이 쌓여 있던 터에, 이번 방중을 두고도 문 대통령이 중국에서 홀대를 받았네, 조공외교를 했네 하는 정제되지 않은 보도를 쏟아낸 일부 언론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런 반응이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반응이 이런 것이다. 어떤 이가 올린 SNS에 올린 글이다. “경호원이 기자를 가장한 테러리스트인지 기자인지 어떻게 구분을 하겠냐. 폭력을 써서라도 일단 막고 보는 게 경호원의 정당방위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또 “폴리스라인 넘은 시위대에 가차 없이 폭력 행사하는 미국, 유럽, 일본 경찰을 칭송했던 한국 언론은 한국 기자가 경호라인을 넘어 폭행당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중국 경호원도 칭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도 했다. 이 글의 주인공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던 조기숙이란 교수다.
비난이 커지자, 조 교수는 “저는 기자를 제지하는 수준에서 몸싸움이 오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폭력이 그렇게 과도한지 몰랐다”며 “제 의견은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고 만일 기자가 질서를 어겨서 벌어진 일이라면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실제 있었던 집단폭행은 용서할 수 없는 과도한 폭력이라고 우리 언론은 주장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불법 시위대에 대해서도 물대포를 직사해 신체를 위해해선 안되듯이 기자가 비록 질서를 어겼다 하더라도 집단폭행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한발 물러섰다.
일이 이쯤에서 그쳤으면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또 다른 교수가 이 같은 일부 여론의 흐름을 거세게 질타해 다시 문제가 불거지고 말았던 것. 평소에 진보 성향의 언론에 패러디 형식의 글을 자주 기고하며 박근혜 정권을 맹공했던 서민이란 기생충 전공 학자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조 교수의 SNS 글을 표적 삼아 이런 글을 올렸다.
"미운 내 새끼라 해도 남에게 맞으면 화가 나는 게 인지상정인데 문빠들은 도대체 왜 우리나라 기자들의 폭행에 즐거워하는 것일까. 문빠들의 정신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문빠들의 병이 깊어져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못하고 결국 이명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기자들 탓이라는 게 문빠들의 진단이었다. 문 대통령을 지키려는 대상이 기자들이다 보니 문빠들은 대통령에게 불리한 기사다 싶으면 우르르 달려가 욕을 해댔다.(…)사정이 이렇다면 문빠들을 병원에 데려가 집중치료를 하는 게 맞지만 문빠 스스로 자신들이 아프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다보니 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어렵지만 데려간다 해도 나을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문빠의 생각과는 달리 문빠의 존재가 문 대통령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이른바 ‘문빠’들이 가만있을 리 있나. 그들은 서 교수의 블로그와 그의 글을 보도한 언론 기사에 달려가 육두문자를 동원해 집중 성토했다. 조-서 교수 사이에도 명예훼손이니 어쩌니 실랑이가 오고 갔고, 견디다 못한 서 교수가 자신의 글에 사과문을 올렸다. 글쎄, 한국 기자가 맞은 것을 두고 ‘정당방위’ 운운 한 거나, ‘문빠들이 미쳤다’고 한 거나 아카데미즘의 일각을 지키는 교수님네의 글이라기엔 좀 민망하긴 하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한국 사회에선 꽤 진보적 스펙트럼에 속하는 사람들이어서 문 대통령에 관한 한 진영도 없고, 피아도 없는 백병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문재인 지지자’들의 결집은 사실 뿌리가 오래 됐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그 토대가 됐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노사모는 변방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의 장벽에 갇혀 곤욕을 치를 때마다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원’을 자임했다. 끝내 노 대통령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사태에 이르자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를 외치며 가슴 아파했던 터다.
