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여관 방화에서 대통령의 분노까지...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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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여관 방화에서 대통령의 분노까지...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의 두 얼굴
  • 편집위원 이처문
  • 승인 2018.01.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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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서울 종로에서 일어난 여관 방화 사건은 충동적 화풀이가 빚은 어이없는 참변이다. 서울 구경을 갔던 세 모녀가 함께 목숨을 잃은 대목에서 사건의 비극성은 더욱 도드라진다. 50대 남자는 여관 주인에게 성매매 여성을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한다. 탈출구를 찾던 남자의 욕구는 분노로 돌변해 불길로 타올랐고, 애꿎은 투숙객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화풀이에 의한 인류 최초의 살인은 성경에 등장한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다. 이들 형제는 똑같이 하늘에 제물을 바친다. 농부인 카인은 곡식을, 양치기인 아벨은 양과 굳기름을 올린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인다. 이에 카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분노에 휩싸인 카인은 끝내 동생을 살해하고 만다. 일부 성서학자는 아벨이 제일 좋은 양을 올린 반면 카인은 변변찮은 곡식을 올려 하느님의 눈 밖에 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화를 제어하는데 실패한다.

1603년 Palma Gionane이 그린 <카인과 아벨>(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인간의 분노의 대한 시각은 양면적이다. 손병석 교수는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에서 분노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바람에 긍정적인 모습이 가려졌다고 진단한다.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화를 내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단언했다. 세네카에게 분노는 악이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현자(賢者)에 속한다.

세네카(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당연한 감정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분노는 튀모스(thymos). 사익과 관계없이 불의에 대해 느끼는 공분(公憤)에 해당한다. 불의에 대항해 도덕적 분개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능력인 셈이다. 이 경우 분노는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며, 사적인 것이라기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에 내재된 과도한 폭력성을 경계하면서도 분노가 중용(中庸)에 따라 표출되면 괜찮은 감정으로 간주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중용을 지키지 않는 행동이라는 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끼는 노예 소녀 브리세우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뒤 분노한다. 하지만 이 분노는 단순한 보복 감정이 아니라 명예를 빼앗겼을 때 일어나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분노에 해당한다.

분노는 이성과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적절하게만 표출된다면 한 사회의 건강함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 터이다. 분노의 긍정적 측면은 이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노다.

스테판 에셀(1917~2013)은 2차 세계대전때 나치와 히틀러에 맞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주 유엔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도 관여했다. 에셀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펴낸 저서 <분노하라>는 사회 부조리에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남긴 공개 유언이자 경고였다.

스테판 에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는 분노의 표출을 통해 세 가지를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했다. 교육혁명과 언론의 독립, 그리고 인권신장이다.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은 침묵이 아니라 정의로운 분노라는 게 에셀의 시각이다.

지난 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분노’를 표출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공방이 이어졌다. 대통령이 분노까지 할 일인가 하는 비판이 있었지만, 정부를 모욕하는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침묵만 지킬 수 없다는 반박도 잇따랐다.

이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 역시 분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칼날이 한 때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자신을 향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터이다. 더구나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검찰에서 입을 열기 시작한 국면 아닌가. ‘보수 궤멸을 노린 정치 보복’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따른 보복’이라는 자극적 표현 또한 위기에 몰린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분노는 때론 폭력이나 테러로 이어지지만 촛불혁명처럼 사회 변혁의 힘이 되기도 한다. 분노가 범죄로 이어질지, 아니면 사회적 순기능을 할지는 분노의 태생과 지향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시인 변영로는 논개의 우국충절을 기리며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다"고 했다.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이 시대에 정치권 일각에선 여전히 과거 정권의 비리 수사를 ‘정치 보복’이라 주장하는 화풀이성 분노가 그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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