그 후 9년의 보수 정권 아래서 그들이 발견한 신상품이 ‘문재인’이었을 터다. ‘우리 이니(문 대통령 애칭)’는 그들의 비원(悲願)과 희망이 담긴 등불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초, ‘촛불’을 거치면서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는 그들의 헌신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됐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들은 SNS의 ‘전사’로서 문재인이 당선돼야 할 당위성을 열심히 설파했고, 보수 세력의 발호를 견제하는 데 힘을 바쳤다. 그리고 문재인은 올해 5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이런 저런 비난의 목소리가 슬슬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였다. 그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언론이나 지식인 그룹에게 매우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적대적 태도는 이른바 ‘수구 꼴통’ 정치인이나, 언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크게 봐선 같은 진보적 색채를 가졌거나, 잠재적 우군이랄 수도 있는 정치인이나 언론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문재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기미만 보이면 몰려가 댓글로 융단폭격을 하면서 ‘초전박살’하려는 모습을 보인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이 발행하는 시사 잡지의 문재인 후보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기사 중에 대통령 부인 김정숙을 ‘여사’라 표기하지 않고 ‘씨’라고 표기한다거나 하는 일견 매우 사소한 것들이다. 기사 내용이 아닌 사진 앵글 따위를 문제 삼은 것도 그렇지만, 역대 대통령 부인들을 모두 평등 호칭인 ‘씨’로 표기해 왔다는 언론사의 해명 따위는 들은 체도 않았다. 절독하겠다고 나서니 결국 언론사가 굴복해 ‘씨’ 대신 ‘여사’로 표기하기로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다가 지난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와 경쟁했던 안희정 충남 지사도 마찬가지. 그는 강연 도중 질문을 받고 이런 취지로 말했다.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 우리 ‘이니’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어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면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이견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지지 운동으로는 정부를 못 지킨다”고 강조했다. 이런 말도 했다. “‘대통령이 하겠다고 하는데 네가 왜 문제를 제기하느냐’고 한다면 우리 공론의 장이 무너진다”며 “아예 처음부터 닥치고 따라오라는 구조로 가겠다는 것은 잘못된 지지 운동”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자, 안희정에 대한 이른바 ‘문빠’들의 융단폭격이 시작됐던 것도 다 아는 일이다. 어떤 네티즌들은 안희정을 향해 ‘적폐 세력’, ‘친일 매국노’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부러 분란을 일으켜 다음 대선 주자로서 존재감을 알리려는 것”이란 비난 댓글도 쏟아졌다.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팟캐스트 운영자는 “안 지사는 정치를 그만둬야 한다”고도 했다.
글쎄, 나는 안희정의 발언에 딱히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데, 크게 봐선 ‘우군’이자 유력한 차기 ‘상품’이기도 한 안희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충고(?)를 한 것은 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른바 ‘문빠’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건 이때 이후였을 거다.
내가 보기엔 ‘문재인 적극 지지자’들은 상처도 많고, 자부심도 많은 사람들이다. 노무현을 적대적 정치 환경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한(恨), 노무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인 ‘수구 세력’에 대한 분노가 뼈 속까지 각인된 사람들이다. 한편으론, 그들은 '박근혜 적폐'를 끝내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SNS로 소통하며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던 그들은 언론이나 일부 지식인 그룹에 대해 본능적인 불신과 저항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니들이 뭔데 감히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냐? 우리가 니들에게 휘둘릴 사람 같아 보이냐? 이 꼰대들아.” 이게 그들이 갖고 있는 정서가 아닐까. 어쨌든, 그런 문제들이 쌓여 가다가 이번 대통령 방중을 계기로 이른바 ‘문빠 논쟁’이 본격 제기된 셈이다.
3.
‘문재인 지지자’들의 행동 양식을 ‘정치적 팬덤’ 현상으로 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재인 지지자들도 자신들이 ‘문재인 팬’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팬덤은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문화 현상’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게다. ‘광적인’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퍼내틱(fanatic)에서 따온 팬(fan)과 ‘영지’, ‘나라’를 의미하는 덤(dom)의 합성어다. 원래는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부르는 개념이다. 그러니 ‘특정한 스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구축한 자기네만의 나라’라고나 할는지.
팬덤 현상이야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다 있었던 게 사실이다. 1960년대만 해도 당대의 청춘 심벌 신성일이 나타나면 몰려든 팬들 때문에 기마경찰들이 거리를 정리해야 했다지 않은가.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1980년대 컬러TV 방송이 시작되면서 대중문화가 확산된 것과 맞물린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어떤 이는 연예인 팬덤화의 시작을 1980년대 가수 조용필을 따라다니던 ‘오빠부대’로 보기도 한다. 조용필 콘서트 장에 몰려든 10대 후반의 소녀들은 그가 무대에만 나타나면 비명 같은 환호성을 질렀던 것. 이런 농담도 있다. <비련>이란 노래를 부를 때, 조용필이 “기도하는~” 하고 시작하면 어김없이 “꺅!” 하는 비명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라디오를 듣던 기성세대는 “꺅!”이 원래 노래 가사의 일부인 줄 알았다는 거다.
1990년대 들면서 연예인에 대한 본격적인 팬덤 현상이 시작됐다. 서태지, 젝스키스, 에쵸티(HOT) 팬클럽 등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1990년대 말엔 젝스키스와 에쵸티 팬들이 자기네가 좋아하는 스타들을 놓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기도 했다. 이들이 실제로 벌였다는 패싸움은 팬덤 문화의 상징적 장면으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영화 <써니>나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등이 소재로 삼기도 했던 터다.
팬들은 단순히 주류 미디어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재료 삼아 자신들을 위한 즐거움을 창조해 내는 방식으로 그들만의 대중문화를 구축해 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피스크(John Fiske)는 팬 문화가 지니는 생산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기호학적 생산성(semiotic productivity). 문화 상품들의 기호학적 자원에서부터 사회적 정체성과 경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이를 테면, 팝 가수 마돈나의 팬이 가부장제적 섹슈얼리티 대신 자신들만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 그렇다. 둘째는 언술적 생산성(enunciative productivity)이다. 팬들이 기호학적으로 만들어진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의미가 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 그들은 팬덤의 대상에 대한 특정 의미를 만들어 내고 유통시킨다. 그들만의 특정한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 의상,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따위도 그들이 특정 팬클럽 소속임을 드러내는 언술적 행위라는 것. 셋째는 텍스트 생산성(textual productivity). 팬들은 문학, 예술, 대중문화 분야의 공식 작품들에 비견될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 테면, 열성 팬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브로마이드를 만들거나, 동영상을 편집해 공유하는 것 등이다. 자기들끼리 2차 상품을 만들어 공동체 내에서 유통시키는 건데 그 수준이 기획사가 만들어낸 1차 상품에 못지않은 경우도 있다.
팬덤 현상을 긍정적으로 풀이하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집단지성을 구현하는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팬덤 구성원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팬덤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협력적으로 생산하고 공유한다. 자신들의 이상과 판타지에 기반해 집단적으로 의미를 해석하고, 토론하고, 공유하는 모습은 집단지성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는 것.
미국이나 서구에서도 연예인에 대한 팬덤 현상이 없는 건 아니다. 팝가수 비욘세도 ‘BeyHive’란 팬클럽이 있고, 아리아나 그란데도 ‘아리아나+터미네이터’의 합성어인 ‘Arianators’를, 레이디 가가도 ‘Little Monsters’란 팬클럽을 가지고 있다. 소속사가 연예인의 양성부터 데뷔 후 SNS 관리까지 매우 큰 역할을 하는 한국에 비해 미국은 소속사보다는 프로듀서 영향이 크다고 한다. 연습생 개념도 없다고. 미국은 소속사가 운영하는 공식 팬 홈페이지보다는 가수의 개인 SNS, 개개인 팬이 운영하는 텀블러, SNS 등이 대다수라고 한다. 온라인에서 팬들이 기사에 몰려가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온라인 투표에 참여하는 열기는 한국에 비해선 매우 미지근하다고.
그런데 최근 한국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이 미국에서도 한국식 팬덤 문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열린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에서 최신곡 <DNA>을 노래한 방탄소년단이 일으킨 현지 팬덤 문화를 지켜본 빌보드는 이렇게 평했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관객 참여의 개념을 근본부터 뒤집어놓았다.”
AMA가 열린 LA 마이크로소프트시어터는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멤버의 이름이 외쳐지고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 ‘떼창’이 한데 어우러졌다고. 미국 언론들은 “AMA의 최고의 순간”, “시상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이라며 신기해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해외 팬들도 한국식 팬덤 문화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팬클럽의 충성도나 열정은 전 세계에서 한국을 따라 갈 곳이 없다. 어쩌면 그게 오늘날 ‘한류 열풍’을 만든 근본적 힘이 됐는지도 모를 일.
4.
팬클럽이란 게 연예인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정치 영역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수 있고, 얼마든 그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
한국의 정치 팬덤의 원조는 아무래도 김영삼, 김대중일 것이다. 김종필까지 넣어줘서 ‘삼김’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1987년 겨울 벌어진 대선에서 삼김과 노태우는 전국 각지를 유세하며 한 장소에 100만 명에 이르는 청중을 동원하는 경쟁을 벌였다. 글쎄, 대중문화 스타들이 콘서트에서 팬 동원 경쟁을 벌이는 것과 비슷했다고 해야 할는지.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대중 정치인인 김영삼, 김대중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누린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과 시민사회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분열해 노태우와 맞붙게 됐던 것. 그러니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정권교체를 희망했던 사람들도 따라서 김영삼 지지자와 김대중 지지자로 갈려 버렸다. 이른바 재야와 시민사회단체도 김영삼을 지지하는 ‘후보 단일화’(후단)파와 김대중을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비지)로 나눠졌고, 출신 지역에 따라 유권자들도 쪼개져 버렸다.
선거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어제까지 동지였던 양쪽이 서로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을 넘어서 상대에 대한 저열한 인신공격까지 난무했다. 당시 민정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먹혔다고나 할까. 김영삼이 광주에서 유세하다가 돌팔매를 맞았고, 김대중이 부산에서 유세하다 심한 야유를 받았다.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민주 세력의 참담한 실패로 끝났던 거다. 야당 지지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욕심 때문에 다 된 죽에 코를 빠트린 장본인들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들에 이어 확실한 팬클럽을 가진 정치인을 꼽자면 아무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겠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서울 종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는가 하면, 부산시장 선거 등 질 게 뻔한 싸움에 몸을 던져 지역주의와 맞싸운 그에겐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됐다. 노사모의 지지가 2002년 노무현 당선에 결정적 도움을 준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서 세간에선 노무현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을 ‘노빠’라고 부르는 화법도 생겨났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지지자들인 ‘유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자들을 의미하는 ‘문빠’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지지자들을 뜻하는 ‘안빠’가 나타나기도 했다. 진보 쪽의 팬클럽 문화에 자극받아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박사모)’이 생겨난 것도 다 아는 일이다.
‘문재인 지지자’ 역시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밀어 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노무현 때의 좌절을 거울 삼아 이번엔 문재인의 제대로 된 ‘호위무사’를 자임하고 있는 것.
5.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팬덤 현상’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니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못 된다. 그러나 팬덤 현상이 과열될 때, 그리고 지나치게 극성스런 팬이 나타날 때 문제가 된다. 이를 테면 ‘안티 팬’ 현상이 그것이다. 10대 소녀 팬들이 인터넷 상에서 자기네 우상과 경쟁관계인 라이벌 가수를 비방하거나 조직적인 안티 운동을 펼치는 것 말이다.
때로는 이른바 ‘조공문화’도 이뤄진다. 팬레터를 보내거나, 자기가 만든 이런 저런 기념품을 보내는 것을 넘어서서 팬클럽이 주도해 돈을 거둬 스타에게 비싼 선물을 보내는 것 말이다. 최고급 명품 시계, 고급 자동차를 선물하기도 하고, 미국 뉴욕 번화가에 스타 광고를 내주는 식이다. 팬 조공은 팬클럽 운영진이 조공 물품을 구매할 비용인 ‘총알(조공비)’을 추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정 규모의 조공비가 확보되면 조공할 ‘조공템(조공물품)’을 선택하여 구매한 후 스타에게 전달하는 방식. 조공 선물을 받은 스타는 인증샷을 찍어 트위터 등에 올리며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팬들은 이를 ‘조공 짹짹이(조공 인증샷 트위터)’가 떴다고 표현한다.
정치 팬클럽도 마찬가지다. 자기네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걸 뭐라겠나마는 그게 다른 정치인이나,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 행위로 표출돼서야 곤란하지 않을까. 기본적인 논리와 예의를 갖춘다면 누구라도 어떤 정치인이든 비판할 수 있다. 거꾸로 상대가 기본적인 논리와 예의를 갖췄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 혹은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도 용인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지금 이른바 일부 문재인 극성 지지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지점일 터다.
안희정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충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협조해 달라”고 문재인 팬들에게 요청한 것도 지나친 과열 현상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서민이란 교수가 “문빠들이 미쳤다”고 일갈한 것은 설사 패러디라 해도, 표현이 지나치게 과격했던 건 말할 나위가 없지만 문제의식은 비슷할 것이다. 내 지인들 중 말 깨나 하는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잘 되기를 열망하지만, 이따금 비판이나 조언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문빠’가 무서워서 입을 열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걸 더러 들었다. 심지어 페이스북에 글 한 번 올렸다가 욕설 섞인 집중공격을 받았다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열기가 지나친 나머지 일체의 반대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리고 몰려가서 댓글로 ‘빠개 버리는’ 태도는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그것을 토론을 통해 걸러내고 통합하자는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집단지성’이 아니라 ‘우중 정치’가 될 우려도 있다. 장기적으로 그게 문재인 정부에 해악이 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니가 뭔데 감히 우리 ‘이니’에게, 우리에게 까불어? 맛 좀 봐라”는 식은 반지성적이다. 언론도, 지식인도 비판받을 건 받아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시도하거나, 일체의 비판 발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문제 아닌가. 하기야, 문재인 지지자들이 따로 실체가 있는 조직에 들어 있다거나 누구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안개’ 같은 불특정 다수이니 거기다 정색하고 비판하는 소리를 내기도 멋쩍긴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극성 팬에 의한 눈먼 팬덤 현상은 자제될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지금은 70%를 넘나들지만, 이런 배타적인 태도가 계속된다면 시나브로 등을 돌리는 사람이 생기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나. 어떤 정부든 잘, 잘못은 있는 법이고 시간이 흐르면 뜻하지 않은 정치적 위기에 맞닥트릴 수도 있다. 잘한 건 칭찬하고, 부족한 건 비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미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거다. 그게 위기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정적 혹은 비판적 지지그룹의 목소리를 더욱 귀에 담아야 하는 거다. 그들을 등 돌리게 하는 건 ‘하지하책’이다.
차제에 이른바 ‘친문 핵심세력’에게도 한 마디. 건전한 문재인 지지자들이 아닌, 일부 극성스런 ‘문빠’들을 은근히 부추기고 무조건 두둔하는, 그래서 ‘팬 조공’을 요구하는 일부 정치인이나 정치 편항적 지식인들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들도 자제해야 마땅하다. 요컨대, 칼 포퍼 식으로 말하자면 ‘열린사회의 적’이 돼선 안 되겠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